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화. 요성의 피
제단 위에서는 채린을 비롯한 사람들이 오후 내내 받침돌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천요성의 석비는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요명 같은 강자조차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힘을 머금고 있었다. 그런 석비에 들어갔으니, 제 아무리 이준이라 해도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요명 족장님. 예전에 다른 강자들이 이 석비 안에 들어가면 보통 얼마나 걸렸습니까?”
잠시 후, 채린이 무거운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보통 30분도 버티지 못했소. 하지만 이준 군의 영혼은 다른 이보다 훨씬 강하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
요명의 말에 채린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이준이 무사하게 나오기를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무거운 정적 속에 30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때, 석비에서 강렬한 빛이 번쩍이더니 영혼의 힘이 빠르게 빠져 나와 받침돌 위에 앉아있는 청년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콜록…….”
그와 동시에 돌받침 위에 앉아있던 이준이 두 눈을 번쩍 뜨며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창백해진 낯빛으로 보아 황천의 분노로 인해 영혼에 적잖은 타격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이준. 괜찮아?”
채린, 아라, 예린이 깜짝 놀라 다급히 달려오며 물었다.
“괜찮아, 황천요성의 영혼은 역시 대단했어. 영혼만 남았는데도 그 정도 힘이라니…….”
이준이 걱정 말라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이준 군. 당신도 그 영혼을 처치하지 못하였소?”
요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겨우 이기긴 했지만 석비 안에 있던 영혼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쾅!
바로 그때, 앞에 있던 석비에서 굉음이 터져 나오며 손가락과 주먹의 인결이 새겨져있던 석비 위에 입모양이 생겨나더니 기이한 파동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황천의 분노!”
요명은 기쁨에 찬 얼굴로 곧장 영혼의 힘을 끌어내 그 파동을 만지려 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이 입모양에 닿는 순간, 그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쿨럭! 난 아직 황천의 분노를 수련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하나 보오.”
섣불리 황천요성의 최강 무투기를 손에 넣으려다 실패한 요명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영혼이 사라졌는데도 아직도 이런 위력을 갖고 있다니……. 과연 투제의 벽에 닿았던 강자는 다르긴 다른 모양이오.”
이준이 영혼을 치료해주는 연금비약을 저장반지에서 꺼내 입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조급할 필요 없습니다. 황천의 분노 수련법이 이미 석비 위에 새겨졌으니 조건이 갖춰졌을 때 수련하시면 되지요.”
“난 이미 2성 투성 상급에 접어들었소. 이 실력으로도 수련을 할 수 없는데, 얼마나 더 오래 걸려야 익힐 수 있는지 모르겠소.”
요명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다가 말했다.
“이준 군, 석비 안에 있던 영혼도 무찔렀다면 요성의 피도 얻었겠구려.”
“걱정 마십시오. 본래 지옥 이무기족의 것을 혼자 독차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본 이준이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시오. 이준 군이 목숨 바쳐 가져온 물건을 나눠가지는 것만으로도 고맙소.”
요명은 멋쩍은 듯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준이 웃으며 황금색 액체를 꺼내자, 액체 속에 들어있는 방대한 양의 에너지가 퍼져 나오며 천지의 에너지가 마구 들끓기 시작했다.
“요명 족장님. 채린, 아라, 예린에게도 나누어 주어도 괜찮을까요?”
이준이 황금색 액체를 손에 쥐며 물었다. 9성 투존 등급인 세 여자는 저마다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반투성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투제가 될 뻔했던 황천요성의 피가 있다면 그녀들도 빠르게 반투성이 될 수 있었다.
“허허. 물론이지요.”
요명은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원스러운 반응에 이준 역시 흡족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황금색 액체가 네 등분으로 나뉘어 요명, 채린, 아라, 예린에게 날아갔다.
사실 이준에게는 그 한 방울을 제외하고도 저장반지 속에 아직 두 방울의 피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스승인 약로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하하. 요성의 피가 있으면 나도 3년 안에 3성 투성이 될 가능성이 있겠구려.”
요명은 환하게 웃으며 요성의 피를 자신의 저장반지 속에 소중히 넣었다.
“요명 족장님. 이번에 지옥 이무기족을 찾아오게 된 것은 사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였습니다.
“괜찮소. 마음 편히 이야기 하시오. 생명을 구해준 것뿐 아니라 비석 문제까지 해결해 주었는데, 족장 자리를 내놓으라 해도 받아들이겠소.”
요명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족장은 됐습니다…….”
이준은 웃음을 서서히 거두고 전설의 용족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용족이 내분을 일으키다니……. 참으로 놀랍군요. 그런 일이 일어날 조짐이 야 예전부터 보이기는 했지만…….”
이준의 말에 요명이 조금 놀란 듯 중얼거렸다.
“세 개의 고룡도에서 거래를 해왔다면 요소천 성격에 분명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오. 하지만 지금은 족장이 바뀌었으니 걱정 마시오. 지옥 이무기족은 절대 그들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니.”
요명이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세 개의 고룡도가 이기면 모르겠지만, 지는 순간 지옥이무기족의 미래 역시 위태로워질 것이 뻔했다. 그리고 요명이 생각하기에 전설의 용황이 등장한 이상 세 개의 고룡도가 손을 잡았다 해도 크게 승산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에 요명은 크게 고민할 것도 없이 흔쾌히 이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허나 우리가 끼어들지 않는다 해도 하늘 봉황족은 분명 그들을 도울 것이오.”
