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755화 (755/818)

755화. 정화평원

“정말 살아있는 아기 같네요. 영기를 가지고 있으니 이름이라도 지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응애! 응애!”

이은의 제안에 이준의 손에 매달려있던 화영은 고개를 들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서 빨리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름이라……. 그럼 응애, 응애 거리는 걸 좋아하니 ‘소애’라고 하자.”

“응애!”

대충 지은 것 같은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듯 화영의 볼이 몇 배는 부풀어 올랐지만, 이준은 그저 씨익 웃으며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소애야, 어서 가자. 여길 떠나야지.”

소애는 속상한 듯 이준의 손에 엎드려 얼굴을 푹 묻었다가 분홍색 화염으로 변해 이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정말 너무하네요. 응애응애 하니까 소애라니…….”

이은은 고개를 저으며 이준을 나무랐다.

“하하…….”

이준은 머쓱한 듯 웃으며 어깨를 한번 들어 올렸다가 화염이 휩싸인 공간을 둘러보며 화제를 돌렸다.

“자, 이제 불꽃도 다 흡수했겠다, 밖으로 나가야지. 사람들이 기다릴텐데.”

“네.”

이준의 뻔뻔한 태도에 이은은 못 당하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으니 고족은 이미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은아.”

이준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준이 모습에 이은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왜……왜요?”

“곧 내가 고족으로 갈게. 아버지를 구한 후에 우리…… 혼인하는 건 어때?”

멍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던 이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는 감격스러운 감정과 행복한 감정이 가득했다. 이 날, 이 말을 듣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던가.

“네.”

이은의 수줍은 대답에 이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텅 빈 허공을 가리켰다.

“좋아. 그럼 이제 가자!”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이은을 끌어안은 채 손끝에서 분홍색 화염을 피워냈다. 그러자 5성 투성의 힘에도 꼼짝하지 않던 공간이 빠르게 일그러지며 허공 위에 커다란 공간 통로가 생겨났다.

두 사람이 공간 통로 안으로 들어가자, 정화세계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이곳은 앞으로 다시는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갈 것이다.

* * *

정화평원. 2년 전 이곳은 험준한 협곡이었지만 지금은 하얀색 모래와 바위만이 끝없이 펼쳐진 평원이 되어 있었다.

정화의 불꽃에 의해 녹아내린 바위와 모래들이 굳어서 만들어진 이 평원 곳곳에는 불속성 에너지를 잔뜩 머금은 수정들이 가득했고, 때문에 불속성의 염력을 가진 수많은 투사들이 수련을 위해 이곳을 찾고 있었다.

난폭한 성질의 불속성 에너지가 가득한 수정석은 사람들에게 ‘정화석’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수정석에 미세하나마 정화의 불꽃의 힘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불속성 염력을 수련하는 사람들과 연금술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덕분에 정화석을 얻기 위해 2년간 수많은 세력들이 이곳을 찾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중주의 크고 작은 세력들이 각자의 구역을 정해 정화석을 채취해 가고 있었다.

당연히 이 평원을 찾는 세력 중에는 천부연맹도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점거한 지역은 평원에서 정화석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었다.

천부연맹이 있는 곳이라면 혼전도 당연히 빠질 수 없었다. 천부연맹이 평원을 점령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혼전 역시 그 곳에 분전을 세웠다.

이후 1년 동안 천부연맹과 혼전 사이에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고, 전투가 점점 치열해지며 최근에는 거의 3일에 한번 꼴로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챙!

염력에 휩싸인 검 두 개가 서로 강하게 맞부딪히며 눈부신 불똥이 튀었다. 그 중 실력이 뒤쳐졌던 자는 창백해진 얼굴로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이미 바닥에 쓰러져있는 부대원들을 보는 순간, 그의 눈에서 독기가 샘솟았다.

“끌끌. 류 대장. 정화석을 모두 넘기시오. 당신들을 지켜본 지도 보름이 되었소.”

남자를 쓰러뜨린 사내가 기괴하게 웃으며 말했다. 새까만 의복을 입은 그의 가슴팍에는 혼전의 휘장이 달려있었다.

“대장님, 빨리 가십시오. 이번 정화석들은 목숨을 맞바꿔가며 한 달 동안 모은 것 입니다. 절대 놈들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온몸이 피로 뒤덮인 남자가 큰소리로 절규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검이 그의 등을 꿰뚫었다.

“흥, 천부연맹 놈들. 감히 혼전의 땅에 들어와 정화석을 캐다니, 죽음을 자처하는구나!”

그 순간, 검은 그림자들이 날아와 피범벅이 된 수십 명의 사람들을 포위했다.

“대장님, 저희가 지킬 테니 빠져나가십시오. 정화석만 무사히 가져가면 우린 연맹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장을 둘러싸며 소리쳤다.

무기를 들고 있던 류 대장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품속에 넣어둔 보자기 속에는 정화석이 가득 들어있는 저장반지 열 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수개월 동안 이곳을 돌아다니며 목숨을 걸고 얻은 보물이었다.

손에 넣은 정화석들을 무사히 연맹으로 가져간다면 그들 모두 연맹의 정식 제자로 승급할 수 있었다.

“모두 칼을 뽑아라! 목숨을 걸고 포위망을 돌파해 반드시 정화석을 연맹의 총부에 전달해야 한다!”

검을 빼든 류 대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죽여라!”

