767화. 북 용왕
정화의 불꽃 그 자체가 된 이준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핏빛 기둥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쉭!
5성 투성 강자도 거뜬히 쓰러뜨릴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던 핏빛 기둥은 이준과 충돌하는 순간 눈 녹듯이 빠르게 사라졌다.
곧이어 한 사람이 유성처럼 빠르게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쿵!
화염에 휩싸인 이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혈용을 향해 더욱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본왕은 실패하지 않는다!”
혈용으로 변신한 북 용왕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금지된 비술까지 사용해 동족들을 살해해가며 왕의 자리를 노렸건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크르릉!
혈용이 입을 벌리자, 또 한 번 수백 미터에 달하는 핏빛 기둥이 뿜어져 나왔다가 순식간에 작은 구체의 형태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핏빛 구슬의 표면에는 혈관과도 같은 선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쉭!
핏빛 구슬이 북 용왕의 몸을 떠나는 순간, 혈용은 그대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모든 힘을 피 구슬 안에 담은 것처럼 말이다.
“용혼주(龍魂珠)라니……! 어떻게 동족들의 영혼을 저렇게 쓸 수 있단 말인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용족 강자들은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내지르며 사지를 바들바들 떨었다. 지금 북 용왕이 사용한 것이 동족의 영혼을 뭉쳐 만들어 낸 무투기였기 때문이다.
보람 역시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온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미 미쳐버린 북 용왕의 머릿속에는 이준을 죽이겠다는 생각 외에 그 어떠한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준! 죽어라!”
핏빛 구슬이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 이준과 강하게 충돌했다.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본왕의 앞을 막을 수 없다!”
북 용왕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하지만 이준의 표정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무심한 얼굴로 북 용왕을 바라보던 이준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분홍색 화염이 해일처럼 퍼져나가며 핏빛 구슬을 덮쳤다.
그리고 핏빛 구슬과 분홍색의 화염이 맞닿는 순간, 갑자기 핏빛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던 역겨운 피비린내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핏빛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던 짙은 피 내음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이준이 가볍게 몸을 날려 피 구슬을 붙잡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이준의 손에서 폭발하지 않고 서서히 회전하는 핏빛 구슬의 모습에 북 용왕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버렸다. 핏빛 구슬이 이준의 손 안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핏빛 구슬과 연결되어 있던 느낌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정화의 불꽃은 만물을 정화시킨다. 그것이 부정한 비술로 인해 오염된 영혼일지라도 말이지.”
이준은 수정처럼 변한 분홍색 손을 서서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정화의 불꽃?! 저 녀석이 어떻게 정화의 불꽃을 가지고 있는 거야!’
정화의 불꽃이라는 말에 북 용왕은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무표정한 얼굴로 북 용왕을 바라보던 이준이 가볍게 손을 들자, 사람 얼굴만한 분홍색 구슬이 그의 손 위에 떠올랐다. 분홍색 구슬의 정체는 바로 조금 전 북 용왕이 던졌던 핏빛 구슬이었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너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말하는군.”
말을 마친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분홍색 구슬을 날려 보냈다.
“망할!”
구슬 안에 담긴 에너지를 감지한 북 용왕은 욕설을 내뱉으며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용혼주에 담긴 에너지가 얼마나 무서운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 바로 그였다. 저 구슬에 맞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었다.
쉭-!
하지만 북 용왕의 속도로 분홍색 구슬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유성처럼 날아오는 구슬의 표면에는 살기와 원한으로 가득한 용족 강자들의 얼굴들이 떠올라 있었다.
쾅!
분홍색 구슬이 북 용왕의 몸에 닿는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에너지 폭풍이 터져 나왔다.
멀리 떨어진 채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용족의 강자들은 멍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다가 뒤늦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준 선생이 용혼주 속에 있는 핏빛 기운을 정화시켰어!”
동룡도의 장로 중 하나가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이준 선생이 우리 용족을 몇 번이나 살려줬는지 모르겠소! 이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하오.”
촉이 장로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동룡도의 대장로를 향해 말했다.
“이준 선생은 정말 우리의 은인일세.”
촉이 장로의 눈빛에 대장로 역시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용족이 완전히 통일된다면 우리도 천부 연맹에 힘을 보태지.”
그의 말에 촉이 장로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천부 연맹과의 동맹은 2년 전에 보람도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장로들이 이에 반대했다. 하지만 오늘 이준이 용족 전체를 구원해 주었으니, 이제 누구도 동맹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장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보람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용족의 장로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허공을 한바탕 휘저은 거대한 에너지 폭풍이 서서히 사라졌다. 폭풍이 서서히 사라지자, 만신창이가 된 북 용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죽지 않았다고?”
이런 어마어마한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은 북 용왕의 모습에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용족의 육체는 확실히 굉장하군.”
이준이 눈썹을 들썩이며 중얼거렸다.
“후욱후욱…….”
북 용왕은 거친 숨을 들이마시며 검게 변한 두 눈으로 이준을 노려보았다. 수많은 동족들을 모조리 죽여 손에 넣은 힘이 어찌 이리도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
“이준! 감히! 감히 내 일을 망치다니……! 언젠가 반드시 이 원한을 갚아주마!”
목숨은 건졌지만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북 용왕은 이준을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망가게 둬서는 안 돼!”
