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5화. 화룡의 마법진
신기하다는 듯 채린의 손목을 잡아 뱀 무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이준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뱀 무늬에서 생명력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손목에 새겨진 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칠색 이무기였다.
“지옥황천 밑에 칠색이무기족의 둥지가 있는데, 거기서 선조들의 힘을 물려받았어. 그 안에 있던 선조들의 육체는 모두 망가졌지만, 영혼의 힘은 아직 남아있었거든. 그리고 그 선조들의 영혼은 이제 모두 내 몸에 깃들어있지. 그 힘을 빌려서 황천봉을 쓰러뜨린 거야.”
“그런 거였군.”
채린의 말을 듣던 이준은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호수의 수면 아래에 칠색이무기족의 둥지가 남아있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다른 문제는 없지?”
이준이 채린의 팔에 그려진 뱀 무늬를 가볍게 누르며 물었다.
“선조들의 영혼은 이미 많이 훼손된 상태라 완벽하게 보존되어있지 않았어. 그래서 지금은 거의 완벽하게 나에게 흡수된 상태야.”
채린이 조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이준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괜찮아. 기회가 있을 때 선조들의 영혼을 회복시킬 수 있는지 확인해보면 되지. 우선 눈앞에 있는 일들부터 해결하자고.”
말을 마친 이준의 시선이 무너져 내린 산봉우리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채린의 공격으로 쓰러졌던 황천봉이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황천봉을 발견하는 순간 빙긋 웃고 있던 채린의 표정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콜록콜록…….”
황천봉은 입가에 묻은 혈흔을 닦아냈다. 채린 하나로도 버거운 마당에 이준까지……. 이런 상황에서 더 싸움을 벌인다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이준의 여인이 구색 이무기라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이 일에 끼어들지도 않았을 텐데……제길.’
후회가 밀려왔다. 크게 골치 아플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은 몰랐다.
산봉우리에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봉황족의 강자들 역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늘 봉황족의 최강자인 황천봉이 이토록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그들이 무얼 어찌할 수 있겠는가.
“하하. 황천봉 족장. 아직도 잡아 갈 생각인가?”
이준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황천봉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의 말에 황천봉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을 서있다 고개를 저었다.
“이준. 이번엔 내가 졌다.”
황천봉의 선언에 곳곳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수 구역의 최강자 중 하나인 황천봉이 이토록 쉽게 패배를 시인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그 말 하나로 그냥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준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채린의 수련을 방해하고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는데 고작 말 한마디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죽여?”
옆에 있던 채린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이준과 채린의 대화에 황천봉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너희가 무서워서 패배를 인정한 것이 아니다. 제대로 승부를 본다면 너희 모두를 땅에 묻어버릴 수 있단 말이다!”
황천봉의 고함에 이준은 곧장 눈동자를 치켜 올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곁에 있던 채린의 몸에서도 다시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준. 내가 좋은 소식 하나를 알려주지. 이걸 듣는다면 이곳에 남아있고 싶은 생각이 사라질 것이다.”
당황한 황천봉이 이를 꽉 깨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말 해봐.”
“내가 왜 굳이 지금 군대를 총동원해 널 중주에서 불러들였을까?”
황천봉의 말에 이준의 낯빛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왜지?”
황천봉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용족의 새 용황과 네가 아주 가까운 사이라지?”
보람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준의 표정에 점점 더 살기가 짙어졌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은 모양이지?”
“허, 내가 너였다면 지금 바로 고룡도로 달려갔을 게다. 그렇지 않으면 네 친구의 시신을 보게 될 테니까. 설마 다른 용왕들이 그렇게 쉽게 물러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어지는 황천봉의 말에 이준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는 곧바로 손을 올려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진 용의 각인을 확인했다. 용의 각인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가자!”
보람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안 이준은 곧바로 허공을 가르고 공간 통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뒤를 따라 채린과 예린도 시커먼 공간 통로 안으로 잽싸게 몸을 날렸다.
“황천봉. 오늘 일은 반드시 기억해 두겠다. 보람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봉황족에게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내겠어!”
공간 통로로 뛰어들며 외치는 이준의 목소리에 황천봉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공간균열 사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의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요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준과 채린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용족에게 다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상황을 파악한 요명은 이준을 따라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지옥 이무기족의 족장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준과 채린이 이번 문제를 잘 해결하기를 빌어주는 것뿐이었다.
한편, 이준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황천봉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빠르게 몸을 돌려 지옥 지맥을 벗어났다.
지옥이무기들은 달아나는 하늘 봉황족을 가로막지 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수라장이 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고룡도로 향하는 허무 공간 속.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번개처럼 가로지르고 있는 이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삼대 고룡도의 용왕들을 처치한 이후 전세는 완전히 동룡도에게 기울었다. 이대로 가면 별 문제없이 용족들을 통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이 일을 너무 단순하게 보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용의 각인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건 분명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데…….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게다가 보람이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동룡도 방향이 아니야.’
