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0화. 연천(練天) 진법
이준 일행은 청색 소와 그 등 뒤에 탄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상상하던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체구가 작고 평범한 옷을 입은 앳된 얼굴의 소년 하나가 소의 등 뒤에 올라타 있었다.
소년의 나이는 기껏해야 열 살 안팎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순간 장내에 짙은 적막이 흘렀다. 이곳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그 노인의 목소리가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계속 몸을 바꾸며 환생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경악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던 이준의 머릿속에 이전에 대장로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나타났군.”
혼모 노인은 소년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노인이 나타나기 무섭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던 그의 눈빛에 경계심이 가득해졌다.
“혼족이 약조를 지켰다면 내가 나올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오.”
소년이 맑은 눈망울로 혼모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화의 불꽃은 우리 혼족의 것이오. 그리고 우리 족장님께서 당신에게 관심이 많소. 지금쯤은 9레벨 흑주비약 최고급 수준이 되었겠지?”
혼모 노인이 괴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 혼족의 족장이 날 지켜보고 있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지. 하지만 내가 직접 입 앞까지 찾아가도 날 잡을 능력이 있을까?”
“이번에 족장님이 나오시면 우리 혼족의 적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오!”
혼모 노인이 소리쳤다.
쾅!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색 빛 장막이 무너져 내리더니 한 사람이 빠르게 빠져나와 피를 토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혼멸생. 전주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구려.”
전주를 본 혼모 노인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혼모의 한마디에 전주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이신을 바라봤다.
조금 전, 이신이 꺼내든 거대한 도끼를 보고 나서야 그는 상대방이 누군지를 깨달았다. 이족에서 저런 무기를 사용하는 투성 강자는 오직 하나,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이신’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먼 옛날에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던 그 사람을 오늘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이신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니. 운 좋군. 계속 이족에 있었다면 자네 운명도 이현과 별 다를 게 없었을 텐데 말이야.”
혼모가 고개를 들어 핏빛 도끼를 어깨에 짊어진 채 걸어 나오는 이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탁.
상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이신은 곧바로 발걸음을 멈춘 채 혼모를 노려봤다.
“허허, 이족의 투성 중에 아직까지 살아있는 자가 있었다니…….”
청색 소위에 올라탄 소년이 말했다. 그에게서는 수천 년을 넘게 살아온 이신을 동료처럼 대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연륜이 느껴졌다.
“당신은 연금탑에 있던 그 분 아니오?”
이신의 시선이 소년을 향했다. 소년의 모습은 크게 변해있었지만 그 독특한 기운은 지금까지도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소년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앳된 소년의 미소는 티 없이 깨끗했지만 그 미소에는 왠지 모르게 깊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선배님!”
소년의 등장에 소연금탑의 대장로가 즉시 무릎을 꿇고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예를 갖추었다.
“허허, 투성이 되었구나.”
소를 탄 소년이 작은 손을 뻗어 대장로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하다. 이준, 정화의 불꽃의 본체를 내게 넘기거라.”
소년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혼모가 염력을 폭발시켰다.
‘5성 투성 상급이라니……!’
쉭!
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혼모의 몸이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정화의 불꽃이 봉인된 구체가 있는 곳에서 귀신처럼 솟아났다. 그러나 그의 손이 막 구체에 닿으려는 찰나, 공간이 일그러지며 혼모의 몸을 그 안으로 빨아 들였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다름 아닌 소를 탄 소년이 있던 곳이었다. 소년은 신기하게도 마치 서로 위치를 바꾼 것처럼 혼모가 서있던 자리에서 나타났다.
“공간변환술……? 그럼 6성 투성이 되었단 말인가!”
혼모가 넋을 놓은 듯 멍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의 외침에 뒤에 있던 전주와 부전주, 혼풍의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가셨다. 혼족에서도 오직 태상장로만이 6성 투성을 넘어섰는데, 소연금탑의 시조가 6성 투성이라니……. 혼족의 장로들이 연금탑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 것 같았다.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작은 손을 뻗어 정화의 불꽃이 봉인된 구체를 손에 쥔 채 그것을 천천히 살폈다.
“정말 우리 혼족과 적이 되겠단 말이냐!”
혼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어리석기 짝이 없군.”
하지만 소년은 혼모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검은 구체를 하늘 위로 집어던졌다.
“과연 정화의 불꽃이구나. 일부러 봉인되어 내분을 유발하다니. 하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어서 나오너라!”
소를 탄 소년이 고개를 들어 쉴 틈 없이 일렁이는 검은색 구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년의 말에 사람들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화의 불꽃이 일부러 봉인당한 것이라고?
“이럴 수가…….”
화요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인간들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봉인을 당하다니……. 어떻게 불꽃 따위가 그런 계책을 꾸밀 수 있단 말인가.
“흥, 허튼 소리! 정화의 불꽃이 아무리 강해도 천라의 봉인을 벗어나긴 어려울 것이다!”
전주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혼모는 소년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가만히 검은 색 구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역시 정화의 불꽃이 인간을 속이기 위해 고의로 봉인을 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연금탑의 선조가 거짓말을 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발로 나타나지 않겠다면 내가 움직이는 수밖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금탑 선조의 손가락에서 검은 빛이 솟아나 화살처럼 검은 구체를 향해 날아갔다.
검은 구체와 검은 빛이 닿는 순간, 봉인되어 있던 정화의 불꽃이 강하게 떨리더니 거대한 화염파도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곧이어 새하얀 화염 속에서 눈처럼 하얀 의복을 입은 정화의 불꽃이 나타났다.
