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5화. 영혼의 궁전의 움직임
“중주로 돌아가려고? 잘 됐네. 같이 가줄게.”
옆에 있던 보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도 간다고? 이제 막 전쟁이 끝났는데 자리를 비워도 되는거야?”
이준도 알고 있었다. 보람이 정화의 불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한다는 것을.
“괜찮아. 서 용왕과 남 용왕은 다리가 잘렸으니 실력을 회복하려면 제법 시간이 필요할거야. 동룡도의 일은 장로님들이 잘 해결해 주시겠지.”
보람이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이준에게 말했다.
“이번에 날 위해 이렇게 고생했는데, 나도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어?”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4성 투성인 보람이 함께 해준다면 정화의 불꽃을 손에 넣을 가능성이 곱절은 올라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언제 갈 거야?”
하지만 초롱초롱한 보람의 눈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이 녀석……. 그냥 놀러나가고 싶은 것 뿐인 것 같은데…….’
그러나 정화의 불꽃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준은 결국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녀를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별 일 없다면 곧바로 움직이자. 요명 족장님. 지옥 이무기족의 땅에 돌아가시면 채린이를 잘 보살펴 주십시오. 봉황족의 인질 중에서는 구봉을 먼저 풀어주시고요. 나머지 두 사람은 우선 동룡도에 두는 게 좋겠습니다. 삼대 고룡도가 완전히 몰락하고 나면 봉황족도 어쩔 도리가 없겠죠.”
이준이 요명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알겠소.”
요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인사 올리겠소. 조심히 돌아가시오.”
할 일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공간 통로를 만든 뒤 천천히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높푸른 하늘 위.
쉭!
잔잔한 물결이 갑자기 일렁이더니 새까만 균열 사이에서 네 개의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드디어 그 망할 고룡도에서 빠져 나왔어. 왜 그런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되네.”
신이 난 보람이 이제야 살겠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역시 이준의 예상대로 그녀는 단순히 고룡도를 벗어날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가자. 이미 연맹의 세력 범위 안에 들어왔으니 성운각까지는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이준은 사방을 둘러보며 방향을 맞춘 뒤 성운각이 위치한 곳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하지만 이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도시 안에 있는 건물들이 싸움에 의해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맹도 조용하진 않았나 보네.’
이준은 속력을 높여 번개처럼 빠르게 지평선 끝으로 사라졌다.
* * *
성운각.
주각의 대전 안에는 약로와 화운, 연금탑의 대장로 등이 모두 모여 어두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까지 300여 곳 이상의 도시가 공격을 받았소.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세력에서 공격해온 것 같지만 모두 영혼의 궁전 놈들이 섞여 있었소.”
약로가 천천히 대전 안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연금탑 쪽에서 온 소식에 따르면 최근 이런 습격이 더욱 잦아지고 있다고 하오. 그리고 습격을 당할 때마다 연금술사들이 사라지고 있소.”
“영혼의 궁전 놈들! 갈수록 미쳐 날뛰는구나!”
화운 선조의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옆에 있던 연금탑 대장로 역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맹에서 순찰대를 만들었으니 이런 일도 줄어들 것이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연맹에 동참하려던 중립 세력들이 줄어들고 있으니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소.”
약로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가?”
연금탑의 대장로가 약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들이 우리의 도시를 공격하는 순간, 우리도 곧바로 놈들의 분전을 칩시다.”
약로의 눈에 한기가 서렸다.
“뭐요?”
연금탐의 대장로와 화운이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천부연맹의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으나, 아직 영혼의 궁전과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강자들은 대부분 총부에 몰려 있으니, 분전의 방어력이 생각만큼 강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집중 공격한다면 놈들도 어찌할 수 없을 거요.”
약로가 말했다.
영혼의 궁전 뒤에는 혼족이 있지만 혼족은 지금 다른 세력들을 견제하느라 바빠 곧바로 천부연맹과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준의 손에 태령황제의 옥이 있으니, 혼족이 움직이는 순간 고족도 곧바로 행동을 개시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 아무리 영혼의 궁전이라 해도 모든 분전에 실력자들을 배치할 수는 없었다.
“스승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대전 안에 낯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준?”
“녀석, 드디어 왔구나. 잠깐, 네 기운이…….”
이준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화운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2성 투성!”
연금탑의 대장로는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6개월 만에 2성이 되어 돌아오다니……. 허허.”
약로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음을 지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준의 곁에 서있는 낯선 여인의 실력이었다.
보람의 실력을 눈치 챈 연금탑의 대장로와 화운은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약로가 겸손한 태도로 보람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디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약로의 태도에 보람이 멋쩍은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 보람이에요. 예전에 봤던 그 보람이요.”
“스승님, 보람이는 이제 용족의 용황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정화의 불꽃을 구하는 걸 도와주기 위해 직접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이준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용황?”
용황이라는 두 글자에 화운과 대장로는 완전히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용족은 중주에서 가장 베일에 가려진 존재로, 어지간히 견문이 넓은 강자라 해도 평생 한번 볼까말까 한 진귀한 종족이었다.
