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3화. 정화세계
“용족?”
보람 역시 뒤로 살짝 밀려났지만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분수도 모르는 늙은이 같으니.”
보람이 가볍게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너……!”
그때, 줄곧 아무 말도 안 하던 약령이 그를 막아서며 고개를 저었다.
“만기 장로님, 젊은이들끼리의 기 싸움일 뿐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은 역시 웃으며 중재에 나섰다.
“모두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는 게 좋겠네요. 약선 선생님의 일로 싸움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지 않나요?”
“고족도 저 녀석을 도와주려는 겐가?”
이준의 곁에 서있는 이은을 바라보며 약만기가 비꼬듯 말했다.
“약만기, 우리 아가씨는 상황을 정리하시려는 것뿐이다. 생트집 잡지 마라.”
이은 뒤에 있던 파란 옷의 노인이 말했다.
“허!”
약만기는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이은과 고남해를 바라봤다. 하지만 더 이상 손을 쓰지는 못했다. 용족에 고족까지 이준의 편에 선다면 약족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흥……. 이 빚은 조만간 갚아주마.”
약만기가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약만기. 너 같은 놈이 아직도 약족을 좌지우지 하다니……. 내 조만간 약족을 찾아가 그 석비 위에 내 부모님의 이름을 새기겠다.”
약로가 약만기를 노려보며 말했다.
“설마 너 같은 쓰레기의 부모님이 석비 위에 이름을 남길 수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하하!”
“영감,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준의 얼굴이 전에 없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약로는 그에게 아버지나 마찬가지였으니,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옆에 있던 보람 역시 살벌한 눈으로 약만기를 노려보았다.
“너……!”
상황이 이쯤 되자 약만기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보람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었지만, 그 사이에 이준과 약선이 약천이나 약령을 죽여 버린다면 그 역시 처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약만기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집어삼키며 이준과 약로를 노려본 뒤 씩씩대며 먼 곳으로 날아갔다.
“스승님, 정화의 불꽃을 얻고 나서 함께 약족의 땅으로 가보도록 하죠.”
약족의 세 강자가 달아나자, 이준이 약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고맙구나.”
전설의 8대 세력 중 하나인 약족을 가볍게 물리치는 모습에 주위에 있던 강자들은 감히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한바탕 떠들썩하던 하늘이 잠잠해지자, 사람들은 다시 부서진 이공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하얀 빛이 액체처럼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그 열기로 인해 사막 전체가 녹아내려 용암 호수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 * *
기다림은 3시간이나 더 지속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간의 균열이 점점 커지며 ‘쿵쿵’ 하는 기이한 소리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부서진 공간은 백 미터 가까이 팽창하고 나서야 멈추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갈라진 공간의 중앙에서 새하얀 광단이 솟아났다.
그때, 자리에 있던 모든 강자들은 일제히 두 눈을 번쩍 떴다. 천지의 온도가 순식간에 백 배 가까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이은이 눈을 번쩍 뜨고 놀란 토끼눈을 한 채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움직여야 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많은 사람들이 하얀색 광단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갔다.
이준 역시 주먹을 움켜쥔 채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검은 두 눈동자는 이미 열기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준 오라버니. 함께 온 사람들 중에 반투성 이하 사람들은 돌려보내는 게 좋겠어요. 너무 위험해요.”
부서진 공간을 향해 벌떼처럼 날아가는 인파를 보며 이은이 말했다.
“응.”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온 천부연맹의 강자들 역시 중주에서 손에 꼽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실력으로 저 공간 안에 들어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재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먼저 연맹으로 돌아가 연맹을 지켜주시오.”
약로가 뒤를 돌며 외쳤다.
“예!”
약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반투성 이하의 강자들은 잽싸게 고개를 숙인 뒤 광단의 반대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자신의 실력으로 이곳에 남아있다가는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곧 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허, 이준 군. 그럼 저희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화현이 이준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 곧이어 화요 장로의 통솔 하에 이준보다 앞서 하얀 광단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도 움직이자.”
고대 세력의 강자들이 모두 광단 안으로 들어가자 이준 역시 조금 다급해졌다.
“이준 오라버니. 정화의 불꽃은 사람의 감정에 따라 몸속에 들어온다고 해요. 일단 정화의 불꽃이 나오면 영혼도 모두 재가 되어 사라질 수 있으니 뭘 보든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모든 감정을 제어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정화의 불꽃이 몸속을 헤집어 놓게 될 거예요.”
이은이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주의를 줬다.
“그래?”
이준과 약로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역시 투기 대륙 최고의 세력답게 그들은 정화의 불꽃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알았어. 그럼 각자 몸조심하고, 갑시다!”
말을 마친 이준이 빠르게 광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뜨거워…….’
광단에 들어오자마자 이준은 불가마에 던져진 듯한 착각을 느꼈다.
