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9화. 허무의 불꽃
“무승부라니……. 혼모 장로, 너무 방심했던 것 아니오?”
전주는 혼모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그냥 천부연맹과 전쟁을 하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소?! 무슨 결판을 짓겠다고…….”
혼모 노인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 거렸다.
“혼전의 존재는 혼족에게 아주 중요하오. 지금은 정면으로 부딪힐 때가 아니란 말이오. 정 그렇게 전쟁을 일으키고 싶다면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시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멸생. 준비하시게. 마지막 판은 자네와 이준의 전투일세.”
혼천맥이 멀리 있는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와 이준의 전투에 이번 결전의 승패가 결정된다네.”
“저 녀석은 이제 정화의 불꽃까지 가졌소. 방심했다간 패배할지도 모르오.”
혼모가 잔뜩 미간을 구긴 채 중얼거렸다.
“정화의 불꽃이라…….”
혼천맥과 눈을 마주친 전주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정화의 불꽃을 얻었다고? 그래.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볼까?”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전주에게로 향했다.
혼전의 전주. 오랜 시간 수련에 들어가 모습을 감춘 탓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었지만, 그의 악명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혀 지지 않았다.
“세 판 중 두 판이 무승부라니, 생각도 못한 결과군. 하지만 결국 이번 대결의 승자는 우리 혼전이 될 것이다.”
전주가 오만한 표정으로 이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다 내게 패배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려고 그러지?”
이준의 한마디에 구경꾼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집어삼켰다. 이 넓은 중주에서 혼전의 전주에게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네놈 때문에 혼족 내에서 나에 대한 불만이 많다. 왜 진즉에 나서서 네 놈을 죽이지 않아 일을 키웠느냐고 말이지.”
전주가 복잡한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히 ‘적’이라는 입장을 떠나 얘기한다면 이준은 백년에 한 번, 아니 천년에 한 번 나올만한 인재였다. 나이도 나이지만, 중주의 맹주로 손꼽히는 혼전과 맞서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성장한 그의 저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가 여기까지 성장한 것은 내 책임이니, 이번에 내가 직접 마무리를 지어야겠구나.”
이준을 바라보는 전주의 표정은 싸늘하지 짝이 없었다.
“나도 오늘 여기서 이씨 가문의 복수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이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섬뜩할 정도의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잡혀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혼전에 잡혀갔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혼전의 눈을 피해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자신 역시 중주에 온 이후 매번 혼전의 강자들에게 쫓기며 몇 번이나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그 모든 고통을 안겨주었던 장본인에게 복수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전주가 미소를 짓자, 새까만 염력이 서서히 그의 살갗을 뚫고 새어나왔다.
“자, 정화의 불꽃을 얻은 네가 얼마나 대단해졌는지 보…….”
쾅!
전주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낮은 폭발음이 귀를 찌르며 전신에서 분홍색 화염을 뿜어내고 있는 그림자 하나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전주는 적잖이 놀랐지만, 반사적으로 염력을 뿜어내 검은색 방패를 만들었다.
치익!
하지만 이준의 두 손가락에 피어난 분홍색 화염이 그대로 방패를 녹여버린 뒤 전주의 두 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
그러나 전주는 피할 생각조차 없는 듯 기합소리를 외치며 곧바로 이준의 심장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칫.”
눈과 심장,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에 이준은 곧바로 분홍색 화염으로 뒤덮인 손을 거두어들여 전주의 공격을 막아냈다.
분홍색 화염에 닿는 순간, 검은 염력이 소리 없이 녹아내렸다.
이준의 새로운 불꽃의 위력에 당황한 전주는 황급히 손을 거두어들이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의 손등에는 이미 커다란 화상자국이 생겨나 있었다. 상처 주위에 있던 혈관마저 불타 없어진 탓에 핏자국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빌어먹을……. 과연 정화의 불꽃이구나.’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전주의 표정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귀신처럼 빠른 속도로 하늘을 오가며 육탄전을 벌였다.
이준이 전주를 바라보며 인결을 맺자,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영혼 환영이 그의 뒤에 우뚝 솟아났다.
“황천의 분노!”
우우웅!
거대한 환영의 입이 벌어짐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음파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전주에게 달려들었다.
“흥, 나에게 그딴 공격이 통하리라 생각하느냐!”
전주가 빠르게 뒤쪽으로 몸을 날리며 인을 맺자, 무수한 영혼의 환영이 솟아나 이준의 환영을 포위한 채 입을 벌려 음파를 뿜어냈다.
구우우우웅!
두 사람의 영혼 음파가 충돌을 일으키는 순간, ‘우웅’하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수많은 강자들의 입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곧이어 전주 주위에 있던 수많은 영혼 환영들이 하나씩 폭발하기 시작했지만 그 덕에 전주 본인은 큰 부상을 입지 않은 듯 보였다.
자신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내는 전주의 모습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영혼의 힘을 이용한 1격 무투기를 이렇게 쉽게 맞받아치는 상대를 만나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의 영혼의 힘은 하늘단계 최상급 수준에 이른 자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전주의 실력은 2년 사이에 5성 중급 투성까지 성장해 있었다.
“네 영혼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나의 상대가 될 수는 없다.”
전주가 마지막 남은 음파를 가볍게 손으로 쳐내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은 아무런 말도 없이 다시 한 번 분홍색 화염을 피워낼 뿐이었다.