보람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난번에도 북 용왕을 놓쳤다가 결국 이 사달이 났는데, 이대로 또 놓쳐버린다면 용족은 절대 안정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보람이 일깨워주지 않아도 가만히 있을 이준이 아니었다. 북 용왕이 움직이는 순간, 이준 역시 화염 날개를 펼쳐 빠르게 그의 뒤를 쫓았다.
“본왕을 죽이고 싶나? 꿈 깨거라!”
북 용왕이 손을 휘두르며 소리치자, 또다시 지상에서 십여 명의 용족 강자가 떠올라 이준을 향해 포탄처럼 날아들었다.
이에 이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도를 줄이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사람들을 구할 준비를 했다. 그 순간, 일곱 빛깔이 반짝이는 열 개의 형체가 그의 뒤에서 빠르게 나타나 그를 향해 날아오는 사람들을 대진 밖으로 날려버렸다.
“빨리 저 녀석을 잡아!”
채린의 목소리가 이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고마워.”
채린이 자신을 대신해 용족의 사람들을 구해준 것을 확인한 이준은 다시 화염 날개를 펄럭이며 속도를 높여 단숨에 북 용왕을 따라잡았다.
“이대로 당하지 않는다!”
이준이 자신의 머리 위에 나타나자, 분노한 북 용왕이 눈을 매섭게 부라리며 인결을 맺었다.
인결이 완성되는 순간 북 용왕의 몸이 빠른 속도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자폭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북 용왕의 몸이 팽창하기 무섭게 이준은 즉시 황천의 분노를 시전했다. 그러자 매서운 영혼의 음파가 북 용왕의 영혼에 극심한 고통을 심어주며 빠르게 부풀어 오르던 북 용왕의 몸이 빠르게 작아졌다.
당황한 북 용왕은 황급히 주먹을 내지르며 이준에게 맞서려 했지만 그가 손을 내밀기도 전에 정수리에서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다.
쾅!
이준의 주먹에 얻어맞은 북 용왕이 빳빳하게 굳은 얼굴로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사, 살려다오! 너희들이 이겼다! 나는 더 이상 북룡도의 용왕이 아니다! 앞으로 다시는 너희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괜찮은 생각이군. 하지만……. 죽이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이 어딨겠어.”
이준이 얼음장처럼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분홍색의 화염이 북 용왕의 전신을 뒤덮은 채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준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손을 거두었다. 그의 앞에 있는 북 용왕의 몸은 이미 진흙처럼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고, 꽉 움켜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며 피비린내를 풍기는 구슬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거대한 섬 전체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은 눈만 깜빡이며 처참한 모습이 되어버린 북 용왕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투명해졌던 이준의 몸이 서서히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북 용왕의 시체를 바라보는 이준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북룡도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북 용왕에 의해 죽고 말았어……. 그나마 서룡도와 남룡도가 큰 손실을 입지 않은 게 다행이지. 그래도 이번에 삼대 용왕이 모두 몰락하게 되었으니 이제 누구도 용족의 통일을 방해하지는 못할 거야.”
보람이 피로 물든 고룡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족의 대전은 결국 동룡도의 승리르 끝을 맺었지만, 용족의 지도자로서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보람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그래도 시작이 나쁘지 않아. 어쨌든 전설의 용황이 나타났으니 용족의 미래도 밝지 않겠어?”
이준이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보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보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혼족, 고족과 같은 최강 세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용족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예전의 위용을 되찾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하, 상심하지 마. 넌 전설 속의 용황이잖아. 틀림없이 용족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거야.”
이준이 다시 한 번 보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녀를 격려했다.
거듭되는 위로에 보람도 조금 마음이 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이준의 말대로였다. 지금은 비록 상황이 좋지 않지만, 자신의 몸속에 있는 용황의 피가 완전히 깨어난다면 용족이 예전의 위상을 되찾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이번엔 정말 고마워. 만약 네가 오지 않았다면…….”
보람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뭘 그런 말을…….”
고개를 젓던 이준이 갑자기 자신이 들고 있던 북 용왕의 시체를 보람을 향해 내밀며 물었다.
“이거 나한테 줄 수 있어?”
보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시체로 뭘 하려고?”
“원래 체질 자체가 강한데다 화룡의 마법진에 의해 단련된 이 시체는 무서울 만큼 강해졌을 거야. 이 시체로 요괴를 만든다면 절대 약하지는 않을 거야.”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준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본래 이준이 가지고 있던 요괴들은 지금 성운계의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이준은 재료상의 문제로 투존 이상급의 요괴를 만들 수는 없었고, 이미 투성이 된 이준에게 투존급 요괴는 데리고 다녀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에 이준은 혼족과의 전투에 대비해 투성급의 요괴를 만들어보려 했던 것이다.
“규율에 따르면 용의 무덤에 묻어야 하는데…….”
이준의 요청에 보람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덕분에 용족이 통일됐는걸. 게다가 이놈은 사악한 금술을 사용했으니 용의 무덤에 묻힐 자격도 없어. 필요하다면 가져 가.”
“하하. 감사합니다, 용황 대인.”
보람의 답변에 이준은 장난 섞인 표정으로 웃음을 지은 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당분간 동룡도에서 좀 쉬어. 삼대 용왕이 모두 죽었으니 나도 사대 고룡도를 하나로 합칠 준비를 해야 해.”
이어지는 보람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무공간에는 아직 필요한 물건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 급하지 않으니 우선 이 요괴를 먼저 제련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대화를 마친 보람은 핏빛 기운이 사라진 북룡도에 생존자가 있는지 탐색하기 위해 장로들과 휘하의 용족 강자들을 불러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