“쯧쯧, 저 놈들의 머리를 잘라 천부연맹에 보내라.”

하늘 위에서 한 노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예!”

노인 뒤에 있던 남자가 조용히 답했다.

하지만 그가 막 앞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돌연 명령을 내린 노인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머리를 잘라 천부 연맹으로 보내라니……. 패기가 대단한걸.”

그리고 사내가 무언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머리가 사라진 노인의 등 뒤에서 한쌍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너희는 누구냐! 이곳은 혼전의 땅이다!”

노인의 뒤에 서있던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혼전 놈들이 여기까지 손을 뻗친 건가.”

하늘 위에서 나타난 남녀는 바로 이준과 이은이었다. 혼전의 강자들을 바라보는 이준의 눈에는 섬뜩한 살기가 가득했다.

이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사내는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5성 투종의 실력을 가진 노인을 개미 밟아 죽이듯 죽일 수 있는 실력자라면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손짓 한 번에 고깃덩어리가 될지도 몰랐다.

“후퇴하라!”

사내의 명령에 남아있던 강자들이 사색이 된 채 사방으로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누구 맘대로.”

하지만 이준이 가볍게 발을 구르자,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수십 명에 달하는 영호들의 몸과 목이 분리되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수십 명의 영호들을 도륙 내버리는 이준의 실력에 류 대장을 비롯한 천부연맹의 강자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희는 천부연맹의 외부연맹 제 3 부대, 현(玄) 부대입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류 대장은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고 이준과 이은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 모두 어려 보였지만 투종 강자도 거뜬히 죽일 수 있는 실력이라면 당연히 까마득한 윗사람을 대하듯 해야 했다.

“이 연금비약들을 나눠가지세요. 숨만 붙어있으면 죽진 않을 겁니다.”

이준이 옥병 하나를 꺼내 류 대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뜻밖의 상황에 류 대장은 바보처럼 두 눈을 깜빡이며 옥병을 바라보았다.

옥병 속에는 영기가 가득 느껴지는 연금비약 여러 개가 들어있었다. 짙은 약향이 올라오는 게 그가 지금까지 본 연금비약 중 최고였던 6레벨 연금비약과도 비교할 수 없어보였다.

“어디서 오신 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평생 구경조차 못할 정도로 귀한 보물을 받은 류 대장은 손을 덜덜 떨며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전우들에게 연금비약을 나누어주었다.

“그럼 정화세계가 닫힌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기꺼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정리한 류 대장은 지난 2년 동안 중주에서 발생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한편, 이준덕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앞에 있는 청년을 훑어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 낯선 강자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석족이 사라져요?”

석족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이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 석족도 영족과 같은 방식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근 1년 동안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삼족맹과 관련이 있겠지요.”

“2년 동안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다니…….”

이준이 굳은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선배님…….”

깊은 생각에 빠진 이준을 쳐다보던 류 대장은 한참을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혼전의 분전이 있습니다. 영호가 죽으면 보통 그들이 알아차리기 때문에 저희는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정화평원에 있는 분전에는 혼족에서 온 투성 강자도 있는데, 2년 동안 벌어진 전쟁에서 우리 천부연맹의 수많은 강자들이 그 강자 손에 죽었습니다.”

“몇 성이죠?”

“1성입니다…….”

류 대장은 이준이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투성’이라는 계급 자체가 그들에겐 그저 전설 속에서나 들어볼 법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혹시 저를 분전으로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미소를 띤 이준의 얼굴을 보며 모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혼전의 분전은 그들에게 있어 문자 그대로 죽음의 땅이나 다름이 없었고, 천부 연맹에서도 절대로 그곳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가죠.”

하지만 그가 무언가 답을 하기도 전에 공간이 일그러지며 이준과 이은, 그리고 류 대장의 모습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끝났어…….”

류 대장이 사라지자, 한 대원이 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며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진정해. 그 선배님,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

“하지만 분전에는 투성 강자가 있다고!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해도 그렇게 어린 나이에 어떻게 투성 강자들을 상대할 수 있겠어?”

다른 대원의 한마디에 자리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쉭!

그때, 공간이 다시 요동치면서 사라졌던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사라진지 아직 십분이 되기도 전 이었다.

“대장님!”

세 사람이 살아 돌아오자 남아있던 사람들이 귀신에 홀린 듯한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류 대장은 초점을 잃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설 속에서만 듣던 투성 강자가 눈앞에 있는 젊은 청년의 손에 고깃덩어리처럼 다져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그 누가 멀쩡할 수 있을까…….

“대장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류 대장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오늘부로 정화평원에 있던 분전도, 그 유명한 혼청 성자도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멍하니 류 대장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단 몇 분 만에 1성 투성을 죽이고 분전을 없앨 수 있단 말인가?

“갑시다.”

하지만 정작 분전을 없앤 장본인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어디론가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자, 그럼 저를 이 구역의 책임자에게 데려다 주십시오. 앞으로 당신들은 천부 내부 연맹의 지(地) 등급 연맹원입니다.”

이준의 말에 사람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천부 내부 연맹의 연맹원은 천(天), 지(地), 현(玄), 황(黃)으로 나뉜다. 그런데 갑자기 지급 연맹원이라니……!

“선배님,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류 대장이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물었다.

“이준이 보냈다고 말하면 될 겁니다.”

먼 곳에서 청년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그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준…….”

그들은 고개를 들어 허공 속으로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저, 저분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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