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8화. 영혼의 근원
부전주가 도망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이준은 멍하니 그를 놓치고 말았다.
“빨리도 도망가네.”
부전주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이준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가 보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 보람이 이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다면 부전주의 손에 죽음을 맞았을지도 몰랐다.
“저렇게 부리나케 도망가니 나도 잡을 수가 없네.”
보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작정하고 달아나는 3성 고급 투성 강자를 잡는 것은 보람의 실력으로도 역부족이었다.
“됐어. 도망가게 놔 둬. 어차피 놈들도 조만간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장반지를 만졌다. 대천존도 잡고 바다의 불꽃도 얻었으니 부전주를 놓쳤다 해도 제법 괜찮은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영혼의 궁전의 중요 분전도 하나 박살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수확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네가 처리해 줘. 한 명도 빠짐없이.”
이준은 아라와 예린을 피해 사방으로 도망치는 영혼의 궁전의 강자들을 흘깃 바라본 뒤 약로와 백골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골 성자는 이미 반쯤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역시 반투성의 힘으로 투성인 약로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백골을 지켜보고 있어. 절대로 저 녀석을 달아나게 둬선 안돼.”
“응.”
보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번개처럼 몸을 날려 불과 1분 만에 영혼의 궁전의 강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준이 검은 송곳을 꺼내 강하게 내리치자 수백 미터가 넘는 화염폭풍이 터져 나와 대전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그러자 그 속에 감겨있던 쇠사슬과 영혼의 광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개가 넘는 영혼체들을 바라보던 이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곧이어 이준의 손에서 폭풍 같은 염력이 터져 나오며 새까만 쇠사슬을 모조리 박살내고 그 안에 있던 영혼들을 해방시켰다.
깨어난 영혼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모두 떠나시오. 다시는 놈들에게 잡히지 말고.”
눈물을 흘리는 영혼들을 바라보던 이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많은 영혼들은 이준을 향해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리고 나서야 공간장벽 밖으로 빠져 나갔다.
썰물처럼 그곳을 빠져나가는 영혼들을 바라보던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폐허가 된 대전의 깊은 곳에서 기이한 파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준은 빠르게 아래쪽으로 내려가 강한 힘으로 거대한 돌기둥을 모두 날려버렸다.
빠르게 땅을 파내려가자 순식간에 폐허 아래에 있던 거대한 구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구덩이 속에는 2미터 남짓의 작은 광단 하나가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는데, 수백 개에 달하는 검은 쇠사슬이 광단을 칭칭 옭아매고 있었다.
“이건…….”
이준은 눈썹을 찌푸린 채 광단을 주시했다. 광단 속에선 엄청난 영혼파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파동이었다. 이 정도로 순수한 영혼의 힘을 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건 영혼의 근원이다.”
그때, 이준의 등 뒤에서 약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혼의 근원이라…….”
이것이 무엇인지는 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생명의 근본인 영혼. 천지만물에는 모두 영혼이 있었으며, 그 영혼 깊은 곳에는 영혼의 근원이 존재했다. 영혼의 근원은 천지에서 가장 순수한 에너지로도 불렸다.
“이만한 크기의 영혼의 근원이라니……. 적어도 백만 개는 되는 영혼이 필요했을 텐데.”
약로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백만 개…….”
백만 개의 영혼을 모아 만들어진 영혼의 근원이라니, 생각만 해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많은 영혼의 근원을 모아 대체 뭘 하려는 생각일까요?”
한참동안 고민에 잠겨있던 이준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영혼의 근원을 사용하면 영혼의 힘을 향상시킬 수 있다. 수많은 영혼의 근원을 모은다면 전설 속에 존재하는 황제단계의 영혼이 될 수 있지.”
약로가 말했다.
“설마 혼족에서 영혼의 힘을 황제단계까지 수련하려는 자가 있는 것일까요?”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확신할 순 없다. 내가 잡혀있을 때, 놈들은 나의 연금술을 이용해 무언가를 하려 했다. 내 생각엔 놈들의 계획이 분명 이 영혼의 근원들과 관계가 있을 것 같구나.”
약로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혼족이 몰래 무언가 준비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영혼을 수집해 영혼의 근원을 모으는 것도 과정의 하나일 터였다.
“이 녀석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지난번 황천요성을 만났을 때, 그는 영혼이 황제단계가 된다고 투제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말했던 세상에 부족한 물건이 이 모든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물건’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설마 황천요성이 말한 그 물건이 영혼의 근원인가?’
“이건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이준은 영혼의 근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인전이 온갖 고생을 해가며 모은 이 물건들의 가치는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높을 것이 분명했다.
“무참히 살육당해 생겨난 이 영혼의 근원들은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물건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거 그냥 두고 갈 순 없으니 네가 가져가거라. 네 영혼도 이제 하늘 단계 상급에 달했으니 이것들을 흡수하면 최상급 상태까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정화의 불꽃을 구하는 데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게다.”
그의 제안에 이준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검은 쇠사슬이 모조리 부서지며 유백색의 광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들의 원한, 제가 풀어드리겠습니다.”
이준의 가벼운 한마디에 광단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듣는 것만 같은 반응이었다.
“천지영물도 인연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법. 영혼의 근원이 너를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다.”
죽은 것처럼 탁한 영혼의 근원에서 은은한 빛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약로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악랄한 놈들입니다.”
이준은 한숨을 쉬며 영혼 광단을 저장반지 속에 집어넣은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망친 부전주를 제외하면 인전에 있는 모든 강자가 죽임을 당한 상태였다.
“갑시다.”
