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4화. 2성 투성
“빨리 가!”
서 용왕은 두려운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황급히 달아났다. 그의 곁에 있던 남 용왕 역시 잘린 팔을 뒤로 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반역자는 반드시 처단한다.”
냉담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보람이 천천히 도용검을 들어 서 용왕을 향해 휘둘렀다.
기이한 파동이 칼끝을 떠나 번개처럼 확산됐다.
그 순간, 서 용왕의 머리, 몸, 팔 전체에 기이한 광택을 발하는 용비늘이 겹겹이 돋아났다.
하지만 도용검에서 흘러나온 기이한 에너지는 몇 겹이나 돋아난 그의 비늘을 가볍게 부숴버렸다.
촤악!
서 용왕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더니 새빨간 피가 허공 위에 비산했다.
서 용왕의 몸에는 어깨부터 허리까지 기다란 상처가 나있었고, 금강석처럼 단단했던 용비늘은 두부처럼 갈라져 있었다.
“으아아악!”
처참한 비명소리가 서 용왕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뼛속 깊이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그는 온 몸을 덜덜 떨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서 용왕과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남 용왕의 손발이 빠르게 차가워졌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꿀꺽-.’
도용검이 가진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이준 역시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화련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그들의 몸을 단 한 번의 칼질만으로 갈라버리다니, 보람의 손에 들린 검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어서 도망쳐!”
남 용왕은 비명을 내지르며 용왕의 체면조차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쉭!
이준의 옆으로 날아온 보람은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그때, 보람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하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도용검이 보람이의 생명력을 빨아먹고 있잖아.’
깜짝 놀란 이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상대해주겠다!”
서 용왕과 남 용왕은 죽음의 공포가 전신을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이미 중상을 당한 그들의 몸으로는 도용검의 칼날에 스치기만 해도 그대로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결국 도망을 포기한 그들은 입을 크게 벌려 금빛 피를 뿜어냈다.
“용왕의 종(鐘)!”
두 용왕의 몸을 떠난 금빛 피는 빠르게 수십 미터나 되는 거대한 종(鐘)으로 변해 그들의 몸을 감쌌다.
챙!
거대한 종 위로 기이한 파동이 빠르게 날아와 강하게 부딪혔다.
다음 순간, 격렬한 파동이 거대한 종을 가르고 그 안에 서있는 두 용왕의 다리를 베어냈다.
“배신자들이 용왕의 힘을 쓰는 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나?”
보람은 차갑게 웃으며 주저 없이 도용검을 다시 한 번 들어올렸다.
“푸흡!”
하지만 검이 반 정도 올라갔을 때, 돌연 보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며 입에서 금빛 피가 터져 나왔다.
칼을 완전히 휘두르지는 못했지만 남은 파동이 빠르게 두 용왕을 향해 날아갔다. 중상을 입은 채 지쳐있는 두 사람은 겁에 질린 눈으로 점점 다가오는 파동을 바라봤다.
쉭!
그때, 줄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북 용왕이 나타나 두 사람의 어깨를 잡은 뒤 금색 피를 뿜어내며 공간을 가르고 사라졌다.
“……으아악!”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도망친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공간을 가르고 달아나도 도용검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삼대 용왕이……졌어.”
동룡도에 있던 다른 고룡도의 강자들은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보람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은 삼대 용왕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금색 장검이 사라지며 보람의 입에서 또 한 차례 금빛 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준은 황급히 다가가 그녀를 붙잡았다. 핏기 없는 보람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바늘로 심장을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 도용검을 사용하면서 소모한 것이 단순히 염력 뿐은 아닌 것 같았다.
“난 괜찮아…….”
이준의 품에 안긴 보람은 그를 바라보며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이준은 고개를 저으며 보람을 안은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준의 몸속도 정상은 아니었다. 심장에서 전해진 피의 힘으로 회복되지 않았다면 그 역시 몸조차 가누지 못했을 것이다.
“자, 먹어. 네가 좋아하는 단환이야.”
이준이 옥병 속에 있는 연금비약들을 꺼내 보람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아직도 그때 그 어린 앤 줄 알아?”
이준의 장난 섞인 말에 보람은 입술을 삐죽이며 연금비약을 모두 입에 털어 넣었다.
“용황 폐하!”
동룡도 장로들이 보람이 있는 곳으로 올라와 고개를 숙였다.
“대장로, 동룡도는 무사하지요?”
장로들을 보자 보람의 창백했던 얼굴에 조금씩 핏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고룡도는 괜찮습니다. 반역자 놈들 중 상당수가 도망갔지만 많은 동포들이 동룡도에 남기로 결정을 했사옵니다.”
대장로가 정중히 보고를 올렸다.
“첩자일 수도 있으니 당분간 그들을 잘 관찰하세요.”
“예. 그럼 삼대 용왕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대장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삼대 용왕이 살아있다면 전설의 용족을 통일시키는 데 큰 장애물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서 용왕과 남 용왕 모두 손발이 잘렸으니 회복한다고 해도 실력이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북 용왕 혼자선 해낼 수 없으니 우리도 휴식기를 가진 후 반격하도록 해요.”
보람의 보랏빛 눈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먹성 좋던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이렇게 무서운 여인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예!”
대장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 뒤 몸을 일으켰다.
보람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이준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
“용황의 힘이라는 거, 정말 무시무시한 걸.”
