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9화. 전주
“여유가 있을 때 이준을 데리고 약족의 땅에 한 번 가봐야겠소.”
약로가 뒷짐을 진 채 먼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깊은 슬픔과 회한이 묻어났다. 그 역시 이준 못지않게 험난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절망에 빠져있을 때, 하늘은 그에게 한줄기 빛을 내려 주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겠구려. 이제 곧 정화의 불꽃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혼족 놈들도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더군.”
약로의 뒤에 있던 풍존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시간 맞춰 깨어날 것이니 걱정 말게. 우선 조용히 기다리자고. 이준의 수련 장소 천 미터 내로는 어느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도록 해주게.”
말을 마친 약로는 곧바로 뒤를 돌아 산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알겠네.”
풍존이 답했다.
* * *
적막 속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산봉우리에서 퍼져 나오는 영혼 파동은 그치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지더니 급기야 성운계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강해졌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준 덕분에 성운각의 제자들은 한 달 내내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 달을 견디자 영혼의 힘이 더욱 강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혼의 힘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해보면 성운각의 제자들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이준에게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준의 영혼 파동을 견디는 것만으로 영혼의 힘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일부 제자들은 이를 악물고 영혼의 파동이 흘러나오는 산과 한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 수련을 하기까지 했다.
이를 시작으로 점점 더 많은 제자들이 반응하면서 성운계 전체가 한 순간에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성운각 제자들이 모두 모여 이준이 있는 산봉우리로 조금씩 가까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약로를 비롯한 성운각의 고위 인사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준의 수련이 이렇게 엄청난 영향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 일로 인해 성운각 제자들 전체가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입가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준의 영혼 파동은 그 후로도 장장 보름 동안 성운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 하고도 16일째 되던 날, 온 하늘에 가득 퍼져있던 영혼의 파동이 빠르게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준의 수련이 거의 끝나간다는 신호였다.
* * *
그렇게 기다림 속에 이틀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준이 앉아 있는 밀실의 앞에는 수정처럼 빛나는 그의 분신이 앉아 있었다.
영혼의 근원은 이미 머리보다 작게 변해있었고, 그 안에서 느껴지던 끝없는 영혼의 파동도 꺼질 듯이 약해져 있었다.
“후…….”
수정 분신은 마치 조각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 굳게 닫혀 있던 입이 벌어지며 마지막 남은 영혼의 광단이 빠르게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쿵!
그 순간, 그림자의 몸이 강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눈을 찌르는 강한 빛이 터져 나오면서 엄청난 영혼의 힘의 파동이 폭풍처럼 하늘을 휩쓸었다.
꽈르릉!
은빛 번개가 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먹구름을 뚫고 대지 위로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성운각 주각에 앉아있던 약로와 장로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단계 최고급 수준에 이른 영혼의 힘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다.
“영혼만 해도 2성 투성과 맞먹는 실력이군.”
소연금탑의 대장로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옆에 있던 보람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용족은 인간보다 몇 배는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영혼의 힘은 인간보다 더 약했으니, 하늘 단계 최고급 수준에 달한 영혼의 힘을 느끼는 순간 인간들보다 몇 배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제 단계가 되면 영혼이 불멸한다 하였소. 물론 하늘단계 최고급과 황제 단계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지만……. 하늘 단계 최고급 수준의 영혼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투기 대륙 최고의 강자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지.”
약로가 감탄하듯 말했다.
“허허……. 하늘단계 최고급부터는 영혼의 힘으로 육체를 가진 강자와 전투를 벌일 수 있게 된다던데……. 정말 부러운 능력이구려.”
소연금탑의 대장로가 부러운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보통 이 수준에 이르지 못한 영혼은 전투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괜히 어설프게 영혼의 힘을 이용해 보려다가 영혼을 다치기라도 한다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떨어지고 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늘단계 최상급에 들어서는 순간 영혼은 또 다른 형태의 실체로 변화하게 되며, 그 실력은 본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즉, 영혼의 힘이 이 수준에 도달하면 사실상 또 하나의 자신이 생겨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만들어진 영혼 분신은 번개의 분신 같은 무투기로 만들어 낸 무투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힘을 자랑했다.
* * *
투명한 영혼이 물결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이준의 머릿속에 성운계 전체의 모습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그 뿐만 아니라 성운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의 실력은 물론이고 감정마저 읽어낼 수 있었다.
‘이게 바로 하늘단계 최고급의 힘인가…….’
영혼의 힘이 하늘단계 최고급 수준에 이르는 순간, 이준은 자신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준의 몸에서 퍼져 나온 무형의 파동이 성운계에 있는 수많은 강자들을 훑고 지나갔다. 예민한 영혼을 가진 강자들은 파동이 스쳐지나갈 때 피부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들을 제외하곤 투존 최고급 강자들조차 이준의 영혼의 힘이 자신들을 지나갔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
자신의 영혼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한 이준은 서서히 영혼파동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성운계 한구석에서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가 느껴졌다.
