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화. 통과
그렇게 몇 분 정도 날아가자 자욱하던 언제가 서서히 걷어지며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라버니!”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허공 위에 하얀색으로 된 거대한 문이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준은 말없이 약로를 쳐다보며 화염을 터뜨렸다.
‘환영이 아니야.’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이준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빙긋 웃음을 지었다.
“다들 괜찮아?”
“괜찮아요.”
이은이 급히 이준에게 다가오며 고개를 저었다.
“정화의 불꽃이 환상안개까지 퍼뜨리고 있다니, 천 년 동안 훨씬 더 강해졌나 봐요.”
“환상안개?”
“이 안개는 정화의 불꽃의 능력 중 하나다. 사람을 영원히 환상 속에 가둘 수 있지. 정화성자는 이 능력으로 도시 하나를 완전 장악한 적이 있었다. 그 도시 사람들은 수백 년이라는 시간을 살았는데, 안개가 걷히고 보니 모두 환상이었다고 하더구나.”
고남해가 웃으며 말했다.
“천 년 전에는 환상안개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어려운 싸움이 되겠어.”
“정화성자…….”
이준은 문득 머릿속에 있는 광단을 떠올렸다. 이 광단 역시 정화성자의 것인데, 정화의 불꽃에 격렬히 반응하던 광단은 막상 이곳에 들어오니 거짓말처럼 얌전하게 변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준이 사방을 둘러보며 물렀다. 아직 그들 말고 이곳에 도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세계는 정화성자의 공간이에요.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모두 정화성자의 손에 떨어진 것이니 사람들이 어디에 도착할지는 모두 정화성자 마음이죠.”
이은이 말했다.
“우릴 일부러 함께 묶어둔 것이 분명하다. 이곳을 강제로 뚫으려 해봤었는데, 내 힘으로도 이 단단한 공간을 뚫고 나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남해가 굳게 닫힌 거대한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고족의 선배들도 저런 문이 나타났었다고 했다. 정화의 불꽃을 찾기 위해선 저 문을 뚫어야만 하지.”
“이곳은 정화성자가 만든 곳이니 정면승부로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이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본체를 만나야…….”
고남해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순간, 주위의 공간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조심하거라!”
고남해가 소리쳤다. 이준 일행은 빠르게 열기가 터져 나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쿵쿵!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공간이 끊임없이 갈라지며 온몸이 새하얀 화염으로 뒤덮인 그림자들이 빠져 나오고 있었다.
새하얀 화염체들은 모두 손에 새하얀 창을 든 채 감정 없는 눈으로 이준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화의 불꽃에 연소된 화노(火奴)들이다!”
고남해가 소리쳤다.
“크아앙!”
그 순간, 화노들이 이준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준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삼천불꽃을 폭발시켜 자신을 향해 맹수처럼 달려드는 화노들을 공격했다.
“죽여 봤자 소용없네. 문 안으로 들어가야 해!”
그때, 고남해가 다급한 목소리로 이준에게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이에 이준은 곧바로 자갈색의 불꽃으로 화염 장벽을 만든 뒤 온 힘을 다해 거대한 문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이은과 고남해, 약로 등도 일제히 새하얀 문을 향해 염력을 쏟아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새하얀 문이 무너져 내리자, 그들을 쫓아오던 화노들이 즉시 공격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무너진 문의 뒤쪽에서는 눈부신 빛과 함께 무시무시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가자. 이 정화대전의 끝에 정화의 불꽃 본체가 있다고 했다.”
이어지는 고남해의 말에 이준 일행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문안의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 * *
넓디넓은 대전 안, 하얀 화염이 눈앞을 가득 채운 이곳에는 화염에 휩싸인 그림자가 가득했다.
대전 한편에 서있던 이준 일행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거대한 문에 들어온 후, 이미 이곳과 똑같은 대전을 세 번이나 지나왔다. 게다가 새로운 대전에 들어갈 때마다 화노들의 실력도 점점 강해졌다.
심지어 지금 이준 앞에 있는 화노들은 모두 투존급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투존 한 명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만 지금 수백 명이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투성이 된 이준이라 해도 조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고 장로님. 언제까지 이래야 도착할 수 있는 겁니까?”
이준이 물었다. 이렇게 끝도 없이 반복하다간 정화의 불꽃을 구경하기도 전에 체력이 고갈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이곳의 천지 에너지에는 정화의 불꽃의 힘이 섞여있어 염력을 다시 채우는 것도 어려웠다.
“어쩔 수 없네. 천 년 동안 다져진 정화 세계를 그리 쉽게 통과할 수 있다면 수천 년 동안 아무도 정화의 불꽃을 얻지 못했을 리가 없지.”
고남해의 말에 이준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그들이 통과해온 관문은 신기하게도 그들이 빠져나오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때문에 그들은 몇 번이나 똑같은 문을 넘고 또 넘어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고족에서 온 선배들도 우리처럼 관문을 통과했었습니까?”
“그렇네.”
“천 년 전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어느 정화의 불꽃이 더 강한가요?”
이준이 물었다.
“음……. 천 년 전, 정화의 불꽃은 아주 큰 피해를 입었었네. 하지만 천 년 동안 그 때 입은 상처를 완전히 회복한 모양이야. 게다가 환상 안개를 보니 부상에서 회복된 것만 아니라 더욱 강해진 것 같아.”
고남해가 말했다.
“그렇군요…….”