주변을 빠르게 훑자 새하얀 화염이 퍼져있는 기이한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세계는 전부 이 새하얀 화염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다섯 개의 천지의 불꽃을 가진 이준마저 살결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열기가 사방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빠르게 천지의 불꽃으로 온 몸을 감싸자, 온 몸이 불타는 듯한 감각이 조금씩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이 정화의 불꽃이 봉인된 세계인가? 은이는 어디있지?’
이준은 텅 빈 사방을 빠르게 훑었다. 분명 이은과 함께 들어왔는데, 왜 혼자 남겨져 있는 걸까?
이준은 허공 위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새하얀 화염들은 정화의 불꽃의 본체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차마 다가갈 수 없었다. 게다가 아무것도 없는 이 고요한 공간 곳곳에서 강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으니 섣불리 몸을 움직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우선 여길 나가자.’
이준은 발끝으로 허공을 디디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은 우선 다른 사람들을 찾아야만 했다.
이준은 불바다를 뚫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천지의 불꽃으로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점점 더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쉭!
하지만 이준의 속도로 십 분 이상을 날아갔음에도 불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주위에서는 그 누구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는 대체 얼마나 큰 거야? 설마 이곳에 들어오면서 모두 다른 곳으로 이동된 건가? 하지만 여기 들어올 땐 그런 걸 못 느꼈는데…….’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준은 그제야 환해진 얼굴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세 명의 그림자가 싸늘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주?!”
그들은 다름 아닌 혼족의 세 강자였다. 그들을 마치 그곳에서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이준이 세 사람을 노려보며 말했다.
“별 거 아니다. 보여줄 게 있다.”
전주가 씩 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며 한 남자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아버지?!”
그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이한의 영혼체였다.
“준아?”
이준의 목소리를 들은 이한이 몸을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준. 너는 이곳에서 절대 살아나갈 수 없다.”
전주가 손으로 이한의 머리채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곧 널 잡게 될 테니 이놈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겠군.”
“멈춰!”
퍽!
다음 순간, 이한의 영혼체가 빛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리다가 새하얀 화염에 의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이준은 몸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팟!
분노한 이준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성난 짐승처럼 전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기 무섭게 새하얀 화염이 빠른 속도로 이준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화의 불꽃?”
갑자기 전해지는 극심한 통증에 이준은 이성을 되찾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앞에 서있던 혼족의 세 사람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젠장. 속임수였어. 이건 전부 감정을 자극하는 환상이었어!’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차린 이준은 빠르게 자신의 불꽃을 온 몸의 혈관으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몸 안으로 흡수된 새하얀 불꽃이 빠른 속도로 모공을 타고 밖으로 배출됐다.
하얀색 화염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이준은 땀범벅이 된 채 한숨을 내쉬었다. 화염에 대한 저항력이 조금만 낮았어도 그의 몸은 이미 형체도 찾아볼 수 없이 녹아내리고 말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광경이었다.
‘역시 정화의 불꽃이야. 보리나무에서 봤던 환영과 다를 게 없었어.’
퍼엉-!
다시 한 번 화염을 터뜨리자, 눈앞에 보이던 하얀색 화염이 빠르게 흩어지면서 하얀 안개가 나타났다.
그 안개 속에는 수십 명의 강자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몇 몇 사람들은 이미 화염에 휩싸인 채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이준은 이 이상한 안개가 환영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승님?!”
주변을 빠르게 훑던 이준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약로가 있었다. 괴로운 표정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그의 몸에도 이미 하얀색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염에 타들어가고 있는 약로를 본 이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몸속으로 들어간 정화의 불꽃은 빼내기 아주 어렵다는 것을 이미 느껴보았기 때문이다.
다섯 개나 되는 천지의 불꽃을 가진 이준도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 했으니,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스승님이라면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으아!”
이준은 반사적으로 앞을 향해 튀어 나가 약로의 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이준의 입에서 낮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함소리에는 이준의 영혼파동이 섞여있었다. 영혼의 힘이 섞인 음파가 약로의 귓속으로 파고드는 순간, 흐리멍덩하게 변해있던 그의 눈이 빠르게 빛을 되찾았다.
“후욱, 후욱…….”
이준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내쉬던 약로는 놀란 표정으로 식은 땀을 닦아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 정화의 불꽃이 이런 환상을 만들 수 있다니……. 네가 아니었다면 정말 큰 일이 날 뻔 했구나.”
이준은 씁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안개가 문제일 거예요. 우선 이곳을 빠져 나가요.”
“화운 장로는 어디로 갔느냐?”
약로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위험한 장소에서는 투성이라 해도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보지 못했어요. 은이도요……. 아마 보람이와 같이 있을 거예요. 그래도 두 사람이라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죠.”
“그렇겠지.”
약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선 도움을 주고 싶어도 줄 방법이 없었다. 이은의 충고에 따라 연맹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가요.”
이준은 환상에 빠진 사람들을 슥 훑어보고는 그대로 안개 속을 벗어났다. 모두 정화의 불꽃을 목표로 온 경쟁자인데, 여기서 그들을 도와 더 골치 아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