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2화. 진정한 영혼의 힘
“하아…….”
고남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영족이 사라지면서 8대 세력 간에도 불화가 생겼나 보군요.”
이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족과 혼족 중 범인이 있다면 이준은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세력들 입장에서는 딱히 고족을 믿을 이유가 없었고, 혼족을 의심할만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족을 소리 소문 없이 멸망시킬 힘을 가진 세력이라고는 고족과 혼족 둘 뿐이었으니 둘 모두를 의심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 일은 혼족이 꾸민 짓이에요. 남은 종족들이 서로를 경계하도록 만들어 연합하지 못하도록 할 속셈인 거죠.”
이은이 전주가 있는 방향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봤자 증거가 없으니 아무도 우릴 믿어주지 않는다.”
고남해는 체념한 듯 손을 내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정화의 불꽃이 나왔으니 뇌족, 약족, 석족도 곧 도착할 거야.”
“약족…….”
이준의 시선이 약로를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약로의 두 눈에는 복잡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찌됐든, 지금은 이공간으로 들어갈 기회가 생길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
고남해가 뒷짐을 진 채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 *
뼛속까지 파고드는 열기가 계속해서 이공간 속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얀색 빛이 나타나는 빈도수가 많아지면서 사막으로 변했던 땅은 이제 모래알까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 소리와 함께 무수히 많은 그림자가 주위에 나타났다.
이상 현상에 이끌려 수많은 강자들이 모여든 것이었다. 그렇게 30분 만에 하늘 전체가 사람으로 꽉 찼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부서진 공간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진정한 강자만이 이준 일행처럼 이공간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 사이 뇌족과 석족이 연이어 도착했지만 이은과 영혼의 궁전의 전주를 발견하곤 거리를 둔 채 멀리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영족의 실종사건으로 그들 역시 고족과 혼전을 크게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반응에 이은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혼족이 영족을 없앴다는 증거가 없으니 그들의 의심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뇌족과 석족이 도착한 지 30분 정도 지났을 때, 하늘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그 바람 속에서 약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약족 사람들이야…….”
독특한 냄새를 맡은 이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곁에 서있는 약로역시 잔뜩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쉭!
먼 곳에서 파동이 일렁이더니 세 사람이 빠르게 자리에 나타났다.
셋 중 훤칠한 외모에 화려한 금포를 입은 남자는 외모에서 온화한 기운이 느껴졌다.
반대로 새파란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 여자는 마치 얼음처럼 서늘한 기운을 전신에서 뿜어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연금술사 의복을 입은 노인은 깍지를 낀 채 전신에서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저 젊은 남자는 약천이라는 사람인데, 약족에서 가장 젊고 뛰어난 사람으로 꼽히고 있어요. 영혼의 힘도 하늘단계 상급인데다 투성 중급의 실력으로 약족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죠. 9레벨 보물비약 제련에 성공한 적도 있다 해요.”
이은의 설명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약천의 동생, 약령이에요. 초급 반투성이지만 영혼의 힘은 황제단계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 불린다고 해요.”
“저 노인은 대단한 경력을 가진 약족의 장로로, 이름은…….”
이은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약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약만기. 약족에서 형벌을 관리하는 자로 저자의 말 한 마디에 생사가 결정된다.”
이준은 놀란 얼굴로 약로를 쳐다봤다. 약로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죽일 듯한 눈빛으로 약만기라는 노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스승님?”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준은 곧바로 약로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다…….”
약로가 숨을 천천히 고르며 말했다.
“저 약만기와 무슨 악연이라도 있는 겁니까?”
이준의 말에 약로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날 말 한마디로 약족에서 쫓아낸 자가 바로 저 자다.”
“이준 오라버니. 약만기는 4성 초급 투성 강자에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닐 거예요.”
이준의 눈빛이 돌변하자 곁에 있던 이은이 작은 목소리로 그의 실력을 알려주었다.
“다 생각이 있어.”
이준은 씩 웃었다. 4성 초급 투성이라면 확실히 까다로운 상대였지만 정화의 불꽃을 손에 넣는다면 반드시 그를 꺾을 수 있을 것이다.
투지로 빛나는 이준의 눈을 확인한 이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준이 한 때의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약족의 등장은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약족은 열 명 중 한 명이 연금술사일 만큼 연금술에 천부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자들로, 연금탑과 비교해도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는 중주 최고의 연금술사 집단이었다.
다만 그들은 외부 사람들을 철저히 배척하며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살아가기에 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멀지 않은 곳에서 혼족의 강자들을 발견한 약만기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고족 사람들도 왔구나.”
전주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이은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후, 마침내 이은 옆에서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약로와 약만기의 눈이 마주쳤다.
“약선, 저 녀석이 투성까지 올라올 줄이야. 아주 놀랍군.”
약만기가 씩 웃으며 말했다.
“네 덕에 아직 목숨은 붙어있다.”
약로의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변해있었다.
반면 약만기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그에게 있어 1성 투성은 눈 여겨 볼 가치조차 없는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저 자가 그 약선입니까? 돌아올 기회를 주었음에도 고집을 부리며 거절했다던?”
약만기의 말에 훤칠한 외모를 가진 남자가 약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허허, 밖을 떠돌면서 유명세를 좀 탔다고 본인이 대단해진 줄 아는데, 착각마시게.”
