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5화. 환상에서의 탈출
한편 이신은 무언가를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괴로운 표정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 앉아 있었다.
“정화의 불꽃의 정신 지배에 저항하고 있는 것 같네.”
그 장면을 바라보던 고남해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거대한 도끼를 손에 쥐고 있는 이신의 몸이 쉴 새 없이 흔들리며 새하얀 불씨가 그의 모공에서 조금씩 빠져나왔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이준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정화의 불꽃이 다시 그를 지배하려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그를 도울 수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있는 광단에서 돌연 미세한 파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마…….”
무언가를 느낀 이준은 곧장 이신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자 이신의 몸이 그대로 멈추더니 새하얀 화염이 그의 몸에서 빠르게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후…….”
이신은 거친 숨을 내쉬다 복잡한 눈빛으로 이준 이마 위에 새겨진 족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족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준은 한참을 말없이 서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족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이준은 현재 이씨 가문에 대한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이준이 말을 마치자, 이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주먹에서는 선홍빛 피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이현 형님도 돌아가셨다니…….”
이신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이곳은 정화세계입니다. 이신 선조님, 함께 정화의 불꽃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네들은 정화의 불꽃을 이길 수 없다.”
이신이 고개를 저으며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곳에 남아있어도 살아남을 길은 없습니다.”
이준의 말에 이신은 한참동안 이준의 눈을 바라보다 결국 몸을 일으켜 마지막 대문으로 걸어갔다.
“좋다. 그럼 따라오너라.”
이준은 곧바로 사람들에게 손짓을 하며 그의 뒤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고남해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가 말없이 이준의 뒤를 따라갔다.
끼익-!
이신이 거대한 문을 밀어젖히는 순간, 하늘 끝까지 닿을 듯 기다란 계단이 눈앞에 펼쳐졌다. 계단의 끝에는 거대한 제단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준은 씩 웃으며 먼저 계단 위에 발을 올렸다. 그가 고민 없이 위로 성큼성큼 올라가자 이신, 이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 제단으로 향했다.
제단 위에는 거대한 왕좌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하얀 의복을 입은 사람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사내의 몸에서는 신비한 흰색 화염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 일행이 제단 위로 발을 딛는 것과 동시에 하얀 의복의 사내가 번쩍 눈을 떴다.
“날 쓰러뜨리면 정화의 불꽃 본체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면 영원히 나의 화노가 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러나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끝모를 힘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온 몸의 솜털이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화산과도 같은 기운에 4성 투성인 고남해마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 달려들어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후…….”
잠시 후, 이준이 침묵을 깨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당신이 정화성자의 불꽃을 뺏은 것 같군. 그렇지 않고서야 정화 성자가 만든 이 공간속에서 환상 안개를 시전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도 환상은 환상일 뿐이야.”
이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빙긋 웃고 있던 남자의 얼굴도 조금씩 굳어갔다.
사내의 표정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랭했다.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이준을 노려보자, 주위의 공간이 파도처럼 격렬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환상?”
이은이 무언가 생각난 듯 외쳤다.
“우리가 아직 환상 속에 있단 말이에요?”
“난 진짜야!”
놀란 보람이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이 진짜임을 주장했다.
“우리 모두 진짜야…….”
이준이 흰색 의복의 남자를 주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환각에 빠진 건 확실해. 여긴 환상안개가 가장 짙은 곳이야. 여기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린 정화의 불꽃이 만든 함정에 더 깊이 빠져들고 말거야. 그러다가 결국 화노가 되고 말겠지.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죽인 화노들도 사실 다 환상이었을거야.”
“그럼 우리가 만난 화노들, 심지어 이신까지 전부 환상이란 말인가?”
고남해가 아무 말 없이 서있는 이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짜도 있고, 진짜도 있는 게 무서운 겁니다. 이신 선조님은 진짜죠.”
이준은 고개를 저으며 이신을 쳐다봤다.
“하지만 진짜라 해도 정신은 정화의 불꽃에게 지배받고 있어요.”
이은을 비롯한 사람들은 신중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곳이 환상 속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정화성자는 투제에 가장 가까운 최고급 투성 강자였지만, 그마저도 마지막엔 정화의 불꽃에게 잡아먹힌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정화의 불꽃이 그의 모든 걸 물려받게 된거죠. 아마도 지금 이 환상 안개가 백만 명을 수백 년 동안 환상 속에서 살게 했다는 정화 성자의 그 무투기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런 게 없었는데…….”
고남해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고족 선조들의 말에 따르면 지난 번 정화의 불꽃이 나타났을 때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고 했다.
“천 년이면 수백 번도 더 변화할 수 있죠. 정화의 불꽃은 정화성자의 모든 기술을 습득해왔을 겁니다. 어찌보면 지금 이 정화의 불꽃은 또 하나의 정화성자라고도 할 수 있겠죠.”
이준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환상안개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왕좌 위에 앉아있던 남자가 드디어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준은 말없이 이마를 문지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환상을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머릿속에 있는 광단 덕분이었다.
