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6화. 7 대 1
용암 기둥 위에 서있는 하얀 의복의 남자는 무심한 눈빛으로 전주와 약만기를 훑어보고는 이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째서 나의 환상안개를 깰 수 있는 거지?”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운이 좋았던 모양이죠.”
정화의 불꽃의 질문에 이준은 시치미를 뚝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지금까지 상황으로 보아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광단은 틀림없이 정화의 불꽃을 손에 넣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런 중요한 물건에 대한 정보를 생각없이 흘릴만큼 이준은 바보가 아니었다.
“저 자식이 환상을 깼다고?”
주변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일제히 이준을 쳐다봤다. 2성 투성 강자가 4성 투성들조차 눈치채지 못한 환상을 간파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 환상을 깨뜨리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준 군, 역시 아주 대단합니다. 하하! 우리 모두 빚을 졌군요.”
가까운 곳에 있던 화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혼족과 약족의 강자들은 못 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준을 바라보는 정화의 불꽃의 눈빛이 점점 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천 년에 걸쳐 완성한 환상 안개를 ‘운’으로 깨뜨리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답을 회피한다는 것은 이준이 무언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확신을 더해줄 뿐이었다.
“됐다. 화노가 되면 스스로 모든 것을 말할 수밖에 없을 테니. 환상을 깬 건 내 예상을 벗어났지만 결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얀 의복의 남자가 가볍게 손을 젓자, 광단이 사라지며 사방으로 무시무시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곧이어 주위의 공간이 단단하게 굳어버리기 시작했다. 사내의 행동은 누구도 이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무언의 선언과도 같았다.
“정화의 감옥!”
곧이어 뜨거운 화염이 창살처럼 온 하늘을 뒤덮더니 빠른 속도로 용암 바다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준 일행은 잽싸게 한 곳으로 모여 굳은 얼굴로 사방울 둘러보았다. 새하얀 화염과 용암이 이어지며 그들의 주위에는 이미 거대한 화염 감옥이 형성되어 있었다.
“우릴 모두 태워버릴 생각이구나.”
약로가 말했다.
“정화의 불꽃은 현재 5성 최고급 투성 강자 정도의 실력이다. 거기에 정화의 불꽃만의 능력까지 더해졌으니 사실상 6성 투성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말없이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5성 최고급이라니…….”
쾅! 쾅!
그때, 뒤에서 갑자기 폭음이 울려 퍼지며 거대한 화염 감옥에 갇힌 수많은 강자들이 화염에 휩싸인 채 재로 변해버렸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수십 명의 사람들이 폭사해버리자,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완전히 핏기가 가셔버리고 말았다.
펑! 펑!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또다시 폭음이 울려 퍼지며 더욱 많은 사람들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정화의 불꽃은 사람의 감정으로 몸을 태울 수 있다. 죽기 싫으면 진정해!”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황급히 냉정을 되찾고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제야 몸속에서 느껴지던 뜨거운 에너지가 서서히 사그라 드는 것이 느껴졌다.
“내 화노가 될 자격도 없군.”
하얀 의복의 사내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차갑게 말했다.
“투성이 아닌 자는 모두 죽어라.”
사내의 짤막한 한마디에 하늘 위에서 끊임없이 폭음이 울려 퍼졌다. 용암 호수에 들어온 자들 중 8할이 투존이었으니,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 깜짝할 새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게 뭐야…….”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자리에 있던 반투성 이상의 강자들마저 새하얗게 질린 채 공포로 몸을 떨었다.
“오, 너희들은 화노가 될 자격이 있구나.”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하늘을 바라보던 사내가 미친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이자, 용암바다에서 열 개가 넘는 용암기둥이 솟아나더니 새하얀 화염갑옷을 입은 열 명의 화노로 변했다.
“전부 투성 강자야……!”
정화의 불꽃이 만들어 낸 화노의 실력은 모두 투성급으로, 심지어 가장 강한 화노는 3성 투성 상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정화의 불꽃의 힘 앞에 영혼의 궁전의 전주마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봉인을 풀 때마다 많은 녀석들이 자신만만하게 이곳으로 들어왔지. 끌끌……. 그리고 모두 나의 노예가 되었다.”
하얀 의복의 남자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놈들도 곧 모두 나의 노예가 될 것이다.”
“후…….”
화노들을 바라보던 전주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의 실력으로도 1성에서 3성 투성 열을 상대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다함께 힘을 합쳐야 하오.”
전주가 굳은 표정으로 이준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화노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4성 투성인 보람과 고남해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주의 말에 남아있던 모든 강자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준과 그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설마하니 그 악명 높은 영혼의 궁전의 전주가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잡자고 제안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이준이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전주가 다시 한번 동맹을 제안했다.
“잘 생각해 보시오. 혼자 저 놈들을 무찌를 자신이 있다면……. 말리지는 않겠소.”
“혼족 놈들이 못 미더운 놈들이긴 해도 전주의 말은 일리가 있소. 정화의 불꽃을 처치하지 못하면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소.”
전주의 요청에 가장 먼저 답한 것은 염족의 화요 장로였다
염족이 동의하자 뒤이어 약족, 뇌족, 석족의 장로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어쩌죠?”