약만기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강자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평범한 세력들 입장에서는 천부연맹도 약족도 감히 눈조차 마주칠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이 오랜 수련기간에도 하늘단계 상급에 도달하지 못했다니, 참 평범한 인물이군요. 약족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기에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그저 주제를 모르는 늙은이에 불과했군요.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약로를 바라보며 약천은 재미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 오랜 수련 기간에도 여전히 하늘단계 상급에 머물러있다는 것도 대단치는 않아 보이는데요?”
그때, 이준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약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뭐야?”
약천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이준을 노려보았다.
“약선 선생님의 제자, 이준입니다.”
“네가 바로 그 연금술 경연 대회의 우승자, 이준이냐?”
약천의 입꼬리에 싸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그래봤자 똑같이 허접한 것들끼리 모여 경쟁하는 것 아니냐. 그런 수준 이하의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고 기세등등한 꼴이라니…….”
말이 모두 끝나기 무섭게 엄청난 영혼의 힘이 거대한 파도처럼 이준에게 들이닥쳤다.
“오늘 제가 대신 제자를 따끔하게 가르쳐 드리지요!”
우직!
하지만 이준이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자, 약천의 영혼의 힘이 순식간에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1성 투성, 하늘단계 상급 영혼으로 스승님 대신 날 가르치겠다고? 웃기는 소리.”
이준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굳어있는 약천을 향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 영혼의 힘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주먹으로 변화했다.
“하늘단계 최상급?!”
수많은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저 나이에 하늘단계 최상급 영혼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째서…….”
약천, 약만기, 약령 역시 낯빛이 빠르게 변했다. 어떻게 저런 새파란 애송이가 약만기조차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영혼 주먹이 무서운 속도로 약천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이 주먹에 맞는 순간, 약천의 영혼은 중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린 놈이 감히!”
당황한 약만기는 황급히 약천을 자신의 뒤로 잡아당기는 동시에 4성 투성의 염력을 폭발시켜 이준의 영혼 주먹을 막아냈다.
쿵!
무시무시한 염력과 영혼의 힘이 맞부딪히는 순간, 약만기의 몸이 살짝 뒤로 밀려나며 영혼 주먹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만기 장로님. 저 녀석을 죽이십시오!”
뒤에 있던 약천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수치를 당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체면이고 뭐고 따질 수도 없을만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쉭!
하지만, 약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혼의 힘이 눈앞에 빠르게 모이더니 눈 깜짝할 새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영혼 분신?!”
당황한 약천은 반사적으로 염력을 터뜨려 몸을 방어했지만, 이준의 속도는 약만기조차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이준의 영혼 분신이 손을 들어 약천의 뺨을 내리치자, 경쾌한 소리가 하늘 전체로 울려 퍼졌다.
“쓰레기 같은 자식. 감히 우리 스승님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
짜악-!
약천의 얼굴엔 어느 새 빨간색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생겨나 있었고,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늘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어떻게 감히 약족의 차기 족장 후보의 뺨을 후려칠 수 있단 말인가?
“네, 네놈이 감히 날 때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약천은 새빨개진 눈으로 미친 사람처럼 이준의 영혼분신을 노려보았다. 곧이어 짙은 갈색 화염이 치솟더니 거대한 거북이로 변화했다. 거북이의 온몸은 뾰족한 불가시로 뒤덮여 있었고, 입속엔 칼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했으며, 머리와 꼬리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현무의 불꽃……!’
현무의 불꽃은 천지의 불꽃 중 열세 번째 불꽃이었다. 그런 불꽃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준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죽어라!”
약천의 낯빛이 점점 싸늘하게 변하더니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하늘 위에 울려 퍼졌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현무의 모양을 한 불정령이 네 발을 움직이며 날카로운 불가시가 가득 돋아난 꼬리를 휘둘렀다.
“형편없군.”
하지만 고작 천지의 불꽃 중에서 열세 번째에 해당하는 현무의 불꽃으로 다섯 개나 되는 천지의 화염을 가진 이준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준이 피식 웃으며 손을 들자,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화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갈색의 화룡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약천의 불꽃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황급히 주인의 몸으로 돌아갔다.
“푸흡!”
다음 순간, 약천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터져 나왔다.
별의 불꽃 하나도 당해내지 못하는 현무의 불꽃으로 다섯 가지 화염이 융합된 이준의 화염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준의 영혼의 힘이 약천을 훨씬 뛰어넘으니 두 사람이 맞붙으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개 같은 놈!”
약만기가 중상을 입고 주저앉은 약천을 보곤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준의 영혼분신 앞에 나타나 있는 힘껏 주먹을 뻗었다.
쉭!
하지만 이준은 그의 공격을 무시하고 분산됐던 영혼의 힘을 그대로 다시 불러들이며 조롱 섞인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너희 따위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이준. 죽고싶구나!”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한 약만기는 새빨개진 얼굴로 이준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흥, 이 노인네가 어디서 행패야!”
그 순간, 보람의 손에서 거대한 금빛 용이 솟아나 약만기의 주먹을 막아냈다.
쾅!
금빛 용에 의해 비틀거리며 밀려난 약만기는 보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