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7화. 혼천맥
혼전과 천부연맹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운락산(隕落山)은 두 세력 간에 끊임없이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운락(隕落)’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여러 투성 강자가 이곳에서 죽게 되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잡듯이 주위를 뒤졌지만, 투성의 흔적은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얼마 지나지 않아 운락산을 찾던 사람들의 발길은 뚝 끊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혼전과 천부 연맹의 결전지가 운락산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에 운락산 주위는 투성 강자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들었던 때보다 더욱 많은 인파로 붐볐다.
* * *
혼전이 천부 연맹에 편지를 보낸 지 4일 째 되는 날 아침. 찬란한 햇빛이 구름을 뚫고 대지를 환하게 비추고, 수많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운락산의 정상으로 모여들었다.
두 세력의 결전은 운락산의 정상에 위치한 거대한 분지에서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었다. 분지는 마치 거대한 거울로 만들어진 것처럼 반들거렸고, 햇살이 내리쬘 때마다 눈부신 빛을 발했다.
잠시 후, 분지 위의 허공이 일그러지면서 거대한 공간통로 하나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쉭쉭!
곧이어 공간통로에서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차가운 검은색 안개가 솟아나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산 곳곳에 울려 퍼졌다.
“혼전이 왔어…….”
검은 안개 속에서 7명의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가장 선두에 서있는 두 사람은 바로 혼전의 전주와 현모 노인이었고, 그 뒤에는 혼전의 부전주가 서있었다.
일곱 명의 혼전 강자가 등장하자, 떠들썩하던 하늘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혼전의 실력이 이 정도였다니……. 실로 공포스럽기 짝이 없구나.”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각 종파의 장로들이 굳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쯧쯧, 이제 모습을 드러내지 그러나.”
전주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하늘을 빼곡하게 메운 인파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한 번 하늘이 일그러지며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부연맹에서 투성만 열 명이 왔어……!”
천부 연맹 측의 강자들을 훑어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번 싸움에 천부연맹의 손에 있는 모든 강자들이 출두한 것 같았다. 거기에 화운과 청화 등 중주에서 오랫동안 이름을 알려온 강자들과 약로의 초대를 받아 연맹으로 들어온 투성 강자까지 총 10명이었다.
천부연맹의 규모에 놀란 듯 하늘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역시 살아있었구나.”
이준을 발견한 전주가 크게 놀라지 않은 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덕분에 잘 살아나왔습니다. 좋은 선물까지 받아서 말이죠.”
전주에게 시선을 고정한 이준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의 그는 5성 투성인 혼전의 전주에게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정화의 불꽃이 네 손에 있구나.”
그의 말에 이준은 대답 없이 피식 웃음을 지었고, 전주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몰락한 이족에서 너같은 인물이 나오다니, 이현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겠구나. 하지만 첫 번째 이현도 죽였는데, 두 번째 이현이라고 못 죽일까.”
전주가 싸늘한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무시무시한 힘에 정상 부근에 모여 있던 강자들은 모두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이준은 주춤하기는커녕 당당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좋아. 네가 날 죽일 수 있을지 아닐지 한 번 해보자고.”
이준의 한 마디에 운락산의 정상에는 마치 폭풍전야처럼 묵직한 적막이 흘렀다.
“그간의 원한을 갚을 때가 왔군.”
자신의 힘으로 혼전에게 당당히 맞설 이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건만, 이준의 마음속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평온했다.
“허허, 당돌한 녀석.”
전주의 곁에 있던 혼모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결판을 내자더니, 어떻게 결판을 낼 건지나 말해보지 그래.”
“세 명이 나와 3선 2승제로 승부를 보는게 어떤가?”
혼전 전주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혼전과 천부연맹 모두가 나와 전쟁을 벌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줄곧 중주의 맹주였던 혼전을 연맹 하나 결성했다고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냐?”
“혼족의 지원이 있으니 확실히 기가 살았군.”
이어지는 전주의 말에 이준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전쟁을 벌여 우리 천부연맹을 전멸시킨다 해도, 네놈들 역시 십중팔구 큰 타격을 피할 수 없겠지. 그게 두려워서 이런 대결을 제안한 게 아니고?”
이준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전주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전주의 표정을 확인한 이준은 그를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계속해서 피식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뭐, 제안은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네 놈들을 쓰러뜨리고 나면 혼족 놈들과도 싸움을 벌어야 할 텐데, 괜한 희생자를 만들 필요는 없겠지.”
사실 혼전이 전면전의 타격으로 중주에 대한 지배권을 놓칠까 두려워 하는만큼 이준 역시 전면전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물론 중주의 지배권 따위는 이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저 혼전을 쓰러뜨린 뒤에 더욱 거대한 적인 혼족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최대한 전력을 보존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끌끌, 말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네 놈도 전쟁의 후유증이 걱정이 되나보구나.”
“출전자나 내보내시지?”
전주의 말에 이준은 또다시 코웃음을 치며 그를 도발했다.
“건방진 놈……. 지금까지 우리 혼족을 이렇게까지 도발하는 자는 없었다.”
그때, 혼모가 더 이상 듣고 있지 못하겠다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거대한 산봉우리가 조금씩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시커먼 안개가 그의 몸에서 튀어나와 거대한 바위를 마구 부수며 이준에게 달려들었다.
쾅!
바로 그때, 이준의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검은 안개를 그대로 짓밟았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네놈들은 여전하구나.”