영혼의 궁전 전주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잠시 고민하던 이은이 이준에게 의견을 물었다.
잠시 후, 이준이 고개를 들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이준의 시원스런 대답에 도리어 제안을 꺼낸 전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좋소. 그럼 4성 투성 이상의 강자들은 나와 함께 정화의 불꽃을 처리하고 화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지.”
“화노들은 저희가 맡을게요.”
이준이 보람과 고남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절대로 모든 힘을 다하지 마세요. 저 놈은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겁니다.”
보람과 고남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혼족 놈들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지 알고 있었다.
“이준. 난 싸움에 낄 수 없다. 그들과 가까워지는 순간 봉인이 효과를 잃고 다시 정화의 불꽃에 지배당하고 말 것이다.”
이신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선조님은 혼족 놈들이 저희를 배신했을 때 나서 주십시오.”
이준이 혼족의 세 강자를 훑어보며 말했다. 일단 상황이 급해 손을 잡기로 했으나, 이준은 털끝만큼도 그들을 믿지 않았다.
이준의 말에 이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혼족의 세 강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준이 정화의 불꽃에게서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역시 저 화노들과 같은 상태였을 것이다. 게다가 이준은 이족의 후예이니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준 역시 이신이 자신을 도와주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주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신의 실력은 정화의 불꽃을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강했으니, 혼족 놈들도 함부로 허튼 짓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네 재능은 나보다 더 뛰어나구나. 이족에 네가 있어 다행이다. 과거에 난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켜 동포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너무 늦었지만, 이번에 너를 돕는 것으로 과거에 이족에게 진 빚을 갚을 수만 있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
이준은 말없이 이신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뒤 고개를 돌려 빠르게 하늘을 훑어 보았다. 지금 이곳에는 4성 투성 이상의 강자만 무려 8명이 있었다. 하지만 이신은 전투에 참여할 수 없으니 총 일곱 명이 정화의 불꽃과 맞서게 될 것이다.
이준이 마음 속으로 승산이 얼마나 될지 계산하고 있을 때, 전주가 정화의 불꽃 앞으로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나머지 여섯 명의 4성 투성이 재빨리 원형의 진을 만들어 정화의 불꽃을 포위했다.
남은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런 무시무시한 전투에 휘말려 들었다가는 목숨이 백 개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용암기둥 위에 서있던 정화의 불꽃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정화의 창!”
그가 주먹을 쥐자, 용암바다가 격렬하게 끓어오르며 화염으로 만들어 진 장창이 그에게 날아왔다.
“나를 깨우려는 자는 그게 누구든 모두 죽게 될 것이다.”
마지막 말이 정화의 불꽃의 입을 떠나는 순간, 백 미터가 넘는 거대한 화염 파도가 온 하늘을 휩쓸었다.
“함께 움직이시오!”
전주가 굳은 얼굴로 검은 안개를 터뜨려 화염 파도를 막았다. 그러나 화염파도와 부딪히는 순간, 검은 안개는 그대로 흩어져 버렸고 화염 파도가 7개의 불기둥으로 나뉘어 일곱 사람을 향해 돌진했다.
쾅!
불꽃이 터지면서 뿜어져 나온 파멸의 힘에 의해 일곱 명의 강자가 일제히 뒤로 밀려났다. 심지어 약족의 약만기와 석족의 장로는 옷의 반 이상이 찢어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4성 투성 일곱 명이 손을 잡아도 정화의 불꽃을 제압하기는커녕 놈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들이 숨을 고르기도 전에 용암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손이 솟아나 일곱 사람을 내리찍었다.
퍽!
묵직한 소리와 함께 일곱 개의 그림자가 용암 속으로 처박혔다.
이 장면을 바라보던 이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정화의 불꽃의 힘은 그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용암 호수에 떨어졌던 일곱 명의 투성들은 빠르게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올랐지만, 그들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
누구도 차마 입을 열지 못 했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하나 같이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스치고 있었다.
크르릉!
그때, 용의 울음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더니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봉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수가……. 저 계집은 분명 용족이었을텐데……. 어떻게 봉황으로 변할 수 있지?’
전주가 놀란 눈으로 보람을 훑어보며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때가 아니었다. 자칫 하다가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생각을 마친 전주는 곧바로 미친 듯이 염력을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른 투성들의 힘을 빌어 정화의 불꽃을 제압하고 자신은 염력을 아껴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정화의 불꽃을 낚아챌 생각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힘을 아껴두려 했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두 사람이 힘을 쏟아내기 무섭게 나머지 다섯 사람의 투성도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염력을 폭발시켰다.
일곱 명의 4성 투성이 전력을 다하자 용암 호수에 폭풍이 휘몰아치며 붉은 빛이 감도는 수면 위에 번개가 내리쳤다.
하지만 정화의 불꽃은 놀라기는커녕 피식 웃으며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이제야 재미있어 지는군. 화노. 저들을 죽여라. 너희들만으로 충분하다!”
정화의 불꽃은 이준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크르릉!
정화의 불꽃의 울부짖음과 함께 미동도 하지 않던 투성 화노 열 마리가 번쩍 눈을 떴다. 화노들의 눈에선 새하얀 화염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