그런데 용족의 평범한 강자도 아니고 용황이라니! 화운과 대장로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허허, 용황의 후예를 몰라봤다니, 제가 무례를 범했군요.”
이준의 말에 멍하니 서있던 약로는 한껏 정중한 표정으로 보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약로의 그런 태도에 보람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러실 거 없어요. 그냥 예전처럼 대해주세요.”
이준 역시 보람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스승님. 그냥 서로 편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보다, 정확히 분전 중에 어떤 곳을 습격하실 생각이시죠? 정해둔 곳이 있으신 것 같은데…….”
본론으로 들어가자 약로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놈들에 대해 조사하면서 아주 많은 정보들을 얻었다. 영혼의 궁전 놈들은 중주에 수많은 분전을 두고 있는데, 그 중 스물네 곳이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힌다고 하더구나. 그놈들은 그런 분전을 지살전(地煞殿)이라고 부른다. 내가 구금되었던 분전(分殿) 역시 그 지살전들 중 하나였지.”
“지살전이라……. 그렇군요.”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명칭이었다.
“또, 지살전 위에는 천강전(天罡殿)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곳이 바로 혼전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지.”
약로가 말했다.
“천강전은 천, 지, 인 이렇게 세 분전으로 나뉜다. 천전은 혼전의 총부로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의 이번 목표는 바로 인전(人殿)이다.”
“인전의 실력은 어떻습니까?”
“지전(地殿)은 부전주의 관할이지만, 인전은 대천존(大天尊)과 이천존(二天尊)이 관리하고 있다. 물론 방어를 강화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삼 천존은 제 손에 죽었고, 이천존인 골수성자는 고급 반투성 실력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천존도 그리 위험하진 않겠네요.”
혼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준의 눈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인전 처리하는 일은 저에게 맡기십시오. 놈들의 습격에 대비해 화운 선배님과 같은 강자들은 이곳에 남아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준이 화운 선조와 연금탑 대장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함께 가겠다. 인전은 아주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어 지도가 있어도 찾기 힘들게다.”
약로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편하게 쉬고 있거라. 며칠 후에 출발하자꾸나.”
약로가 굳은 표정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와 이준은 오랫동안 영혼의 궁전에게 쫓겨 왔다. 하지만 이제 놈들에게 반격을 가할 때가 온 것이다.
* * *
“아빠.”
작은 발로 허공을 밟으며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이솔을 발견하는 순간, 이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빠, 엄마는요?”
이솔은 새까만 눈망울로 이준의 뒤를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채린을 찾는 것 같았다.
“하하. 엄마는 수련중이란다. 수련이 끝나면 솔이 보러 바로 오실 거야.”
이준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솔의 몸속을 마구 헤집던 에너지가 점점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을 느낀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몸속 에너지를 전부 제어하는데 성공했구나. 이제 너도 어엿한 투종이라고 할 수 있겠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20대에 투종이 된 것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 어린 것이 투종이라니…….
“허허, 솔이가 연금술에 관심이 많더구나. 조금 더 크면 불개를 전수해주고 마땅한 천지의 불꽃을 하나 찾아주려 한다.”
약로가 다정한 표정으로 이솔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스승님. 솔이를 아껴주시는 것에 대한 보답이라기에는 뭣하지만, 스승님을 위해 저도 선물을 하나 준비해 왔습니다.”
이준은 뒤편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보람에게 이솔을 넘기고는 곧바로 작은 옥병을 하나 꺼내들었다. 그 안에는 강한 파동을 퍼뜨리고 있는 금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이건?”
옥병 속에 든 액체를 보는 순간, 약로의 낯빛이 바뀌었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힘 때문이었다.
“투제가 될 뻔한 분이 남긴 피입니다.”
이준은 웃으며 약로에게 건넸다.
“이걸 드시면 빠르게 1성 투성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약로는 조심스레 옥병을 받아들곤 감격한 표정으로 한참동안이나 옥병 속을 들여다보았다.
“스승님이 그 피를 모두 흡수하시면 인전으로 향하죠.”
이준은 약로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보람과 이솔을 떠밀며 떠났다. 약로의 성격상 그 피를 흡수하지 않고 자신에게 돌려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약로는 씁쓸하게 웃으며 옥병을 손에 꽉 쥐었다.
* * *
그 후 며칠간 이준은 성운각에 머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틈틈이 자신의 무투기를 이솔에게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무엇을 가르쳐주든 막힘없이 습득하는 이솔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6일째 되는 날, 수련에 들어갔던 약로가 다시 이준 앞에 나타났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강한 기운에 이준은 약로가 1성 투성이 되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미 두텁게 쌓인 실력에 요성의 피를 더했으니, 1성 투성이 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 이었다.
약로가 투성으로 승급한 다음 날, 이준 일행은 곧바로 성운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왜 사라졌는지는 오로지 소수의 고위층 인사들만이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