이준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그는 지금의 보람보다 먹성 좋고 천진난만했던 어린 보람이 더 좋았다.
“이번엔 정말 고마웠어. 네가 아니었다면 도용검을 소환할 시간을 벌 수 없었을 거야.”
“고맙긴.”
보람의 감사인사에 이준은 그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 *
그렇게 동룡도에서 일어난 대전은 동룡도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용황의 상징인 도용검이 등장하면서 보람의 신분을 믿지 못하던 수많은 삼대 고룡도의 강자들이 동룡도에 투항했다.
이제 삼대 고룡도는 그저 보람의 칼에 의해 멸망할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이준은 밀실을 찾아 들어가 곧바로 몸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이번 싸움에서 당한 부상이 너무 심해 후유증이 남는 것을 피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치료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 * *
조용한 밀실 안.
옅은 약향이 공기를 타고 맴도는 가운데 이준은 옥으로 다져진 석대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밀실 안에 있는 짙은 에너지가 서서히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밀실에 들어간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그 열흘간 이준의 몸은 천천히 회복되었지만 이준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평온한 얼굴과 다르게 그의 몸속은 조금도 조용하지 않았다.
쿵쾅쿵쾅!
심장이 뛸 때마다 자홍색 피가 몸 전체로 뻗어나갔고, 그 피가 혈관과 근육 사이를 흐를 때마다 전신이 불에 달군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준은 고통을 느끼기는커녕 갈수록 뼈와 근육이 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수련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심장 속에 있던 투제의 피가 저절로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이 자홍색 피가 왜 갑자기 몸속에 흐르기 시작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이준은 그저 온 정신을 집중해 주위의 에너지를 흡수했다. 자홍색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를 때마다 온 몸에서 힘이 넘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져 수련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이준의 염력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갔다.
* * *
이준이 수련에 들어간 지 자그마치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준은 무려 세 달을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밀실 안에 앉아 수련에 집중했다.
지금 이준의 피부는 혈관 속을 흐르는 자홍색 피로 인해 옅은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세 달이 지나자 이준의 피부뿐만 아니라 검은색 머리카락까지도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제 이준의 염력은 2성 투성까지 단 한걸음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이준이 밀실 안에 들어간 지 백일이 되는 순간, 조용한 밀실 안에서 물이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의 출처는 바로 이준의 몸속이었다.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만큼 커지자, 주위의 공기가 격렬하게 떨리며 거대한 회오리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펑!
회오리의 크기가 점점 자라나며 단단한 밀실을 부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찌르는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강렬한 파동을 느낀 수많은 강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밀실이 위치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정하고 다들 맡은 바 소임을 다하시오.”
그때, 용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보람과 아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황이 나타나자 용족의 강자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했더니, 승급 때문이었구나.”
보람이 회오리 속에 앉아있는 이준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1성 투성 초급에서 몇 개월 사이에 2성이 되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요명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그는 지난 세 달간 지옥이무기족의 땅과 동룡도를 몇 번이나 오갔지만, 대체로 동룡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마수계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용족과 교류할 기회를 얻었으니, 이번 기회에 봉황족을 누르고 마수계의 2인자로 자리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그 사이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했다.
쿵!
잠시 후, 거대한 에너지 폭풍 전체가 강하게 떨리더니 이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백일 만에 빛을 본 그의 두 눈에선 은은한 자홍색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늘 높이 쏘아진 자홍색빛을 보는 순간, 용족의 강자들은 마치 보람을 볼 때 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현재 이준의 피에는 이족의 피, 고족의 피, 그리고 용황의 피까지 총 세 가지 종류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때문에 용족의 강자들이 그에게서 용황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쾅!
이준이 앉아있던 석대가 그대로 산산조각나며 무시무시한 기운이 온 천지를 뒤덮었다.
“후…….”
이준이 고개를 들며 긴 숨을 내뱉자,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기운이 액체가 되어 부서진 석대 위에 떨어졌다. 그 신비한 액체에 닿는 순간, 가루가 되어버린 석대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며 엄청난 에너지파동이 사방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완벽한 전화위복이었다. 용왕들과의 목숨을 건 싸움 덕에 심장에 있는 피가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단기간 내에 2성 투성이 되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수면 상태에서 깨어난 후에도 자홍색 피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계속해서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하, 이준 군. 축하하오! 고작 세 달 만에 2성 투성이 되다니!”
하늘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요명의 목소리였다.
이준은 가까이 다가온 요명을 바라보며 가볍게 인사를 올린 뒤 보람을 바라보았다.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 보람의 모습에 이준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음을 지었다.
“나 얼마나 오랫동안 저 안에 있던 거야?”
“3개월 넘게. 오늘이 딱 100일이야.”
아라가 답했다.
“백일씩이나……. 연맹에선 소식이 있었어?”
“응. 며칠 전에 약로 선생님이 소식을 보내오셨어. 빨리 성운각으로 돌아오래.”
‘연맹’이라는 단어에 아라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정화의 불꽃이 나올 때가 됐어. 영혼의 궁전 놈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대.”
이어지는 아라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전이 조용히 있을 것이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정화의 불꽃과 같은 신물이 세상에 나타났는데, 움직이지 않을 녀석들이 아니었다.
“그럼 오늘 바로 성운각으로 떠나자.”
이준의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가득했다. 혼족 놈들이 어떻게 나온다 해도, 정화의 불꽃은 절대로 뺏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