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4화. 화영(花婴)
석족은 평소 자신들의 실력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세력이었지만, 영족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세력이 하룻밤 사이에 종적을 감춰버렸으니 중주 전체가 발칵 뒤집히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석족이 사라진 과정 역시 영족이 사라졌을 때와 비슷했다. 사라지기 전 그들이 살던 이공간이 갑자기 닫혀버렸고, 공간이 다시 열렸을 때는 이미 그 안에 있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남김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 * *
석족의 멸망에 관한 소식은 바람처럼 중주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수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던 고대 세력 중 두 세력이 증발해 버렸다. 게다가 두 세력이 사라진 방식도 아주 닮아있었다. 이는 영족과 석족을 없앤 범인이 분명 한 명, 혹은 한 세력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 대륙에서 영족과 석족 같은 세력을 소리 소문 없이 없애버릴 수 없는 세력은 혼족과 고족 뿐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가장 의심을 받는 것 역시 당연히 그 둘이었다. 하지만 혼족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고족은 이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혼족과 달리 다른 세력들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석족이 사라지면서 다른 세력들이 하나 둘 고족과도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고족은 자신들이 벌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당연히 혼족을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누구도 그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혼족이 어떻게 쥐도 새도 모르고 석족을 없앨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영족의 멸망 이후 고족에서는 수많은 강자들을 파견해 혼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 누구도 석족이 사라지는 동안 혼족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하지 못했다.
증거도 없이 자신들의 결백을 아무리 부르짖어봤자 다른 세력들이 들어줄 리가 없었고, 이후 혼족과 고족을 제외한 약족, 뇌족, 염족이 돌연 ‘삼족맹(三族盟)’이라는 연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삼족맹’의 성립은 중주의 모든 세력들을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사건이었다. 줄곧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던 고대 세력들 사이에 연맹이 결성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삼족맹을 결성한 세 세력은 영족과 석족을 멸망시킨 세력에게 멸망을 당할까 공포에 떨고 있었다.
영족이야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지만 석족은 이야기가 달랐다.
만일 손을 잡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하나 하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 멸망을 당할지도 몰랐다.
공간통로를 만들면서 서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기로 약속한 세 세력은 석족의 이공간으로 강자들을 파견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려 총력을 기울였다.
* * *
석족이 사라지고 삼족맹(三族盟)이 결성된 지 반 년 정도가 지난 뒤에도 여전히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천부연맹은 혼전과 여전히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천부연맹이 혼전에게 밀리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혼전에게 핍박받았던 중소 세력들이 앞다투어 연맹에 가입했고, 덕분에 천부연맹의 규모는 전쟁이 시작될 때에 비해 몇 배나 커져 있었다.
하지만 세력이 확장되는 동안에도 약로의 머릿속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했다. 그 걱정의 원인은 바로 이준이었다.
정화 세계가 닫힌 지도 벌써 1년 반이 지나갔건만, 이준이 여전히 그 공간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천부연맹의 맹주는 약로지만, 사람들은 그 못지않게 이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애타게 기다려도 이준이 사라졌던 공간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또다시 시간이 흘러 이준이 종적을 감춘지 2년이 지나고, 사람들 사이에서 슬슬 이준이 죽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할 무렵.
정화세계는 여전히 뜨거운 불가마와 같았다. 용암 호수 위에 떠있는 거대한 수정의 매끈한 표면에서 가끔씩 옅은 불씨가 흩날리는 것 외에 끝없이 펼쳐진 불바다에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우직!
정적을 깨고 작은 소리가 정화 세계 안에 울려 퍼졌다. 소리의 근원은 바로 수정이었다. 수정 표면에 미세한 균열들이 점점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윗부분의 거대한 조각이 하나 떨어져 나갔다.
쿵!
분홍색 빛기둥과 금색 빛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 뒤 빛장막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드디어 끝났네.”
잠시 후…….
이준이 빛기둥 안에서 걸어 나왔다. 완전히 타버렸던 그의 머리카락은 벌써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선 작은 화염 연꽃 두 개가 서서히 회전하면서 기이한 흡인력을 방출했다.
이준이 빛기둥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빛기둥에서 머리카락이 허리춤까지 길게 늘어진 여인 하나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이번 수련은 너무 오래 걸렸어.”
이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정화세계의 모습은 수련에 들어가기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지만 이준은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네.”
이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실력도 훨씬 강해졌겠죠?”
“이제 전주를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이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정화의 불꽃을 연소시킨 이준은 몸에서 5성 투성 전반기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준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1성 올리기도 어려운 투성 계급을 무려 3성이나 건너뛰다니, 수십 년이 걸려도 오를 수 있을지 모를 경지를 정화의 불꽃 하나를 흡수하는 것으로 뛰어넘은 것이다.
“오라버니 덕분에 제 실력도 많이 높아졌어요.”
이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화의 불꽃을 연소하는 과정에 에너지가 이은의 몸을 지나가면서 그녀도 4성 투성 상급까지 성장한 상태였다.
