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3화. 충돌
긴장된 분위기 속에 1분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나 요명은 여전히 결연한 표정으로 황천봉을 바라볼 뿐,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았다.
마지막 1초까지 모두 지나자, 황천봉이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금빛 동공에서는 짙은 한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준이 본왕의 아들을 잡아갔으니, 나도 놈의 여자를 잡아가야 대화가 통하지 않겠소? 여자를 넘기시오!”
요명의 낯빛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오늘은 좋게 넘어갈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 순간, 지맥 밖에 있던 황천봉이 지옥호수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제 집 안방을 드나들 듯 지옥 이무기족의 성지를 향해 날아가는 황천봉의 모습에 지옥 이무기족 장로들의 얼굴에도 험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 그의 행동은 지옥 이무기족의 얼굴을 흙발로 짓밟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황천봉! 이곳은 지옥이무기족의 지역이오!”
족장인 요명은 곧바로 황천봉의 앞길을 막으며 소리쳤다.
“요명. 이준과 암암리에 손을 잡고 우리 강자들을 습격한 일, 본왕은 아직 잊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또 다시 내 앞길을 막으면 지옥 이무기족은 더 이상 마수계의 삼대 세력으로 군림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황천봉이 금빛 눈동자를 번쩍이며 요명을 노려보았다.
“오래 전부터 황천봉 족장의 실력이 출중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한수 배워보도록 하지.”
말을 마친 요명은 곧바로 황천봉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네 놈이 정말로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분노한 황천봉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금빛 깃털이 번개처럼 요명의 염력을 막아냈다.
쉭!
요명의 매서운 장풍은 깃털과 닿는 순간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곧이어 금빛 깃털이 쇠조차 자를 것 같은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으며 요명의 주먹 위에 기다란 상흔을 남겼다.
곧이어 요명의 상처에서 금빛 에너지가 독처럼 빠르게 번져나가며 근육 전체를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나에게 너를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 쉬운 일이야. 좋게 말을 할 때 들었어야지 요명.”
황천봉이 귀신처럼 요명의 앞에 나타나 주먹을 휘두르며 말했다.
다음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요명의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힘없이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족장님!”
상황이 이쯤 되니 채린을 내어주자던 지옥이무기족의 장로들도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천봉의 지금 행동은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 이놈!”
성미가 급한 장로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황천봉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손을 뻗기도 전에 눈부신 금빛 섬광이 하늘을 가르며 장로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또 누군가? 자비는 여기까지다. 다음번에는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덤비거라.”
말을 마친 황천봉의 몸 주위에서 금빛 섬광이 회오리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때, 지면으로 추락했던 요명이 구덩이에서 기어 나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황천봉을 노려봤다.
“모든 지옥 이무기들은 족장의 명을 받들라!”
날카로운 목소리가 요명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예!”
요명의 말에 모든 지옥이무기 장로들이 분분히 하늘로 날아오르며 순식간에 백명에 가까운 강자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지옥대진!”
우렁찬 외침과 함께 수많은 강자들의 몸에서 빛기둥이 터져 나와 빠르게 연결되기 시작했고, 불과 1분도 되지 않아 천 미터도 넘는 거대한 빛기둥이 하늘 위에 솟아났다.
“지옥대진…….”
지옥대진이 펼쳐지는 순간, 황천봉의 얼굴에서도 여유가 사라졌다. 지옥 이무기족이 마수계의 3대 세력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진법 덕이라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빛기둥 하나까지 진법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대진 전체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빛기둥이 수천 미터에 달하는 이무기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이에 황천봉 역시 지지 않고 즉시 봉황족의 강자들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천황대진을 만들어라!”
황천봉의 명령이 떨어지자, 봉황족의 강자들이 어지럽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옥 이무기 족이 만들어낸 거대한 이무기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봉황 한 마리가 나타났다.
“죽여라!”
다음 순간, 요명의 분노 섞인 고함소리와 함께 거대한 이무기의 꼬리가 공간을 가르며 날아갔다.
하지만 황천봉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지옥 호수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거대한 꼬리가 그의 몸을 치려는 찰나, 뒤에서 맑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금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날개가 이무기의 꼬리를 강하게 쳐냈다.
그 사이 황천봉은 이미 지옥호수의 상공에 도착해 있었다.
요명 역시 몸을 날려 황천봉을 막으려 했지만 봉황족의 강자들이 속속들이 날아와 그의 앞을 막아버린 탓에 지옥 호수 근처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봉황족 강자들이 요명 등 지옥 이무기족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 사이, 황천봉은 냉담한 표정으로 지옥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호수의 수면은 두꺼운 얼음으로 변해있었고, 음산한 얼음기운이 밑에서 끊임없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수련을 하다니……. 이준의 여인도 보통은 아니군. 우선 잡아와야겠어.’
생각을 마친 황천봉이 손을 뻗어 가볍게 주먹을 쥐자, 두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터운 얼음 호수에 곧바로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검은색 얼음이 깨지는 순간 호수물이 다시 위로 차오르며 기이한 압박감이 뿜어져 나왔다.
“나와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황천봉이 힘차게 주먹을 쥐며 외치자, 지옥 호수에서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났다.
요명은 황천봉의 행동을 보며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지만 봉황족의 강자들에게 가로막혀 채린을 도우러 갈 수가 없었다.
‘이준 군, 자네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소…….’
곧이어 황천호수의 물이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한 여인의 형체가 드러났다.
