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0화. 소애
“어……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저놈들이 허무의 불꽃을…….”
약로 역시 새까만 화염을 단번에 알아보고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들은 구경꾼들은 저도 모르게 공포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의문은……. 어떻게 전주, 혼멸생이 그 전설속의 불꽃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끄으으…….”
분홍색 화염을 집어삼킨 새까만 화염은 흥분한 듯 기이한 소리를 내며 밝게 반짝였다.
“네 정화의 불꽃의 맛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구나. 이렇게 흥분하는 모습을 별로 못 봤는데 말이지…….”
전주가 웃으며 말했다. 이준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얼굴 형상의 검은 화염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잠시 후, 이준은 갑자기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흥, 사기꾼. 네 불꽃은 허무의 불꽃이 아니다.”
이준의 말에 수많은 사람들이 놀란 토끼눈이 되어 그를 바라봤다.
만물을 집어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 허무의 불꽃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뭐?”
전주가 가소롭다는 듯 손에 놓인 검은 화염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그럼 말해보거라. 이 화염이 허무의 불꽃이 아니라면 뭐란 말이냐?”
전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이준 역시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무려 여섯 개의 천지의 불꽃을 가진 이준은 투기대륙 전체에서 화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준의 감에 의하면, 전주의 손에 들린 검은색 화염은 허무의 불꽃과 관련이 있을지언정 절대 허무의 불꽃이 아니었다.
“만물을 집어삼킬 수 있는 힘은 분명 허무의 불꽃이 가진 능력이 맞다. 하지만 위력이 너무 약해. 본체라면 그 정도 위력일 리가 없다. 기껏해야 새끼 불꽃 정도겠지.”
이준이 전주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가 말한 ‘새끼 불꽃’이란 바로 본체에서 분화된 화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체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위력은 크게 떨어졌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새끼 불꽃’을 만들 수 있는 천지의 화염은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정화의 불꽃도 ‘새끼 불꽃’을 만들 수 있었다. 다만 정화의 불꽃은 자신의 본체를 쪼개 새끼 불꽃을 만드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새끼 불꽃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전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역시…….’
전주의 표정을 확인한 이준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만약 전주의 몸에 정말 본체가 있었다면, 지금쯤 주위의 모든 천지 에너지가 그에게 빨려 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새끼 불꽃을 가지고 있다는 건 혼족에게 허무의 불꽃이 있단 소리잖아…….’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준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갔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허무의 불꽃이 혼족의 손에 있다니……. 그들의 적인 이준에게 있어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역시 천지의 불꽃을 여섯 개나 가진 놈이라 보는 눈이 남다르구나.”
전주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허무의 불꽃은 혼족의 가장 큰 보물로, 족장을 제외한 그 누구도 감히 그 불꽃을 혼족의 거주지인 혼계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새끼 불꽃일 뿐이라도 널 처리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
전주가 손을 들어 올리자, 검은 화염으로 만들어진 얼굴이 입을 쩍 벌리며 그의 염력을 모조리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염력을 빨아들인 검은 화염이 밝게 빛날수록 전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잠시 후, 검은 화염이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머리 크기만 했던 몸집이 순식간에 백 미터 가까이 거대해졌다. 검은 화염이 커다랗게 변하자 주변에 있던 강자들 은 자신의 염력이 빠른 속도로 몸을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끄으으으으…….”
거대해진 얼굴은 하늘에 둥둥 뜬 채 새까만 눈으로 이준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또다시 기이한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허무대인. 저 자를 죽이십시오!”
전주가 마치 윗사람을 대하듯 검은 화염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끄아아아!”
그의 말에 검은 화염은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공간을 갈라 이준을 검은 색 화염으로 만들어진 진 한가운데에 가둬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검은 화염이 자발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리라 그 누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나…….”
사람 얼굴을 한 거대한 화염이 다시 이준의 앞에 나타나 기괴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얌전히 잡아 먹히거라!”
쿵!
이준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몸속에 있는 화염이 뽑혀나가는 것을 막아보려 했지만, 손 쓸 새도 없이 분홍색 화염이 그의 몸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의 몸을 빠져나간 분홍색 화염은 손바닥 크기만한 아기로 변신했다.
“소애, 빨리 돌아와!”
이준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무려 여섯 개의 천지의 불꽃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소애가 허무의 불꽃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한다면 이준은 물론이고 투기대륙의 그 누구도 혼족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응애, 응애!”
다음 순간, 소애가 고개를 저으며 울음을 터뜨리더니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검은 화염을 노려보았다.
본래대로라면 천지의 불꽃 중 세 번째 불꽃인 정화의 불꽃은 허무의 불꽃에 겁을 집어먹어야 했다. 하지만 정화의 불꽃에 다섯 개나 되는 화염이 더해진데다가 눈앞에 있는 상대는 본체가 아닌 새끼 불꽃에 불과했다.
“응애!”
다음 순간, 소애의 작은 몸이 폭발하면서 분홍색 화염이 하늘 전체를 뒤덮었다. 그러자 이준을 강하게 옥죄고 있던 감옥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면서 반대로 더욱 커다란 화염 감옥으로 변해 허무의 불꽃을 가뒀다.
소애 덕분에 이준의 몸속에 있던 천지의 불꽃의 힘이 남김없이 발휘된 것이다. 아마 이준이 직접 시전해도 소애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허무의 불꽃은 흠칫 놀라며 더욱 강한 흡인력을 폭발시켰지만, 소애가 직접 조종하고 있는 화염을 집어 삼키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응애!”