요명의 말에 이준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옥 이무기족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던 것도 천운이 따라주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 봉황족까지 설득시킨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그들이 어떻게든 끼어들겠다고 한다면 우리도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지요.”
이준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이대로 보람이 죽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허허, 뭐 준비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쪽에서 강자들이 출발했을 때, 중간에서 그들을 죽여 버려야지요.”
이준은 살기 어린 눈빛을 띠며 말했다.
“하지만 이 일도 요명 족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순간 요명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만일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하늘 봉황족과 영원히 등을 돌리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번 일이 해결된다면 앞으로 용족과 지옥 이무기족이 동맹을 맺을 수 있도록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럼 마수계는 이제 3대 종족이 아니라 2대 종족이 통치하게 되겠지요.”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요명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3대 종족이라고는 하나 용족의 힘은 나머지 두 종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했다. 만일 통일된 용족과 손을 잡게 된다면 정말로 하늘 봉황족을 마수계의 3대 세력의 지위에서 끌어내리게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참을 침묵하던 요명은 고개를 들고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준 군이 정말 그렇게 해준다고 약속한다면……. 믿어보는 것도 좋겠지요.”
“요명 족장님, 걱정 마십시오. 용황은 반드시 저의 부탁을 들어줄 것입니다.”
이준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좋소. 그 동안 강자들을 보내 봉황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소. 강자들이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곧바로 이준 군에게 알려주겠소.”
요명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용황을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저희는 한 동안 이곳에 머무르면서 지옥 호수를 좀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이준이 채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허허. 좋을대로 하십시오. 허나 지옥 호수의 한기는 보통이 아니니 조심하시오.”
“예.”
“석비 일도 모두 해결되었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야겠소. 봉황족을 상대하려면 준비가 필요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니.”
말을 마친 요명은 손을 크게 휘저은 후 빠르게 지맥 밖으로 날아갔다.
* * *
지옥 이무기족으로 돌아온 요명은 빠르게 전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준 일행은 하루 동안 휴식의 시간을 가지고 이튿날 다시 지옥 호수로 돌아왔다.
“지옥호수 속에 있는 한기는 평범한 강자들에게는 치명적인 독과 같지만, 칠색 이무기에겐 보약과도 같지. 너라면 저 안에 있는 에너지를 마음껏 흡수할 수 있을 거야.”
이준이 고개를 돌려 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마.”
채린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강한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옥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건 9레벨 보물비약인 보리대환단이야. 반투성으로 승급할 수 있는 성공률을 상승시켜줘. 결정적인 순간에 이걸 먹어.”
이준이 채린을 향해 옥병을 건네며 말했다. 그녀 역시 굳이 거절하지 않고 보리대환단을 받아들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내가 이곳을 떠날 일이 있으면 사람을 불러 널 지킬 테니 걱정 마.”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채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족을 돕는 것은 장차 혼족에 맞서 전쟁을 벌일 천부연맹과 이준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으니, 이준이 직접 나서서 손을 쓰는 것이 당연했다.
“조심해.”
짤막한 그녀의 한마디에 이준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하기 짝이 없는 메두사 여왕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쏴아아-!
곧이어 지옥호수의 물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거품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호수의 모든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지옥 호수로 들어간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준은 한숨을 내쉬며 근처의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봉황족의 강자들과 일전을 치르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한시도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황천의 손가락, 황천의 주먹, 황천의 분노……. 모두 황천요성이 직접 가르쳐 주었으니 단순히 석비에 들어있는 정보로 익힌 것과는 틀림없이 뭔가 다를거야.’
이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황천요성이 직접 일깨워 준 수련법을 차분하게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요성의 피에는 황천요성의 힘이 담겨있으니 이걸 흡수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생각을 마친 이준이 황금색 액체 한방울을 꺼내 손 위에 올려놓는 순간, 주위에 있던 천지의 에너지가 격렬하게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요성의 피야…….”
이준은 벅차오르는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이렇게 주위의 에너지가 반응을 보일 정도로 강렬한 힘이 담긴 보물이라니……. 이 피를 흡수하면 얼마나 실력이 상승할지 상상만 해도 온 몸이 짜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우선 연소부터 시켜야겠어.”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자갈색 화염이 천천히 황금색 액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후 장장 3시간에 걸쳐 황천요성의 피를 연소시켰지만, 황금색 피는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과연 투성 최고급 강자의 피다운 힘이었다.
다시 4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준은 조심스럽게 황금색 액체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쿵!
황금색 피가 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폭발하며 가까이 있던 바위들이 모조리 부서지고 말았다.
곧이어 미쳐 날뛰는 마수와도 같은 에너지가 이준의 온 몸 구석구석을 헤집었다.
피의 에너지는 이준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난폭하고, 강력했다. 만일 실력이 부족한 자가 함부로 이 피에 손을 댄다면 실력이 강해지기는커녕 몸이 폭발해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투성이 된 이준에게 이 정도 에너지를 통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피에 담긴 힘을 갈무리하자, 야생마처럼 사방으로 날뛰던 에너지가 빠르게 안정을 되찾으며 이준의 사지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