이신이 무표정한 얼굴로 혼모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신……!”
혼모가 독사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신을 노려보며 한 글자씩 감정을 꾹꾹 눌러담아 말했다.
이신의 얼굴은 보는 순간 혼모와 전주의 표정이 약속이나 한 듯 딱딱하게 굳어갔다. 특히 정화세계에서 이신과 맞붙었던 전주는 이신의 등장에 더욱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허허. 오랜만이군, 이신. 여전히 사납구만.”
그때, 전주와 혼모 옆에서 지팡이를 짚은 노인 한 명이 인기척도 없이 귀신처럼 나타났다.
이준은 굳은 얼굴로 그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나타날 때,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있던 것처럼 아무런 공간파동도 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약로의 표정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혼천맥!”
이신이 지팡이 짚은 노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회색 옷 사이로 드러난 앙상한 몸에 메마른 얼굴을 한 노인의 눈빛은 시체처럼 흐리멍덩했고, 온몸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섬뜩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혼천맥……. 아직도 안 죽었나? 저 자가 나타난 것을 보니 혼족에서 천부연맹을 없애기로 작정을 했구나.”
산봉우리 주위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흥, 이현 족장에게 목숨을 구걸하던 쓰레기가 아직도 살아있었군.”
이신의 한마디에 혼천맥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대단하던 이현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우리 혼족이 승리했다. 허나, 이족은 어떠한가? 이제 8대 세력은커녕 대륙 끄트머리의 작은 나라에서 근근이 붙어먹으며 연명하고 있지 않더냐?”
쉬익-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이신의 거대한 핏빛 도끼가 매서운 강풍을 일으키며 혼천맥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신, 네 놈이 사라져 있는 동안 나는 놀고먹으며 한가하게 보낸 줄 아느냐!”
혼천맥이 뼈만 남은 손을 움켜쥐며 외쳤다.
쾅!
두 사람의 힘이 맞부딪히는 순간, 광풍이 사방을 휩쓸며 온 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혼천맥의 주먹에 강한 충격을 받은 이신은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나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수천 년간 정화의 불꽃이 만든 환상 속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혼천맥의 수련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이신. 지금의 너는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가볍게 이신을 밀쳐낸 혼천맥이 이준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몸에서 이현의 냄새가 느껴지는구나. 역시 천상무덤에서 이현에게 힘을 물려받은 모양이군.”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준은 상대가 6성 투성의 경지에 올라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번에는 혼족 놈들도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군.’
이준이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 전주가 이준을 노려보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바로 혼족의 세 번째 대표인 모양이었다.
그 순간, 이준의 눈에서 한기가 솟구쳤다. 전주는 자신이 상대할 수 있었고, 혼모는 이신에게 맡기면 된다지만, 6성 투성인 혼천맥을 누가 상대한단 말인가.
“저 노인네는 나에게 맡겨라.”
그때, 이준의 곁에서 소리 없이 작은 형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의 모습을 한 그는 바로 정화세계에서 등장했던 연금탑의 선조였다.
“선배님!”
이준의 옆에 나타난 소년을 발견한 연금탑 대장로는 곧바로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이준 역시 몸을 돌려 공경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네.”
소년의 모습을 한 연금탑의 선조가 맑은 눈망울로 이준의 몸을 훑으며 말했다.
“나도 쓰러뜨리지 못한 정화의 불꽃이 자네 손에 들어갈 줄이야. 정말 대단하군.”
연금탑 선조의 웃음 섞인 말에 이준 역시 웃음으로 답했다.
정화의 불꽃을 얻게 된 건 정말 운이 좋아서였다.
정화성자가 나타나 대진과 정화의 불꽃이 가지고 있던 영성을 없애지 않았다면 결코 그것을 손에 넣지 못했을 것이다.
“연금탑도 천부연맹의 일원이니, 나도 천부연맹의 일원이라 할 수 있지.”
연금탑 선조가 앳된 얼굴로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천부연맹이 혼전에게 무릎을 꿇는다면, 연금탑 역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몸을 바꿔가며 연금탑을 지켜온 그가 그런 일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혼천맥은 나에게 맡기거라. 쉽지 않은 상대이지만, 최소한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6성 투성을 앞에 두고도 한점 흔들림없는 연금탑 선조의 모습에 이준은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 * *
“연금탑 선조……. 설마 저런 전설 속 인물을 만날 수 있을 줄이야.”
“저 선조는 원래 9레벨 흑주비약이라던데, 이 세상에서 흑주비약은 저 하나 뿐이겠지? 만약 저 연금비약을 먹는…….”
“조용히 해! 죽고 싶어서 그래?”
연금탑 선조의 등장에 산봉우리 주변이 또 한 차례 시끌벅적해졌다.
나이가 있는 강자들은 모두 존경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도 마음 한켠에서 그를 손에 넣고 싶다는 생각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우리 혼족과 적이 되겠다 이건가?”
혼천맥이 눈썹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자네 얼굴을 보아 연금탑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했군.”
“허허, 정말로 내 얼굴을 보아 그런 것인가? 그저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은 아니고?”
“그런 것인지 아닌지 지금부터 알려주마.”
그 순간, 혼천맥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반짝이더니 그의 몸이 귀신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모두 조심하게.”
이준 일행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은 연금탑의 선조가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가 주먹에 힘을 주자, 하늘에서 격렬한 파동이 일면서 거대한 공간 통로 하나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