황천봉이 다시 한 번 손을 뻗자, 강한 흡인력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는 채린의 몸을 끌어당겼다.
바로 그때, 하늘 위에서 천 미터도 넘는 거대한 환영이 생겨나며 기이한 힘을 머금은 영혼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펑!
영혼의 파동이 황천봉의 몸에 닿는 순간, 그의 몸이 화살처럼 반대편으로 튕겨져 나가더니 거대한 산봉우리 깊숙이 처박혔다.
“황천봉! 죽고 싶구나!”
살기 가득한 목소리가 하늘을 가르고 울려 퍼지자, 모든 사람들이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거대한 환영이 서서히 사라지고 검은 의복을 입은 청년이 사람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
봉황족의 강자들에게 붙들려있던 요명 역시 환히 웃으며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이준이 나타난 이상, 상대가 황천봉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준은 요명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지옥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황천봉이 만들어낸 거대한 소용돌이가 잠잠해지고, 채린의 몸이 다시 수면 아래로 잠겼다.
이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바위더미 속을 천천히 빠져나오고 있는 황천봉을 바라보았다.
수련 중에 이런 식으로 방해를 받는다면 폐인이 되거나 죽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황천봉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채린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이다. 이준 입장에서는 당연히 상대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행동이었다.
“네가 그 이준인가?”
황천봉이 어두운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왔구나.”
“억지로 날 불러낸 건가?”
이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천봉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채린이 아닌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우리 부족의 장로를 인질로 납치해간 녀석은 네가 처음이다.”
황천봉이 이준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했다.
“네 몸에서 봉황족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니 너에게 고대 봉황의 날개가 있다는 장로의 말이 사실인가 보구나. 이 두 가지만 해도 넌 우리 봉황족에게 죽임을 당해야 한다.”
황천봉의 말이 끝나는 순간, 수백 미터가 넘는 거대한 금색 날개가 그의 등 뒤로 펼쳐졌다.
황천봉의 말을 듣고 있던 이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소족장과 두 장로를 죽이지 않은 것은 이준 입장에서는 크게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준은 자신을 적대하는 세력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준은 동룡도가 안정을 되찾고 나면 그들을 무사히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짓까지 벌여가며 자신을 죽이려 들다니, 이럴 바에는 처음부터 두 사람을 죽여 없애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황천봉 족장……. 당신 실력으로 그게 가능할까?”
“혼전 전주를 쓰러뜨렸다고 본왕 앞에서 날뛸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황천봉이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순식간에 이준 앞에 나타나더니 커다란 금빛 손을 휘둘러 이준을 공격했다.
“황천의 주먹!”
황천봉의 속도는 확실히 놀라웠지만, 이준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그를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그러자 분홍색 화염에 휩싸인 거대한 주먹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황천봉을 향해 날아갔다.
쾅!
두 사람의 거대한 힘이 정면으로 격돌하는 순간, 이준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뒤쪽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황천봉 역시 멀쩡할 수는 없었다. 황천의 주먹에 붙어있던 분홍색 화염이 그의 손에 닿는 순간 엄청난 열기와 함께 온 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역시 정화의 불꽃이야…….’
그러나 황천봉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듯 태연한 표정으로 금빛 염력을 내뿜어 상처부위를 빠르게 치료했다.
한차례의 격돌 이후 이준은 말없이 청홍색의 뼈날개를 펼쳤다.
“본왕 앞에서 속도로 겨뤄보자는 건가?”
이준의 행동에 황천봉은 콧방귀를 뀌고 날개를 펄럭거리며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그를 따라잡았다.
쾅!
이준을 뒤쫓던 황천봉의 금빛 주먹이 이준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고, 이준 역시 지지 않고 분홍색 화염에 휩싸인 주먹을 힘껏 앞으로 뻗었다.
쉭!
이준의 주먹이 정확히 황천봉의 가슴을 가격했다. 하지만 이준이 때린 것은 황천봉이 아니라 그가 남긴 잔영이었다.
‘잔영?!’
당황한 이준은 황급히 몸을 돌려 두 팔로 자신의 얼굴 앞을 막았다.
펑!
아니나 다를까, 금빛 주먹이 번개처럼 공간을 찢고 나타나 그의 팔을 후려쳤고, 무시무시한 힘에 그대로 멀리 날아가 버린 이준이 고개를 채 들기도 전에 또다시 금빛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준. 우리 하늘 봉황족의 봉황축지법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나?”
다음 순간, 이준의 몸 주위에 수십 개의 잔영이 생겨나며 사방에서 금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수십 명의 적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윽, 엄청나게 빠르군. 6성 투성보다도 더 빠른 것 같아.’
쿵!
빠져나갈 틈 없이 금빛 잔영으로 만들어진 원 안에 갇힌 이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빠른 상대는 태어나서 처음 만나보는 것 같았다.
이 주먹 잔영들은 가짜처럼 보이지만 몸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진짜로 변해 이준의 몸을 강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경험이 풍부한 이준은 금세 침착함을 되찾고 천천히 황천봉의 움직임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속도로는 황천봉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뛰어난 영혼 탐지 능력을 활용해 황천봉의 움직임을 미리 읽어낼 수는 있었다.
까만 눈동자에 비친 금빛 잔영의 얼굴에는 음산한 웃음이 묻어있었다.
황천봉은 잔영을 남기고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이준의 급소를 강타했다. 패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영혼 탐지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자, 눈으로는 쫓을 수 없었던 황천봉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것처럼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