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화. 영혼과의 결투
지옥 이무기족의 족장이 교체되면서 크고 작은 분란이 생겨났지만, 이준 일행은 그들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다른 종족의 일에 끼어들면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밤 동안 지속되었던 혼란은 동이 트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하늘 전체가 푸른빛을 띠기 시작할 무렵, 요명은 이준 일행이 묵고 있는 방 앞에 나타났다.
곧바로 뒷산을 향해 출발한 이준 일행은 10분 만에 오래된 제단 앞에 도착했다.
웅장한 느낌의 제단은 청색의 거대한 바위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꼭대기에 서면 주변에 있는 산봉우리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제단 중앙에는 백 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노란색 석비가 세워져있었는데, 외롭게 우뚝 선 석비에서는 고대의 기운이 끊임없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이게 바로 전설 속의 황천석비인가…….”
이준은 고개를 들어 거대한 석비를 올려다보았다. 석비 위에는 기묘한 문양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또 그 위에서는 거대한 손가락과 인결이 새겨진 채 이상한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바로 황천의 손가락과 황천의 주먹의 수련법인 것 같았다.
요명은 석비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올린 후 서서히 물러나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바로 지옥 이무기족의 황천석비요. 황천의 분노와 요성의 피는 저 안에 들어 있소. 이제 저것들을 얻을 수 있는지는 이준 군의 손에 달려있소.”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석비를 바라보았다. 석비에서는 영혼을 짓누르는 강한 압박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아있는 영혼의 힘만으로도 이렇게 강한 위압감을 뿜어낼 수 있다니…….대체 얼마나 대단한 강자였던 거야.’
“예전에 나도 석비 안에 있는 황천의 분노의 수련법과 요성의 피를 얻으려 시도한 적이 있는데, 영혼이 석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피를 토하며 쓰러졌소. 그 이후로 몸을 회복하기까지 장장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지.”
요명은 두려운 눈빛으로 석비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 때보다 훨씬 강해졌지만, 다시 시도해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것 같소.”
“과연 투제의 문턱까지 다다랐던 사람은 다르군요.”
이준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소? 이준 군, 자신 있는가?”
“자신은 없지만 한 번 해보고 싶네요.”
이준이 석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황천요성이 상대라면 감히 덤벼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만, 석비에는 그의 영혼 중 일부만이 남아있으니 한번 부딪쳐 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럼 이준 군에게 모든 걸 맡기겠소.”
요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바로 빠져나오시오.”
“예.”
이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석비 정면에 있는 받침돌 위로 올라가 앉았다. 잠시 후, 그의 미간에 머물러있던 영혼의 힘이 서서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동안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이준의 몸이 강하게 떨리더니 흐릿한 형상이 그의 미간에서 빠져나와 석비 앞에 우뚝 섰다.
영혼과 본체의 모습이 거의 다르지 않은 이준의 모습에 요명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현재 투기대륙에는 영혼의 힘을 수련하는 강자들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는 영혼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특별한 무투기가 없는 이상 다른 강자와의 대결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영혼을 단련하는 것에는 염력을 키우는 것 이상으로 많은 힘과 시간이 필요하니, 대부분의 강자들이 영혼의 힘을 단련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때문에 현재 투기 대륙에는 이준처럼 영혼을 실체와 비슷한 형체로 만들 수 있는 강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만히 선채 한참동안이나 석비를 바라보던 이준이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석비에 손을 내밀었다.
치익!
그 순간, 석비 표면에서 액체 같이 둥근 파동이 퍼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준의 영혼이 마치 빨려 들어가듯 석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콰르릉!
하늘 위에서 굉음과 함께 새파란 빛줄기가 쏟아지며 온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준이 놀란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석비 안에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다니……. 진정한 투제가 되지 못한 황천요성도 이 정도인데, 진짜 투제의 힘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그가 앞으로 발을 뻗기 무섭게 거대한 번개가 마치 살아있는 짐승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번개가 이준의 몸 주위에 닿는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번개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쿵!
얼마 지나지 않아 번개가 상대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서서히 물러났다. 천둥소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이준의 머리 위에 갑자기 황토색 구름이 몰려들더니 강력한 바람이 천지를 가르며 그를 힘껏 누르기 시작했다.
‘황천의 손가락…….’
고개를 들어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거대한 손가락을 바라보던 이준은 지체 없이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그러자 방대한 영혼의 힘이 솟아나면서 거대한 손가락과 강하게 부딪쳤다.
쾅!
두 힘이 맞부딪히는 순간, 거대한 손가락이 그대로 붕괴되며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황천의 손가락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땅에서 거대한 손이 빠르게 솟아올라 이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준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가볍게 영혼의 힘을 폭발시켜 자신을 공격한 손을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황천요성. 모습을 드러내십시오. 이런 걸로 날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황천의 주먹까지 없애버린 이준이 다시 하늘 위에 나타나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콰르릉!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의 땅이 갈라지더니 거대한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났다. 산봉우리 위에는 황색 가죽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이곳은 네가 올 곳이 아니다. 돌아가거라.”
무덤덤한 목소리에는 영혼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러나 이준은 겁을 먹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당신이 예전에는 온 천하를 호령하는 강자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억지로 세상에 남아있는 영혼일 뿐입니다.”