마음이 조급해진 이준은 청홍빛의 날개를 활짝 펼쳐 더욱 빠른 속도로 보람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 * *
엄청난 공간의 힘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허무 공간 전체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핏빛이 시작된 지점은 새까만 공간 위에 둥둥 떠 있는 한 섬이었다. 거대한 섬은 마치 핏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섬과 멀리 떨어진 상공 밖은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하나 같이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고룡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북 용왕 이 나쁜 놈. 용족에서 금술(禁術)로 정해져 수천 년 전에 사라졌던 화룡의 마법진을 대체 어떻게 시전한 것이란 말인가!”
백발의 노인 하나가 분노하며 소리쳤다.
“당시 화룡의 마법진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던 사람이 북 용왕의 증조부인 것 같소. 당시 그가 화룡의 마법진을 완전히 없애버린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은 남몰래 숨겨두었었는지도 모르겠군.”
촉이 장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룡의 마법진은 용족의 한 강자가 만든 비술로, 대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것을 통해 실력을 높이는 포악무도하고 잔인한 술법인 탓에 용족의 장로들이 힘을 합쳐 영원히 없애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 북 용왕이 그 무투기를 꺼내든 것이다.
더욱 무서운 점은 그가 다름 아닌 북룡도에서 진법을 실행했다는 점이었다.
북룡도는 동룡도를 제외한 세 개 고룡도의 강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으로, 이런 곳에서 화룡의 마법진을 사용한다면 엄청난 숫자의 용족 강자들이 북 용왕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었다.
* * *
“하하! 젖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 것이……. 감히 제 발로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마침 제물이 부족했는데 잘 됐구나. 하하! 이제 나는 용족 역사 상 가장 강력한 왕이 될 것이다!”
피비린내가 짙게 풍기는 거대한 섬에서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강한 에너지 파동이 일어났다.
곧이어 격렬하게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이 핏빛 안개를 뚫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보람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지친 표정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전설의 도용검이 들려 있었지만, 예전만큼 강한 위력을 내고 있지 못했다.
보람의 맞은편에는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도 안 되는 거대한 물체가 서있었다.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인 거대한 물체의 피부에서 끊임없이 경련이 일어나며 모공 사이로 새빨간 피가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혈인(血人)의 어깨 위로는 세 개의 얼굴을 가진 머리가 달려 있었는데, 각각 서(西) 용왕, 남(南) 용왕, 북(北) 용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리 하나에 세 개의 얼굴이 붙어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챙챙!
세 얼굴은 모두 입을 벌린 채 쉴 새 없이 핏물을 흘리고 있었고, 새빨갛게 변한 여섯 개의 눈은 마치 야수처럼 난폭했다.
괴물의 손에는 금색 액체로 만들어진 거대한 검이 쥐어져 있었는데, 붉은 색과 금색이 섞여 있는 그 검은 도용검과 부딪히고도 밀려나기는커녕 계속해서 보람의 몸을 밀어내고 있었다.
“북 용왕! 서 용왕과 남 용왕은 네 동맹이다. 그들의 몸과 영혼까지 잡아먹고 괴물이 되어버리다니. 그리도 왕좌가 탐이 났더냐!”
보람이 화가 난 얼굴로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괴물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끌끌. 이미 너에게 중상을 입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놈들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걱정하지 말거라! 너를 죽여 이놈들의 한을 달래줄 터이니!”
북 용왕이 기괴한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휘두르자, 그의 손에 들린 검이 또 한 번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으며 보람의 몸을 저만치 뒤로 날려버렸다. 보람의 손에 도용검이 들려있지 않았더라면 이번 일격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상황이 이토록 나쁜데도 동룡도의 강자들은 보람을 도와줄 수 없었다. 화룡의 마법진으로 인해 땅위에 발을 딛는 순간 그들 역시 북 용왕에게 흡수되어 버리고 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북 용왕. 넌 이제 곧 이성을 잃고 살인만 아는 야수로 변하고 말 것이다!”
“끌끌, 닥쳐라! 용족의 왕 자리는 나의 것이다!”
북 용왕이 또 한 차례 광소를 터뜨리며 주먹을 쥐자, 땅 위에 있던 세 고룡도의 강자들이 몸부림치며 허공 위로 떠올랐다.
괴물로 변해버린 북 용왕은 그들의 몸을 움켜쥔 뒤 돌팔매질을 하듯 보람을 향해 내던졌다.
“용황 대인! 이놈들을 구하러 들어온 것이 아닌가? 자! 구해보거라! 위대한 용황의 힘을 보여주란 말이다!”
보람은 울컥 울컥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용족의 강자들을 받아냈다.
“하하하! 참으로 훌륭하구나! 훌륭해!”
보람이 그들을 마법진 밖으로 내보내려는 순간, 북 용왕이 귀신처럼 나타나 피가 흥건한 손으로 보람의 어깨를 강타했다.
“푸흡!”
보람의 입에서 또 한 번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고, 그녀의 몸이 저만치 멀리 날아갔다.
“죽어라! 용족은 내 것이다!”
북 용왕은 파랗게 질려버린 보람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채려 했다.
“하하!”
하지만 그가 보람의 머리를 붙잡으려는 찰나, 하늘 위에서 분홍색 화염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