영혼의 광단을 거두어들인 이준은 곧바로 산 밖을 향해 날아갔다. 약로 역시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빠른 속도로 이준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 후, 산봉우리 상공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공간을 뚫고 나타났다. 폐허가 되어버린 대전 밑에 구덩이가 파여 있는 것을 발견한 그의 낯빛이 빠르게 굳었다. 그의 눈에는 분노와 후회가 가득했다.
“우리가 백 년 동안 힘들게 모은 영혼을 전부 가져가다니, 이 일이 알려지면 나도 엄벌을 피할 수 없을 거야.”
그는 바로 조금 전 도망쳤던 혼전의 부전주였다. 텅 빈 대전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인전은 혼전에서 상당히 중요한 분전으로, 이곳에는 다른 곳보다 훨씬 더 강한 영혼들이 구금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강자들의 영혼을 모두 이준이 가져가버리고, 감금되어있던 영혼들 역시 모두 풀려나버렸으니,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빌어먹을. 그 용족 계집의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전주님 뿐일 터인데…….”
부전주가 후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벌레만도 못 했던 애송이 하나가 불과 십 년 만에 이렇게까지 성장해 영혼의 궁전을 위협하게 될 줄이야……. 진즉에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이 너무나 후회됐다.
“두 달 뒤 정화의 불꽃이 나오면 전주님도 분명 모습을 드러내시겠지. 정화의 불꽃만 있으면 오늘의 손실을 모두 메꿀 수 있을 것이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부전주는 무언가 결심한 듯 서서히 자리에서 사라졌다.
‘지난번, 정화의 불꽃 획득을 실패하면서 모든 계획이 미뤄졌지만 이번엔 반드시 정화의 불꽃을 손에 넣고 말리라.’
* * *
일주일 후, 영혼의 궁전 분전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날개라도 달린 듯 중주 전체에 퍼져 나갔다.
영혼의 궁전은 수많은 세력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원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그들을 건드리지 못 했다. 영혼의 궁전에 맞서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두가 영혼의 궁전의 강함을 알고 있었으니, 그들의 분전을 무너뜨린 천부연맹의 강함은 자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바깥세상이 분전의 몰락으로 시끄러운 사이, 이준은 성운각의 밀실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 손에 넣은 영혼의 근원을 흡수해야했기 때문이다.
현재 그의 영혼은 하늘단계 고급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약로보다도 한단계 높은 수준이었지만, 고급단계를 넘어 최고급 단계에 이르러야 전설 속의 ‘황제’단계에 오를 가능성이 있었다.
영혼이 황제단계가 된다고 곧장 투제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9성 투성 최고급 단계를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혼의 힘이 황제 단계에 이르러야 했다.
중주에서 하늘단계 최고급 수준의 영혼을 가진 사람은 베일에 둘러싸인 소연금탑의 선조와 고족, 혼족의 족장 등 많아 봐야 열을 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준도 그 대열에 이름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
* * *
성운계 안에 위치한 안개구름에 둘러싸인 산봉우리.
이준은 거대한 바위 위에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티 없이 깨끗한 광택을 발산하는 광단이 둥둥 떠 있었다. 광단의 빛이 주변으로 퍼지며 노랗게 시든 잡초에 다시 생기 넘치는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긴장한 눈빛으로 광단을 바라보던 이준이 그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자, 따스한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파란 빛이 맴도는 자갈색 화염을 피우자, 영혼의 광단이 천천히 일렁이며 그 안에서 새까만 안개 같은 것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영혼의 궁전의 강자가 주입해둔 기운이 틀림없었다. 만일 그 기운을 빼내지 않고 영혼의 광단을 흡수하려 했다면 이준의 영혼은 큰 상처를 입고 말았을 것이 분명했다.
“흥, 교활한 놈들…….”
화염이 다시 한 번 솟구쳐 오르자 광단 속에 숨어있던 검은 기운이 모조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검은 기운이 사라지며 영혼의 광단에서 더욱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30분이 지난 후, 이준은 천천히 화염을 거두고 수정처럼 맑게 빛나는 영혼의 광단을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수정처럼 맑은 빛을 발하는 영혼의 광단이 부르르 떨리며 순수한 영혼 에너지가 이준의 코와 입을 통해 빠르게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쏴아아!
물이 흐르는 듯한 맑은 소리와 함께 근원의 힘이 이준의 영혼 속으로 끊임없이 빨려 들어갔다. 순수한 에너지가 몸 안으로 흡수되자, 이준은 따뜻한 햇살 속에 풍덩 빠진 것처럼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며 이준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파동이 일렁이기 시작하며 산봉우리 전체에 깊은 적막이 내려 안았다. 거대한 영혼의 힘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모든 생물들이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쉭-.
얼마 지나지 않아 영혼의 파동을 느낀 성운각의 강자들이 속속 산봉우리로 날아왔다. 하지만 이준이 위치한 밀실과 가까워지자,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지며 온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한 성운각의 강자들을 허겁지겁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안개에 뒤덮인 높은 산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영혼의 힘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구려.”
그때, 약로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이준의 영혼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약로조차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약로는 이제 염력뿐 아니라 영혼의 힘에 있어서도 자신의 제자가 자신을 뛰어넘었음을 느꼈다.
“하늘단계 최고급 영혼은 우리 소연금탑에서도 수천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는데……. 약선, 정말 대단한 제자를 두었군 그래.”
소연금탑의 대장로가 부러운 눈빛으로 이준이 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역시 하늘 단계 고급 수준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백 년 동안 최고급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약로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연신 웃음을 지어댔다. 나날이 성장하는 이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