이준 혼자 에너지를 모두 흡수했다면 더욱 강해졌겠지만, 그 혼자 정화의 불꽃을 흡수하려 했다면 불꽃을 흡수하기는커녕 잿더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몸속의 화염은 어떻게…….”
이은의 말에 이준은 황급히 몸속에 있는 불꽃의 기운을 느껴보았다. 하지만 몸속에 있던 천지의 불꽃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오라버니, 왜 그래요?”
이은이 이준의 굳은 표정을 보고 급히 물었다.
이은의 말에 대답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온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몸 안을 살펴보던 이준의 영혼에 지금까지 본 적 없던 기이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나와!”
이준이 주먹을 꽉 쥐며 소리치자, 반짝이는 금색이 섞인 분홍색 화염이 그의 몸에서 솟아났다.
그의 몸에서 새어나온 분홍색 화염은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작은 아기로 변했다.
“응애응애!”
불꽃으로 만들어진 아기, 화영(花婴)이 분홍색 화염이 가득한 눈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포동포동한 손을 내밀더니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뒤뚱뒤뚱 걸어왔다.
“이게…….”
이준과 이은은 넋을 놓은 채 화영(花婴)을 바라보았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아이는 공처럼 포동포동했다. 하늘 위로 묶은 머리와 분홍색 배두렁이를 한 아기의 얼굴에는 분홍색의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아기를 보는 순간, 이은의 눈빛이 빠르게 일렁였다.
“응애응애!”
화영이 이준의 손을 껴안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준이 자신의 손을 꼭 껴안은 채 놓지 않는 화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이은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리가 없었다.
“설마 오라버니 몸속에 있던 불꽃들이 융합되어 이런 화염이 만들어진 걸까요?”
이준의 몸속에 있던 것까지 더하면 천지의 불꽃만 자그마치 6개였다. 여섯 개나 되는 천지의 불꽃을 융합한 사람은 역사상 이준이 처음이었으니, 그 불꽃들을 모두 합쳤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역시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화영의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은 진짜 사람과 완전히 똑같았지만, 불꽃에 닿을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내 몸속에 있던 불꽃들이 맞는 것 같아.”
이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이 화영은 분명 정화의 불꽃이 융합되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불꽃이었다. 하지만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이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이 아기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요. 아무래도 제가 가진 제왕의 금빛화염인 것 같아요.”
이은이 말했다.
“정화의 불꽃을 연소시킬 때 제왕의 금빛화염이 내 몸속으로 들어왔었어.”
이준이 화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눈앞의 화영은 여섯 개의 불꽃이 하나가 되었다기보다 이준이 가지고 있던 다섯 개의 불꽃이 정화의 불꽃에 녹아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도 다른 불꽃과는 격이 다른 힘을 가진 정화의 불꽃에게 나머지 화염들이 모두 굴복한 것 같았다.
“저희 아버지가 아주 극소수의 강력한 화염들을 완벽하게 흡수하면 생물이나 사물의 형태를 띤다고 했는데, 오라버니의 새로운 불꽃이 바로 그런 불꽃인 것 같아요.”
이은이 웃으며 말했다.
그때, 이준이 무언가 떠오른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럼 앞으로 화련을 사용할 수 없는 건가?”
화영의 몸속을 관찰하던 이준은 나머지 다섯 개의 화염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버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화련의 파괴력은 서로 다른 불꽃들을 융합시키면서 만들어 지는 것이니 이제 무엇으로 화련을 만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응애, 응애!”
그 말에 이준의 손에 안겨 침을 흘리던 작은 아기의 눈이 반짝이더니 조막만한 손 위에 분홍색 연꽃 하나가 피어났다.
“화, 화련……?”
이준의 눈이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화련(火蓮)은 이준이 직접 만들어 낸 무투기로,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아기는 이준보다 더 빠른 속도로 화련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오라버니의 무투기도 모두 훔쳐 갔나 봐요.”
이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꺄아!”
이준이 놀란 모습을 본 화영은 기고만장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화련을 만들어냈다.
“불꽃의 분노가 열 개 씩이나…….”
아이의 손에서 피어난 열 개의 연꽃을 발견한 이준은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한 번에 열 개나 되는 화련을 만들어 내다니, 이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의 손에 피어난 불연꽃들은 각각 두 개의 화염을 융합시켜 만든 것이었다.
“으앙!”
하지만 이준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열 개의 화련이 맞부딪히며 빠르게 융합되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분홍색 화련을 바라보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그 연꽃에서 느껴지는 파괴력은 자신이 사용했던 화련보다 몇 배는 더 강력했다.
“이번에……. 보물을 제대로 주웠네.”
자신보다 더욱 강력한 화련을 단숨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아기라니……. 이준은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응애! 응애!”
아기는 손바닥 위에 피어오른 분홍색 화련을 집어삼킨 뒤 다시 이준에게 안겼다. 그는 이준을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준이 빙긋 웃으며 화영의 머리를 쓰다듬자, 화영은 편안한 듯 눈이 풀린 얼굴로 눈을 감았다.
이상한 모습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이준은 여전히 천지의 불꽃을 조종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화영은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듯 가볍게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떠올리기만 해도 바로 이준이 생각한 일을 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