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1화. 팔황의 불꽃
“저 자가 영혼의 궁전의 전주라고? 역시 대단하군.”
전주를 바라보던 화운이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전주의 실력은 이준이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그를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건만, 막상 만나보니 자신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였다.
“강적이야. 조심해야 해.”
옆에 있던 보람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말을 마친 보람은 곧장 옆으로 움직여 이준의 앞을 살짝 막아섰다. 이곳에서 전주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그녀 뿐이었다.
“걱정 마. 정화의 불꽃을 얻기 전까진 저들도 공격하지 않을 거야.”
이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허허, 이준씨, 역시 왔군요!”
그때,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몇몇 그림자가 강한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화현씨 였군요.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세 사람 중 가장 앞에 서있는 자는 바로 고계에서 알게 된 염족의 화현이었다. 이준은 그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화현의 옆에는 여전히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함께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에 더해 보라색 옷을 입은 노인이 함께였다.
“몇 년 사이에 투성이 되어 있다니, 역시 대단하네요.”
이준에게 인사를 건네던 화현이 놀란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하, 화현씨 역시 반투성 최고급 수준이 아닙니까. 이제 투성이 얼마 남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이준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보리심이 아니었다면 화현의 성장 속도를 절대로 따라잡지 못했을 것 같았다.
“어, 몸속에 이화가 생기신 것 같은데…….”
화현의 몸을 천천히 훑던 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화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장로님들의 도움 덕에 우리 염족의 팔황의 불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겠지요.”
화현은 웃으며 말했다.
“팔황의 불꽃을?”
이준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염족에는 네 개의 천지의 불꽃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중 두 가지는 천지의 불꽃 중 10위 안에 드는 화염으로, 홍연의 불씨는 천지의 불꽃 중 여덟 번째에, 팔황의 불꽃은 천지의 불꽃 중 여섯 번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강력한 불꽃이었다.
‘역시 염족이야. 대단해…….’
이준의 가슴 속에 부러움이 가득 찼다.
그가 목숨을 걸고 얻은 불꽃 중 가장 강한 것이 9위인 별의 불꽃인데, 두 사람은 염족이 가지고 있던 화염을 물려받아 힘을 키웠으니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이준 군. 이쪽은 화요 장로님입니다. 이 분도 천지의 불꽃 중 열여섯 번째의 화운의 불꽃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현이 보라색 옷을 입은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이 자리에 천지의 불꽃이 모두 여덟 개나 모여있는 건가요.”
이준이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여덟 개가 아니라 아홉 개네요.”
그 순간,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이준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이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준의 표정이 어린 소년처럼 환해졌다.
하늘 위에서 격렬한 파동이 일렁이더니 청색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꽃처럼 예쁜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걸려있었다.
이은은 선녀처럼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의 곁에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바로 이은 못지않은 고족의 천재 투사, 고청양이었다.
하지만 그 옆에 서있는 파란 의복의 노인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노인의 입가에는 온화한 웃음이 걸려있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강했다.
세 사람이 나타나기 무섭게 자리에 있던 강자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역시 고족에서도 강자들을 파견했군요.”
부전주가 눈썹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우리 혼족도 있는데 고족이 빠질 리가 없지.”
이은 일행을 바라보던 전주의 시선이 파란 옷을 입은 노인을 향하는 순간, 그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고남해……. 저 자가 올 줄이야.”
“그래도 전주님의 실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저지할 수 있을 겁니다.”
검은 의복을 입은 혼족의 소족장이 말했다.
“8대 종족 사이에 5성 투성 이상의 강자는 함부로 손을 써선 안 된다는 약조가 있습니다. 전주님은 딱 이 자격에 부합하지 않습니까. 전주님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을 겁니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또 다른 강자들도 분명 이곳을 주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전주가 고개를 들어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말했다.
* * *
“오라버니, 드디어 투성이 되셨군요.”
이준을 바라보는 이은의 표정이 한없이 밝았다. 옆에 있던 고청양과 노인은 고족 안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은의 그런 표정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었어요, 오라버니.”
이은이 이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제 전 자유에요. 오라버니 곁을 지킬게요.”
이은은 고족을 위해 어릴 때부터 이씨 가문에서 자랐고, 고족을 위해 이준과 헤어졌으며, 고족을 위해 기나긴 시간을 외로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제 기다림은 끝났다. 지금 이준의 실력이라면 고족이라도 두 사람의 관계를 무턱대고 반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에 이준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우리를 모두 없는 사람 취급할 생각인가?”
이준과 이은이 꼭 끌어안고 사랑의 말을 속삭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고청양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이은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이준의 품을 벗어났다.
이준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나가있던 이은은 그제야 이준의 뒤에 서있는 약로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허리를 숙여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약로 선생님이시지요?”
