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8화. 혼충
“혼천맥. 정말 자신이 있다면 이 안으로 들어오거라.”
연금탑의 선조가 자신이 만든 공간 속으로 사라지며 말했다.
두 사람의 실력이라면 이공간을 만들어 전투를 벌일 수 있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안정적이지 않아 전투가 끝나면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허, 내가 겁먹을 줄 알고!”
혼천맥은 콧방귀를 뀌며 번개처럼 공간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우웅!
이공간으로 들어간 연금탑 선조와 혼천맥은 곧바로 격렬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고, 이내 이공간 안에서 고막을 찢어놓을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전투가 시작되자 이신이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걸어 나와 전주와 혼모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누가 나올 것인가?”
“이신, 네 시대는 끝났다. 지금부터 그걸 깨닫게 해주지.”
혼모가 허공을 딛고 천천히 하늘로 솟아오르며 말했다.
곧이어 그의 몸에서 새까만 안개가 터져 나와 온 산을 비추던 햇볕을 가려버렸다.
“5성 투성 상급라니……혼족에서 작정을 했군.”
이를 지켜보던 여러 세력의 장로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족의 투성 강자라니……. 아직도 이족의 투성이 남아있었단 말인가?”
“이족과 혼족의 결투를 보게 될 수 있을 줄이야.”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족에게 죄를 저지른 자는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 순간, 이신의 손에 십 미터가 넘는 거대한 도끼가 솟아났다.
“끌끌, 내 손으로 이족의 마지막 강자를 무덤으로 보내주는 것도 또 다른 재미겠구나.”
혼모가 독사 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거대한 핏빛 도끼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족의 전성기에는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을 애송이가!”
분노한 이신이 순식간에 혼모 노인 머리 위에서 나타나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외쳤다.
“그러니까 그 전성기를 끝내준 것이 우리 혼족이 아니더냐!”
이에 질세라 혼모 역시 수십 개의 새하얀 뼈사슬을 거미줄처럼 빼곡하게 뿜어내 그의 도끼를 가로막았다.
찌익!
핏빛 도끼가 그물에 닿는 순간, 마치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속도가 느려지더니 결국 혼모 노인 앞에서 완전히 멈춰서고 말았다.
“이신, 넌 이것 밖에 안 된다!”
“그래?”
그의 말에 이신의 눈이 붉게 물들며 핏빛 도끼 위에 새빨간 선이 생겨나더니 뼈로 된 그물을 가볍게 베어버렸다. 그물을 뚫은 도끼는 곧바로 혼모의 목으로 향했다.
예상 외의 강한 힘에 놀란 혼모는 황급히 몸을 돌려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드는 도끼날을 피했다.
“이, 이놈이…….”
수천 년간 정화의 불꽃의 환상에 빠져 수련조차 하지 못했던 이신에게 힘싸움에서 밀렸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었다.
분노한 혼모가 빠르게 인결을 바꾸자, 하늘을 뒤덮은 검은 안개에서 거대한 검붉은 빛줄기 하나가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빛줄기가 아니라 온 몸에서 검은 안개를 내뿜는 붉은 색의 거대한 ‘벌레’였다.
“죽어라!”
이에 이신 역시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미친 듯이 휘둘러 붉은 색의 염력을 쏟아냈다.
“아아악!”
이신의 붉은 염력과 검은 빛줄기가 맞부딪힐 때마다 하늘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퍽!
붉은 염력이 또 한 번 검붉은 벌레의 단단한 껍질을 때리자, 강철처럼 단단한 껍데기에 금이 생겨나며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안개가 새어나와 산산이 흩어졌다.
“혼충! 혼모, 이 악독한 놈!”
검붉은 벌레의 몸에서 새어나온 안개를 확인한 순간, 약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혼충’이란 수많은 영혼을 한데 모아 녹인 뒤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만든 거대한 독충이었다. 즉,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한 번 더 죽여 벌레로 만들어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혼충 하나에는 족히 수십 명의 영혼이 녹아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지능을 가지고 있었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원념과 고통에 시달리는 탓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혼충까지 동원해 이신을 공격하는 혼모의 모습에 자리에 모여있던 구경꾼들마저 혐오감을 감추지 못했다.
“가라!”
혼모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거대한 혼충이 다시 한 번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이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신이 도끼를 휘둘러 혼충을 막아내는 사이, 혼모가 직접 몸을 날려 이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이준의 얼굴에도 걱정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신은 자신의 몸만 한 거대한 도끼를 나뭇가지 휘두르듯 가볍게 휘두르며 혼모와 혼충의 협공을 막아냈고, 이에 이준 역시 조금 마음을 놓고 연금탑 선조와 혼천맥이 대결을 벌이고 있는 공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공간 안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탓에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격렬한 에너지 파동을 통해 얼마나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전주는 아직 나서지 않는 걸 보니 혼천맥과 혼모의 싸움이 끝나고 나서 이준과 결투를 벌일 심산인 것 같았다. 만일 두 대결에서 모두 혼족의 강자들이 승리한다면 그는 굳이 싸움을 할 필요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쾅!
이신과 혼모 노인의 전투가 더욱 격렬해지던 그때, 하늘 위에서 무시무시한 폭음이 터져 나오더니 혼천맥과 연금탑 선조가 이공간 밖으로 강하게 튕겨 나왔다.
“나왔다!”
구경꾼들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외쳤다.
“허, 역시 대단한 노인네야.”