“천 년 동안 당신이 이곳을 관리한 것 같아 보이네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당신의 환상을 간파한 사람은 없었을테죠.”
이준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지도에서 얻은 광단이 설마 환상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그 역시 상상조차 못 했었다. 만일 광단을 얻지 못 했다면 이 끝없이 펼쳐진 환상 안개 속을 헤매이다 결국 화노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 됐구나.”
하얀 의복의 사내가 감정 없는 얼굴로 이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순간, 하얀색 화염이 퍼지기 시작하며 주위의 온도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치솟기 시작했다.
이은을 비롯한 다른 강자들은 황급히 서로 등을 맞대고 선 채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환상이면 이곳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느냐? 저 녀석도 진짜처럼 보이는데.”
약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이준은 정화의 불꽃의 환상을 간파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진짜 같아도 환상은 환상일 뿐입니다. 이곳에선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거예요.”
“네 이놈! 닥쳐라!”
이준의 말에 하얀 의복을 입은 남자가 번개처럼 날아와 새하얀 화염이 뿜어져 나오는 주먹을 휘둘렀다.
“저 녀석은 환상일 뿐이에요! 모두 염력을 거두고 저 녀석이 가짜라고 생각해요! 그럼 저 녀석은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염력을 끌어올려 사내에게 대항하려는 순간, 이준이 다급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이준의 지시에 그의 일행들은 잠시 망설이다 염력을 거두어 들이고 눈앞의 이 엄청난 강자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펑!
그러자 그들을 향해 날아들던 새하얀 화염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개 같은……!”
환상이 무너지자, 하얀 옷을 입은 사내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설마 2성 투성 따위가 자신의 환상을 꿰뚫어 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없어져라!”
그 순간, 이준이 두 손가락 끝에 피를 묻혀 허공 위에 기이한 문양을 그렸다.
“가라!”
이준이 문양을 앞으로 내던지자, 주위의 공간이 격렬하게 뒤흔들리다가 ‘펑’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하고 말았다.
* * *
공간이 폭발하는 순간, 이준 일행의 눈앞이 새하얗게 밝아지며 시야가 흐려졌다.
눈부신 빛이 잦아들자, 갑자기 거대한 용암 호수가 그들의 발밑에 펼쳐졌다. 새빨간 용암 속에서는 시시때때로 새하얀 불꽃이 터져 나오고 있었으며, 멀리 떨어진 상공 위에는 거대한 산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이준 일행과 멀지 않은 곳에서는 천천히 회전하는 은빛 광단 하나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온 건가요?”
낯선 지역에 떨어진 이은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여긴 환상이 아니겠지?”
약로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조금 전 상황은 약로도 아찔할 정도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열심히 관문을 뚫고 이곳까지 도착했는데 그 모든 게 환상이었다니……. 천하의 약로조차 꿰뚫어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환상이었다.
“그런 것 같아요.”
이준이 웃으며 말했다.
크르릉!
그 순간, 옆에 있던 이신이 돌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정화의 불꽃이 다시 나를 지배하려 하네!”
이준은 정화의 불꽃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만 찾는다면 화노가 된 이신을 정상으로 돌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 쉽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이대로 이신이 정신을 잃기 전에 공격을 퍼부어야 하나, 아니면 그가 정화의 불꽃의 정신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머릿속의 광단에서 다시 미세한 파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건…….”
이준은 정신을 집중해 광단에서 퍼져 나오는 파동을 느껴보았다.
잠시 후, 이준이 번개처럼 날아가 이신의 이마 위에 기이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문양이 완성되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이신이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이 문양의 효과는 아주 잠시 뿐입니다. 놈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정화의 불꽃의 본체를 찾아야 해요.”
이준이 차분한 표정으로 정신을 되찾은 이신을 향해 말했다.
쉭쉭!
바로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잔뜩 겁에 질린 사람들이 번개처럼 날아왔다.
“모두 빠져나온 걸 보니 우리가 환상을 깨면서 다른 사람들도 환상에서 벗어났나 보군.”
약로가 말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정화의 불꽃은 가져갈 수 없을 겁니다.”
이준이 씩 웃으며 용암 호수를 바라보자, 백 미터에 가까운 용암기둥이 솟아나며 새하얀 옷을 입은 사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이준의 표정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이번에는 머릿속에 있는 광단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이 환상이 아니라 진짜 정화의 불꽃이라는 의미였다.
용암 호수에 있던 모든 사람이 탐욕으로 눈을 번들거리며 하얀색 의복의 남자를 쳐다봤다.
“정화의 불꽃이 천 년 사이에 환상안개를 이렇게까지 수련했다니, 정말 놀랄 일이군.”
근처에 있던 영혼의 궁전의 전주가 구겨진 표정으로 정화의 불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환상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았다면 전주 역시 그 환상 속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정화의 불꽃이 이곳을 빠져나가는 순간, 중주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약만기가 굳은 표정으로 정화의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환상을 간파하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정화의 불꽃의 환상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자신이 환상 속에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으니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공포를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