이준이 고개를 들어 대전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계속 갑시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이준이 다시 손을 들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돌진했다. 그들이 움직이는 순간 대전 안에 있던 화노 대군이 지푸라기마냥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빛의 속도로 관문 끝에 도착한 이준 일행은 그 추진력을 빌려 거대한 문을 그대로 뚫어버렸다.
그 이후로도 끝없이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거대한 대전마다 판에 박은 듯 똑같은 화노들이 가득했지만, 뒤로 갈수록 화노들의 실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2성 투성인 화운마저 화노 대군에 의해 부상을 입을 정도였다.
쾅!
이준은 무표정으로 거대한 문을 단번에 부숴버렸다. 돌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며 박살나는 순간, 또 다른 관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는 힘든 것을 넘어서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
주위를 둘러보던 이준이 갑자기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에는 화노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끝난 거예요?”
이은 역시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하지만 고남해는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눈앞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메마른 남자 하나가 꼿꼿하게 서있었다. 화염에 휩싸이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서있는 그에게서 섬뜩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4성 투성……!’
고남해와 보람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같은 4성 투성이지만 눈앞의 사내가 그들보다 훨씬 더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것도 화노인가요?”
이준이 조금 못 미더운 목소리로 물었다. 4성 투성이 된 화노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화노지만 영기를 가지고 있는 녀석일세. 정화의 불꽃에 완전히 지배된 화노와 다르게 이성을 가지고 있지.”
고남해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게 마지막 관문인가보군. 여기만 넘으면 정화의 불꽃이 있을걸세.”
“휴……. 산넘어 산이군요.”
이준이 말했다. 마지막이라고는 해도, 4성 투성을 무찌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빠져나갈 구멍도 없어.”
보람은 이준에게 손을 저으며 고남해를 바라보았다.
“같이 움직여요. 빨리 처리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
고남해 역시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혼자서 눈앞의 사내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경계해.”
이준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화노를 에워싸고, 보람과 고남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때, 사내가 천천히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는 지금까지 봤던 화노와 다르게 영기가 넘쳤다.
그는 앞에 있는 보람과 고남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않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쿵!
조용하던 대전에서 갑자기 진동이 일어나더니 사내의 손에 수 미터나 되는 핏빛 도끼가 나타났다.
핏빛 도끼를 보는 순간, 고남해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화노가 달려들며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챙챙!
이준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황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4성 투성 강자 셋이 전력으로 맞부딪히자, 나머지 사람들은 전투에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다.
핏빛 도끼를 든 강자는 보람과 고남해의 공격에도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도끼를 회오리처럼 휘저으며 대전 전체에 피비린내를 퍼뜨렸다. 시간이 지나며 그의 몸도 조금씩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지만, 그의 반격은 끝나지 않았다.
쿠웅!
“크릉!”
그때, 핏빛 도끼를 든 남자의 눈이 불꽃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하며 그의 목구멍에서 낮은 포효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강렬한 불빛과 함께 미간에 기이한 문양 하나가 떠올랐다. 문양이 생겨나는 순간, 사내의 기운이 미친 듯이 폭등했다.
사내의 미간에 떠오른 문양을 보는 순간, 이준의 몸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그대로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저……저건 이족의 족문이잖아……?”
이준은 넋이 나간 얼굴로 화노의 미간을 바라보았다. 현재 이족에서는 오직 자신만이 저 족문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정화세계의 화노가 저 족문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이족의 족문이잖아?”
이은을 비롯한 사람들 역시 족문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눈으로 이준을 쳐다봤다.
“설마 이족의 선조인 건 아니겠죠?”
이은의 말에 이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펑!
그때, 사내가 도끼를 강하게 휘둘러 순식간에 보람과 고남해의 에너지 장막을 반으로 갈랐다.
우직!
에너지 장막이 종잇장처럼 찢어지며 안에 있던 보람과 고남해가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밀려났다.
“크르릉!”
하지만 사내는 쉬지 않고 또다시 달려들어 도끼로 허공을 갈랐다.
이를 지켜보던 이준이 유성처럼 날아가 보람과 고남해의 앞을 막아섰다.
이준의 이마에서는 이족의 족문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우웅!
이준의 이마 위까지 날아들었던 도끼가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줄곧 냉담한 표정으로 달려들던 사내의 얼굴에는 동요한 기색이 가득했다.
상대가 자신을 알아본 듯 하자, 이준은 곧바로 손 위에 들려있던 화련을 거두어들이며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전 이씨 가문의 이준이라 합니다!”
“이씨 가문…….”
그 말을 듣는 순간, 사내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족의 사람이란 말이냐?”
쉰 목소리가 남자의 목구멍을 긁으며 새어나왔다.
이준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으로 보아 이 사람은 틀림없이 이족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난……누구지?”
그러나 사내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이준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신, 이신입니다!”
그 순간, 이준의 뒤에서 고남해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이신?”
“이신……”
화노로 변한 사내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고 장로님? 이 분을 아세요?”
이은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모른다. 하지만 저 핏빛 도끼는 고족의 선조들이 남긴 기록에서 본 적이 있다. 이족이 흥성할 당시, 저 사람의 이름을 널리 알린 무기가 바로 저 핏빛 도끼였다.”
고남해가 사내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신은 이현의 사촌 동생이었다. 하지만 어딘가에 얽매이기 싫어하고 성미가 급해 수많은 강자들과 싸움을 벌였지. 기록에 따르면 저 도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라고 하더구나. 하지만 이현이 죽은 뒤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현 조상님의 사촌 동생이라니…….”
이준은 멍하니 메마른 남자를 바라보았다. 고남해의 말대로라면, 눈앞의 사내역시 이현처럼 자신의 선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