“또 내 일을 망치다니, 네 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분노한 정화의 불꽃의 외침에 이준은 소연금탑 시조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화의 불꽃. 네가 중주에 간다면 중주는 도탄에 빠지고 말 것이다. 정화성자가 널 이곳에 봉인한 것도 다 이유가 있지. 그러니 넌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앳된 얼굴의 선조가 불바다를 밟고 서있는 정화의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배은망덕한 놈! 난 수천 년 동안 이곳에서 고통 받았다! 내가 그 놈을 잡아먹은 것은 모두 인과응보지. 6성 투성인 네가 날 막겠다고? 허, 어디 한 번 막아보거라!”
정화의 불꽃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혼모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흥, 우리 혼족은 중주를 지킬 포부 같은 건 없으니 저 녀석을 상대할 거면 혼자하거라. 정화의 불꽃이 정말 중주에 간다면 정화세계를 떠난 저 녀석을 잡는 게 우리 혼족에게는 훨씬 이득 아니겠나?”
그러나 연금탑의 선조는 혼모의 대답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선배님, 저희가 함께 나설까요?”
이준이 정중히 물었다. 연금탑 선조의 실력을 자세히 알 순 없었지만, 분명히 어느 정도 승산이 있기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럴 필요 없다. 너희는 날 크게 도와줄 수 없을 게다.”
하지만 연금탑 선조는 부드럽게 웃으며 이준의 제안을 거절하고는 소의 등에서 내려 불바다를 뚫고 천천히 정화의 불꽃에게로 다가갔다.
“정화성자가 설치해둔 봉인이 그렇게 쉽게 깨질리 없다. 지금이야 네 놈이 억지로 봉인을 깼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봉인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널 여기 묶어둔다면 너는 또다시 천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어디 한 번 그럴 수 있나 보자꾸나!”
그 순간, 정화의 불꽃의 손에서 새하얀 화염이 폭발하더니 엄청난 크기의 화염 거인으로 변했다.
“정화의 신상(神像)!”
화염거인의 몸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에너지에 하늘 단계 최고급 수준에 이른 이준의 영혼마저 공포를 느낀 듯 부르르 떨려왔다. 저 거인의 주먹에 정면으로 맞는 순간, 투성 강자조차 목숨을 보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어라!”
신상(神像) 위에 올라선 정화의 불꽃이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명령을 내리자, 거인이 태산만한 주먹을 들어 올려 연금탑의 선조를 그대로 내리쳤다.
그 순간, 소년의 모습을 한 연금탑 선조의 입에서 눈부신 금빛이 터져나와 거대한 빛의 장막으로 변했다.
쾅!
금색 빛장막 위로 엄청난 강풍이 휘몰아치고, 주위의 공간이 갈라지면서 빠르게 검은 균열이 생겨났다.
“단융천(丹融天)!”
곧이어 연금탑 선조의 손끝에서 청색 피가 새어 나왔다. 짙은 청색 피 안에는 은은한 금빛이 감돌고 있었다.
연금탑 선조의 손을 떠난 청색 피가 정화의 신상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청색 피가 정화의 신상의 가슴팍에 부딪치자, 거인의 몸이 눈부신 청색 빛을 뿜어내며 그대로 녹아내렸다.
‘정화의 신상을 녹여버리다니……. 저놈이 생각보다 더 강해졌구나.’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혼모의 눈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크르릉!
정화의 신상이 반 정도 녹아내리자, 정화의 불꽃의 얼굴이 분노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연금탑의 선조의 정체는 연금비약이니, 천지의 불꽃을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이 높아지고 오랜 세월 환생을 거듭하며 천지의 불꽃을 두려워 하기는커녕 오히려 화염을 억제하는 기운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도 날 가둘 수 없다!”
정화의 불꽃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자, 정화 세계 안에 펼쳐져 있던 새하얀 화염이 빠르게 한 곳으로 모여들며 수천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화염진이 생겨났다.
“연천(練天) 진법!”
콰르릉!
그와 동시에 끝없이 깊은 용암바다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화염진 하나가 더 나타났다.
위 아래로 화염진에 둘러싸이자, 연금탑 선조와 혼모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하, 이것이 바로 정화성자가 직접 만든 화염진이다! 모조리 불태워주마!”
자리에 있던 모든 강자들은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사방에서 타오르는 화염을 바라봤다. 4성 투성인 보람과 고남해는 물론이고 5성 이상의 실력을 가진 연금탑의 선조와 혼모마저 화염진이 폭발하는 순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이준의 머릿속에 있던 광단이 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이 거대한 화염진에 의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정화 성자가 설치한 진을 조종할 수 있다니…….”
혼모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서히 회전하고 있는 공간통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곳은 바로 중주로 통하는 길이었다.
“어서 후퇴하라!”
혼모가 꽁지가 빠져라 공간 통로 쪽으로 날아가며 소리쳤다. 이 대진을 설치한 정화성자는 당시의 혼족 족장마저 두 손 두 발을 다 들 정도로 강한 최상급의 강자였다. 정화성자가 죽은 지 이미 무수한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명성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었다.
5성 투성인 혼모마저 줄행랑을 치자, 전주를 비롯한 혼족의 다른 강자들도 빠르게 공간 통로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다른 고대 세력들의 장로들도 낯빛이 변해 통로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강한 실력을 가진 혼모마저 버텨내지 못하는데, 그들이 무슨 수로 이 화염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