멀리 날아갔던 혼천맥이 자리에 멈춰서며 말했다. 그의 몸에는 아직 아무런 부상도 없었지만, 이준과 비슷한 실력의 강자들은 그의 염력이 거의 바닥났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천맥 장로님, 결과는 어떻습니까?”
“선배님, 결과는 어떻습니까?”
전주와 이준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혼천맥과 연금탑의 선조가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질문에 답했다.
“무승부로 하지.”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승패가 나기야 하겠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싸움에 목숨을 걸 마음은 없었기에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무승부로 결정이 난 것이다.
혼천맥의 답변에 전주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상대가 혼천맥이니 차마 비난의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불만 갖지 말거라. 내가 나서 무승부라도 가져온 것이 어디냐. 아니면 네가 나서서 저 자와 목숨을 걸고 승부를 내 볼 테냐?”
전주의 표정을 본 혼천맥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주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혼천맥은 곧바로 이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렇게 대단해질 줄이야……. 족장님이 관심이 많으시겠어. 이건 혼모가 이겨줘야 가능성이 있겠군.”
말을 마친 혼천맥은 곧바로 혼모와 이신이 대결을 펼치고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가 이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겠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주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5성 상급 투성인 혼모가 어째서 중급에 불과한 이신을 이기지 못한단 말인가?
“정말로 단순한 5성 중급 투성이 이현 다음가는 실력자로 중주에서 이름을 날렸겠느냐?”
혼천맥이 말했다.
이신이 중주에서 이름을 날리던 당시 혼천맥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가 오랜 시간 환상에 빠져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감히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혼전 전주는 눈썹을 깊게 찡그리며 점점 더 격렬해지는 전투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이신은 여전히 혼모 노인과 혼충의 공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 넘어가야 할 텐데…….”
바로 그때, 혼충이 전력을 다해 이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챙!
거대한 도끼와 혼충의 단단한 껍질이 맞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듭되는 혼충의 거센 돌격에 이신은 점점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신, 계속 해볼 생각인가! 패배를 인정하지 그래!”
이신의 얼굴에 지친 듯 숨을 헐떡이자, 혼모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외쳤다.
하지만 이신은 패배를 시인하기는커녕 더욱 눈을 빛내며 두 손에 들린 도끼를 꽉 쥔채 천천히 하늘 위로 들어올렸다.
“한 방에 처리해주지.”
“허, 웃기는군!”
그의 말에 혼모 노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바짝 긴장한 채 온 몸의 염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신이 붉은 도끼를 높이 치켜들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지 않았다면 그가 이 자리에서 사라졌다고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꽈르릉!
곧이어 맑은 하늘에 돌연 먹구름이 드리우더니 새하얀 번개가 내리치며 온 천지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번개가 떨어지는 순간, 이신의 기운이 순식간에 5성 상급 투성 수준까지 미친 듯이 솟구쳤다.
“이럴 수가……!”
화산이 폭발하듯 엄청난 기세로 폭발하는 이신의 기세에 혼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이신은 혼모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대로 거대한 도끼를 내리쳤고, 엄지손가락만 한 굵기의 붉은 선이 하늘과 땅을 반으로 가르며 혼모를 향해 날아들었다.
쉭!
두 눈동자를 가득 채우는 핏빛 선에 담긴 섬뜩한 에너지에 혼모의 손발이 빠르게 차가워졌다.
당황한 혼모는 황급히 염력을 끌어올리며 혼충의 머리를 눌렀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혼모의 손에서 새빨간 빛이 번쩍였다. 그러자 혼충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순식간에 녹아내리더니 끈적한 액체가 되어 혼모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꾸르륵-!
다음 순간, 액체가 된 혼충을 집어삼킨 혼모의 얼굴에서 검은 핏줄이 돋아나며 그의 염력이 미친 듯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천지 에너지가 혼모 노인의 입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더니 원형의 핏빛 덩어리가 생겨났다.
쿵!
다음 순간 점성을 띤 핏빛 덩어리가 이신의 공격과 그대로 부딪혔다.
쾅!!
온 세상이 피로 물든 것처럼 새빨갛게 변하고, 새빨간 빛이 사람들을 뒤덮자, 사람들의 눈이 새빨갛게 변하며 난폭한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력이 강한 사람들은 그 난폭한 감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준은 백 미터가 넘는 핏빛 덩어리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응시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핏빛 덩어리 안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에너지가 폭발하는 순간, 적어도 운락산의 반은 그대로 평원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잠시 후, 핏빛 덩어리 속에서 두 사람이 강하게 튕겨져 나와 산봉우리에 부딪혔다.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수군대고 있을 때, 무너져 내린 산 봉우리 안에서 두 형체가 비틀거리며 위로 올라왔다.
이신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혼모 노인을 노려보았다.
혼충을 집어삼키며 실력이 폭등해 미쳐 날뛰는 혼모를 상대하는 것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 이었다.
하지만 혼모는 이제 최소한 십 년은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어쩌면 혼충에게 염력을 갉아 먹힌 것 때문에 다시는 예전 실력을 되찾지 못할지도 몰랐다.
이신은 약해진 몸을 서서히 움직여 이준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신과 혼모 노인, 둘 모두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이준이 급히 진한 약향이 피어오르는 연금비약을 건네며 물었다.
“괜찮다. 하지만 이번에도 무승부인 것 같구나. 마지막 승부는 너에게 달렸다…….”
이신이 연금비약을 집어삼킨 뒤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 판 중 두 판이 무승부라니, 이제 이 싸움의 승패는 오롯이 이준에게 달려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게 맡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