“허허, 아가. 정식으로 만난 적이 없을 뿐이지, 우리도 진작부터 알던 사이였단다.”
약로가 웃으며 말했다. 아주 오래 전, 이은은 약로가 이준의 몸속에 있는 것을 알아차렸었다. 그때는 약로가 이준에게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인지 몰라 넌지시 경고만 했었다.
“선생님, 그때 그분이 선생님이셨군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약로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차린 이은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다시 한 번 고개를 황급히 숙였다. 당시 그녀는 약로가 무슨 나쁜 뜻을 가지고 이준에게 접근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일어난 모든 일들이 약로가 이준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주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하하, 별 거 아니다. 스승이 되어서 며느리가 제자 걱정하는 것을 나무랄 수 있겠느냐?”
약로가 인자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준 오라버니. 이 분은 고남해 장로님이에요.”
잠시 후, 이은이 웃으며 파란 옷을 입은 노인을 이준에게 소개했다.
“고족도 정화의 불꽃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노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감지한 이준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준의 실력으로는 노인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실력이 보람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4성급 이상의 투성이 왔다는 것만으로 고족이 이 문제에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허허, 그건 아닐세. 정화의 불꽃은 손에 넣고 싶다고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말이야. 우리는 그저 그 불꽃이 혼족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왔을 뿐이네.”
파란 옷의 노인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태도는 중주 최강의 세력 중 하나인 고족의 장로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온화했다.
“예전에도 정화의 불꽃이 출몰했었지만 아무도 흡수하지 못했었어요. 저 공간봉인은 정화성자가 설치한 것인데, 정화의 불꽃이 저 봉인을 파괴해도 봉인이 천지에너지를 흡수해 다시 가둬버리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이은이 웃으며 설명했다.
“그리고 혼족은 매번 정화의 불꽃이 출현할 때마다 이곳을 찾아오고 있죠.”
“전혀 안 움직이는데?”
이준이 혼족의 세 사람을 가볍게 훑어보며 말했다.
“정화의 불꽃이 봉인을 파괴하면서 에너지를 소모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이은이 두 눈이 온통 새까만 남자를 힐긋 쳐다본 뒤 말했다.
“저 사람을 조심하세요. 저 사람의 이름은 혼풍인데, 혼족의 신급혈통을 가진 자예요. 지난번에 봤던 혼옥도 신급 혈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혼풍과 비교하면 하룻강아지에 불과하죠. 혼풍은 혼족의 차기 족장이 될게 거의 확실한 사람이에요.”
혼풍을 천천히 훑어보던 이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족의 차기 족장이라니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이준 오라버니도 2성 투성인데다 전투력은 그 이상이니 혼풍과 비슷할 거예요. 정말 맞붙게 되면 누가 이길지는 모르는 거죠.”
이은이 웃으며 말했다.
이준 역시 입으론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기 혼족의 족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라면 절대 만만한 상대는 아닐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데 8대 종족에선 왜 여기 있는 사람들 밖에 오지 않은 겁니까?”
혼족, 고족, 염족에서 모두 2, 3명씩 밖에 오지 않은 걸 알아차린 이준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정화의 불꽃을 얻는데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네. 저 공간에 들어갈 땐 자네 일행들과 함께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모두 잃게 된다면 손실이 너무 클 테니까.”
고청양이 이준 뒤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충고했다.
“어…….”
그의 말에 이준과 약로 모두 당황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저 공간은 수천 년 동안 정화의 불꽃이 지배하면서 지옥보다도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 되었네. 저곳에 들어가는 순간 반투성 강자도 목숨을 건지기 어려울 게야.”
파란 옷을 입은 고남해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이준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남해와 고청양에게 감사를 표했다. 천부연맹은 확실히 경험이 부족했다. 만일 고족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무의미하게 아까운 강자들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8대 세력 사이에는 5성 투성 이상의 강자는 함부로 손을 쓰면 안 된다는 협약이 있어요. 그래서 이곳에 온 사람들도 전부 5성을 넘지 않죠.”
이은이 설명했다.
“어쩐지…….”
이준은 그제야 혼전의 중요 분전을 무너뜨렸는데도 강자들이 찾아오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전주 혼자 정화의 불꽃을 손에 넣고 분전의 문제까지 해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허허, 화요 장로. 염족에서 자네를 보낼 줄이야.”
그때, 고남해가 자신이 나타난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염족의 투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보라색 옷을 입은 노인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족장께서 정화의 불꽃이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셨네. 그래야 모두에게 좋으니까.”
고남해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화요 장로. 설마 자네도 우리가 영족을 해쳤다고 의심하는가?”
그의 질문에 화요 장로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증거는 없지만 고족과 혼족이 가장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지.”
말을 마친 화요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고족과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화현은 이준을 향해 간단한 눈인사를 보낸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