육체의 속도를 뛰어넘는 영혼파동은 단 몇 초 만에 열기가 느껴진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험준한 절벽이 높이 솟은 산들이 가득했다.
이준의 영혼 파동이 그 곳에 도착하기 무섭게 허공이 일그러지며 새하얀 빛 하나가 빠져 나왔다.
정체불명의 새하얀 빛과 접촉하는 순간, 타는듯한 고통이 이준의 영혼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건…….”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놀란 이준은 황급히 다섯 가지의 화염으로 자신의 영혼을 보호했다.
쾅쾅쾅!
그 순간, 고대 지도에서 나왔던 광단이 이준의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정화의 불꽃이 나오는 곳이야!”
오직 정화의 불꽃만이 이준의 머릿속에 조용히 잠들어있던 광단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으며, 다섯 개나 되는 천지의 불꽃으로 보호받고 있는 이준의 영혼에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할 수 있었다.
쾅!
잠시 후, 텅 빈 허공이 격렬하게 뒤흔들리며 엄청난 영혼 파동이 터져 나와 이준의 영혼과 충돌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과 맞닿는 순간, 이준은 돌연 눈앞이 캄캄해지며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냐!”
이준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영혼의 힘을 급히 거두어 들이며 소리쳤다. 이 정도 충격이 느껴질 정도라면 조금 전 자신을 공격한 영혼의 힘은 하늘 단계 최고급 수준에 이른 자신보다 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네가 바로 이족의 이준인가?”
감정 없는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누구십니까? 왜 저를 공격한 것 입니까?”
“인전에서 수집한 영혼의 근원을 전부 먹어치웠나 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하늘 단계 최상급일 리가 없지. 게다가 네 놈에게서는 그 이현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구나.”
감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이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영혼의 궁전의 전주(殿主)?”
“쯧쯧, 정화의 불꽃을 손에 넣은 후에 천천히 손을 봐주려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지금 네 놈을 잡아 들여야겠구나.”
허공에 또 다시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주위의 공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허공이 거세게 뒤흔들리며 수백 미터도 넘는 손이 나타나 이준의 영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혼멸생, 한참 어린 후배에게 참 비겁하구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나이 든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거대한 손이 나타나 전주의 손을 막아냈다. 두 개의 거대한 손이 맞부딪히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전주의 힘에 의해 동결되었던 공간이 산산이 부서졌다.
“자네도 정화의 불꽃을 탐내고 있었군.”
전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그저 네 놈들의 손에 넘어가게 둘 수 없었을 뿐이다.”
나이든 목소리가 담담하게 답했다.
“이곳을 떠나거라.”
다음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나이든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그의 영혼의 힘이 순식간에 본체로 빨려 들어갔다.
이준은 식은땀에 흥건히 젖은 채로 거친 숨을 들이마셨다.
* * *
한편, 성운각과 멀리 떨어진 평원에서는 소 한 마리가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소의 등 위에는 열 살 남짓한 아이 하나가 가만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맑은 눈망울에선 세상만물을 꿰뚫어 볼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전쟁을 피할 수 없겠구나.”
아이가 앳된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 * *
산봉우리 위.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이준이 굳은 얼굴로 숨을 골랐다. 설마하니 영혼의 궁전의 전주와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체 모를 강자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그의 손에 붙들려 영혼의 궁전으로 끌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전주의 실력이 보람이보다 강할 줄이야…….”
이준은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나저나 그 사람은 누구지? 왜 날 도와준 거지?”
하지만 전주를 만난 것 이상으로 이준을 놀라게 한 것은 정체불명의 강자의 엄청난 실력이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강자가 나타난 것일까?
“어찌됐든 날 도와주었다는 건 혼족 놈들과 적대 관계라는 소리인데…….”
이준의 눈이 반짝였다. 그 정체 모를 강자는 영혼의 궁전의 전주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주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대륙에서 감히 영혼의 궁전의 전주를 두려움에 떨게 할 존재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 강자의 정체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준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서북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에 느껴졌던 엄청난 열기로 보아 틀림없이 그 쪽에서 정화의 불꽃이 출현할 것이다.
‘그 공간이 이미 잘게 부서져 있는 것으로 보아 며칠 내로 정화의 불꽃이 출현할거야.’
정화의 불꽃에 대해 생각하자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절대로 전주를 이길 수 없었다. 유일한 희망은 정화의 불꽃을 손에 넣는 것뿐이었다.
그 사이 고대 지도 안에 들어있던 광단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잠해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하늘 단계 최고급 수준이 된 영혼의 힘으로도 광단 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정화의 불꽃에게 큰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아. 하지만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모르겠네…….’
광단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머리가 지끈 거렸다. 온갖 고생을 겪으며 지도조각을 모두 모았는데 얻은 것이라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광단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