이준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분홍색 화염을 바라보던 전주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잔잔하게 타오르는 그 화염 속에서 5성 중급 투성이 된 자신의 힘으로도 막아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네 놈이 그 알량한 불꽃을 믿고 설치는 모양인데, 오늘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단단히 알게 해주마.”
말을 마친 전주의 눈동자에서 기이한 검은색 화염이 피어올랐다.
그 순간, 이준은 몸속에 있는 소애에게서 기이한 파동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저 녀석 몸속에 뭔가 들어있는 것 같아…….’
분홍색 화염이 뿜어내는 열기에 운락산 전체가 가마솥처럼 끓어오르고, 산 위로 솟아난 나무들이 타오르며 새하얀 연기가 피어났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불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순간 자신의 염력이 빠르게 들끓는 것을 느꼈다.
정화의 불꽃에 호기심이 생겨 찾아왔던 강자들은 막상 불 없이도 천지를 태우는 정화의 불꽃의 위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더니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쳐댔다.
‘이준이 드디어 정화의 불꽃을 꺼내들었군…….’
이 광경을 바라보던 혼모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전주의 실력으로도 저 불꽃에 제대로 맞는다면 목숨을 건질 수 없을 것 같아보였다.
“저 놈이 운이 좋아도 보통 좋은 것이 아니구나. 저 실력으로 나도 건드리지 못한 천지의 불꽃을 손에 넣다니…….”
혼천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편, 혼전 전주는 활활 타오르는 분홍색 화염을 굳은 얼굴로 주시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분홍색 화염이 서서히 원판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화염판 주변에는 기이한 문양이 떠올랐다. 바로 이준이 지금까지 연소시켰던 여섯 개의 불꽃이었다. 그리고 그 문양의 중심에는 잔잔히 타오르는 분홍색 화염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웅!
잠시 후, 분홍색 화염판이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화염판 중심에 있던 분홍색 화염 결정체가 쉭, 하는 소리를 내며 팔뚝만한 빛으로 변했다.
팔뚝만 했던 분홍색 빛은 화염판을 떠나는 순간 수십 미터로 커졌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산봉우리를 가로질러 전주를 향해 날아갔다.
분홍색 빛이 지나는 곳마다 땅이 녹아내리며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가라!”
쉭쉭!
분홍색 화염이 다가오자, 전주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새까만 염력이 빠른 속도로 녹아내렸다. 그는 계속해서 염력을 뿜어냈지만, 염력이 생성되는 속도가 녹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윤회의 굴레!”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전주를 노려보던 이준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결을 바꾸자, 화염판이 갑자기 역방향으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웅웅!
그때, 수십 미터가 넘던 화염 빛이 급속도로 빠르게 작아지며 그 안에 담긴 거대한 파멸의 힘이 엄청난 속도로 응집되는 것이 느껴졌다.
‘안 되겠어……!’
팔뚝만한 빛이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작아지는 순간, 혼모의 심장이 저만치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죽어라!”
쉭!
이준의 외침과 함께 화염판이 강하게 떨리며 폭발을 일으키면서 전주와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쾅!
굵직한 폭발음이 하늘에 울려 퍼지면서 확산된 무시무시한 화염 물결에 투성 강자들마저 모두 혼비백산하여 자리를 피했다.
“명중했어……!”
약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 정도 위력의 공격이라면 제 아무리 전주라 해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6성 투성의 실력을 가진 연금탑 선조마저 분홍색 화염이 폭발한 지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승패가 결정 난건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수군대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큭큭…….”
그러나 혼천맥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명, 전주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준이었다. 정화의 불꽃과 자신의 무투기의 위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왠지 전주가 이대로 죽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풉!”
그때, 화염 속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죽지 않았어…….’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분홍색 화염의 중심부에서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강한 흡인력이 뿜어져 나와 주변에 있던 분홍색 화염을 그대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정화의 불꽃을 전부 다 흡수해버렸다고? 죽으려고 작정한 건가?”
상상하지도 못한 그의 행동에 구경꾼들의 입에서 또다시 수군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무렇지 않다고?”
이준 역시 흔들리는 눈빛으로 화염 속에서 걸어 나오는 전주를 바라봤다.
“정화의 불꽃은 역시 맛이 좋군. 하지만 본체가 나에게 없다는 게 아쉽구나. 정화의 불꽃 본체는 어떤지 한 번 맛 좀 볼까?”
전주가 입맛을 다시며 기괴하게 웃었다. 눈썹을 찌푸린 채 이준을 바라보는 전주의 눈동자에선 조금 전 이준에게 불길한 느낌을 심어주었던 검은 화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준은 그제야 그 검은 화염이 주위의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상상도 못 했나?”
전주가 오만한 기색이 가득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 정화의 불꽃이 있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더 강한 불꽃이 있지.”
말을 마친 그의 손 위에서 검은색 화염이 피어오르더니 이내 사람의 얼굴로 변해 입을 쩍 벌렸다.
사람 얼굴을 한 검은색 화염을 보는 순간 이준의 동공이 바늘구멍처럼 작아졌다.
“허무의 불꽃……!”
사람의 형상을 한 검은 화염을 보는 순간, 이준의 마음속에 커다란 파도가 일었다.
‘허무의 불꽃’은 정화의 불꽃보다도 순위가 높은 천지의 불꽃으로, 모든 천지의 불꽃 중 두 번째로 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심지어 정화의 불꽃마저 허무의 불꽃에 비하면 신비롭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무공간에서 탄생한 이 이화는 형태가 없어 찾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만물을 집어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여태 단 한 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 전설상으로만 존재하는 불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