곧이어 소애가 거대한 얼굴과 비슷한 크기로 자라나더니 시커먼 불꽃을 덥석 깨물었다.
“끄아아악!”
소애에게 물리는 순간, 허무의 불꽃으로 만들어진 얼굴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검은 화염을 내뿜었다.
“응애!”
하지만 소애는 당황하지 않고 분홍색 화염을 갑옷처럼 만들어 자신의 몸에 두른 뒤 통통한 주먹을 휘둘러 거대한 얼굴을 마구 내리쳤다. 주먹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분홍색 화염이 허무의 불꽃 속으로 침투하면서 검은색 화염이 조금씩 흐려져 갔다.
“감히 날 공격해?!”
몸이 무너지는 것을 느낀 허무의 불꽃의 표정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정화의 불꽃을 포함한 총 여섯 개의 천지의 불꽃이 합쳐진 소애의 힘은 새끼 불꽃이 아닌 허무의 불꽃의 본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응애!”
허무의 불꽃이 달려드는 순간, 소애는 다시 한 번 울음을 터뜨리며 검은 화염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분홍색 화염이 허무의 불꽃을 모조리 감쌌다.
“너……너 감히 날 흡수하려 드는 것이냐!”
소애의 행동에 허무의 불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제길, 연결이 끊겼어…….’
가까운 곳에 있던 전주의 낯빛이 빠르게 바뀌었다. 새끼불꽃과 자신을 연결하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겨버렸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당황한 전주는 이를 악물고 분홍빛 화염장막으로 달려들었다. 고작 새끼 불꽃일 뿐이지만, 허무의 불꽃까지 꺼내든 이상 패배는 곧 죽음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이준의 불꽃이 허무의 불꽃의 능력을 흡수하게 된다면 그는 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주, 불꽃은 불꽃끼리 놀라고 하고, 우리는 우리끼리 해결할 일이 있지 않나?”
하지만 그가 화염장막 속으로 뛰어들기도 전에 누군가가 길을 가로막았다. 바로 그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이준이었다.
분노한 전주는 허무의 불꽃에게 염력을 빼앗겨 지친 몸을 이끌고 이준을 향해 늑대처럼 매서운 공세를 쏟아 부었다.
이에 이준 역시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어 전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주가 허무의 불꽃에게 염력을 내주며 많이 지쳐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 사이 소애는 분홍색 화염을 더욱 힘차게 뿜어내며 허무의 불꽃을 압박해 나갔다. 그러자 힘겹게 압력을 견디고 있던 허무의 불꽃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사람의 얼굴로 변했던 검은 화염이 완전히 폭발하더니 기다란 뱀처럼 화염장막 사이로 빠져 나갔다.
“안 돼!”
혼천맥과 혼모의 낯빛이 빠르게 변하더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소애를 향해 동시에 돌진했다.
“허, 네놈들이 제안한 대결의 규칙을 깨겠다는 것이냐?”
두 사람이 몸을 날리기 무섭게 이신과 연금탑의 선조가 재빠르게 날아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고, 남아있던 천부연맹의 투성 강자들 역시 합세해 혼전의 투성 강자들을 막아섰다. 그렇게 운락산의 정상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혼천맥, 혼전에서 정말 전쟁을 일으킨다면 우리 천부연맹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약로가 소리쳤다.
혼천맥은 두 눈을 얇게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양측 모두 실력이 엇비슷한 상황이니 이대로 맞붙는다면 어느 쪽이 이긴다고 해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오?”
혼모가 조용한 목소리로 혼천맥을 바라보며 물었다.
혼천맥은 앞에 있는 소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얼굴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맑은 두 눈동자…….
조금 전의 전투로 그는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연금탑 선조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목숨을 건다 해도 그를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이기기는커녕 비기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모두 자리로 돌아간다.”
깊은 숨을 들이마신 혼천맥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의 말에 양측 강자들은 모두 서서히 간격을 두고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일촉즉발의 상황이 서서히 마무리 되는가 싶었다.
쾅!
그때, 소애가 변신한 거대한 아기는 화염장막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자 화염 덩어리가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화염 폭풍이 되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검은 화염들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천지의 불꽃들은 마치 야수들처럼 약육강식의 싸움을 벌였고, 약한 불꽃이 강한 불꽃에게 잡아먹히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준이 구름 불꽃을 획득했을 때 구름 불꽃이 이준의 몸속에 있던 대지의 불꽃을 탐냈던 것처럼 말이다.
본래 허무의 불꽃은 정화의 불꽃보다 강하지만, 다섯 개의 불꽃이 융합된 소애가 고작 새끼불꽃 따위에게 잡아먹힐 리는 없었다.
구룩-.
소애의 입 속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만족스러운 듯 작은 손으로 배를 두드렸다. 검은 불꽃을 집어삼킨 소애는 흡족한 표정으로 이준과 전주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번개처럼 몸을 날려 두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소애가 작은 손을 뻗자, 그의 몸 주위에서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화염연꽃이 피어났다.
소애의 몸 주위에서 피어난 화련을 발견한 순간, 전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하지만 그가 무언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소애의 통통한 손가락이 그를 가리켰다.
“응애!”
쉭!
다음 순간, 열 개의 화련이 일직선으로 하늘을 가르고 전주에게 날아갔다.
펑펑펑!
화련이 연달아 폭발하며 무시무시한 불파도가 온 하늘을 뒤덮었다.
“아악!”
소애의 화련은 각각 두 개의 이화가 뭉쳐져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마치 연쇄반응을 일으키듯 점점 더 엄청난 기세로 폭발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