“허, 새파란 애송이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노인이 눈을 뜨자, 강력한 영혼파동이 날카로운 검처럼 이준을 향해 날아왔다.
“별 거 없네.”
하지만 이준은 피식 웃으며 피하지도 않고 가볍게 손을 휘둘러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황천의 분노의 수련법과 당신의 피를 넘기면 바로 물러나겠습니다.”
“네게 그럴만한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분노한 황천요성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산봉우리 주위의 공간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단계 상급 영혼이라……. 내가 봐왔던 영혼 중 가장 강하구나. 하지만 내 영혼의 힘은 이미 황제의 단계에 이르렀다. 네 놈 따위가 내 상대가 될 것이라 생각하느냐?”
“황제 단계?”
황제 단계의 영혼이라는 말에 이준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이준이 알기로 현재 투기 대륙의 그 어떤 강자도 그만한 영혼의 힘을 가지고 있지 못 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이준이 아니었다.
“당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면 틀림없이 나는 상대도 되지 못 했겠지. 하지만 지금 당신은 한낱 영혼에 불과해!”
정신을 집중한 이준이 천천히 숨을 내쉬며 앞으로 발을 내딛자, 그의 몸이 순식간에 황금빛으로 뒤덮이며 몇 배는 크게 자라났다.
“건방지구나!”
자신을 상대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이준의 모습에 황천요성은 더욱 분노한 듯 주먹을 휘둘러 허공을 내리쳤다.
다음 순간, 무시무시한 힘이 천지를 뒤덮으며 무수히 많은 주먹들이 나타나 금강유리체로 변한 이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준이 입을 벌려 자갈색의 화염을 뱉어내자, 거대한 주먹들이 한순간에 안개처럼 사라졌다.
“천지의 불꽃!?”
황천요성의 낯빛이 빠르게 바뀌더니 해일과도 같은 음파가 터져 나오며 하늘과 땅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황천의 분노…….”
하늘을 뒤덮은 무시무시한 파동에 이준의 얼굴 역시 빠르게 굳어졌다.
지금, 수많은 투성 강자를 무덤으로 보낸 무투기가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공간이 쉬지 않고 격렬하게 요동치고, 이내 천 미터가 넘는 황천요성의 허상이 나타났다.
산처럼 거대해진 황천요성이 천천히 입을 벌리는 순간, 무형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쾅쾅!
황천요성의 입에서 튀어나온 음파는 눈 깜짝할 새에 황금색 거인으로 변한 이준의 코앞까지 날아들었다.
음파가 지나간 곳에 있던 모든 것이 먼지로 변해버리고, 오직 황천요성이 앉아있던 산봉우리만이 남았다. 하지만 이번 공격으로 꽤 많은 힘을 소모한 듯, 황천요성의 영혼 역시 눈에 띄게 흐릿해져 있었다.
“황천의 분노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하지만 황천요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갈색 화염에 뒤덮인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황천요성의 영혼이 조금 놀란 눈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흥, 천지의 불꽃 덕에 목숨은 건졌구나.”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준을 공격할 생각이 없는 듯 거대한 산봉우리 꼭대기에 위치한 바위 위에 앉으며 웃음을 지었다.
“정말 이런 날이 오다니.”
“선배님. 전 그저 황천의 분노의 수련법과 요성의 피가 필요할 뿐입니다. 다른 속셈은 없습니다.”
“흥, 좋아. 내 최고의 무투기인 황천의 분노를 견뎌냈으니 상을 내려야겠지.”
말을 마친 황천요성은 곧바로 손가락을 튕겨 영혼의 파동을 날려 보냈다.
그 파동에 손을 대자, 엄청난 양의 문자가 홍수처럼 이준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잠시 후, 황천요성이 날린 영혼의 파동 속에 들어있던 정보를 모두 흡수한 이준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보낸 영혼 파동 속에는 황천의 분노 뿐 아니라 황천의 주먹과 황천의 손가락의 수련법까지 들어있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됐다. 어차피 이곳에 계속해서 남아있었던 것은 언젠가 내 무투기들을 전수받을만한 후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내 필생의 무투기를 모두 이어받을 자가 나타났으니 이제 여한 없이 떠날 수 있겠구나.”
말을 마친 황천요성이 가볍게 손을 젓자, 그의 영혼에서 흐릿한 금색 액체가 흘러나와 이준에게로 날아갔다.
황금색 액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이준은 자신의 피의 힘이 격렬하게 들썩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게 바로 황천요성의 피인가…….’
“휴, 영혼의 힘마저 전설 속의 황제단계에 올라섰건만, 결국 마지막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황천요성이 손에 들린 황금색 액체를 만지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선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다.
“투제가 되는 과정에서 큰 변수가 생겼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투제가 되셨겠지요.”
이준이 말했다.
“허허, 투제라……. 그게 그렇게 쉽겠느냐. 투제는 앞으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존재다.”
황천요성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왜죠?”
이준의 물음에 황천요성은 무언가 생각난 듯 눈썹을 찌푸린 채 한참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세계엔 뭔가가 부족해…….”
“그게 뭡니까?”
이준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황천요성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확실히 모르겠구나. 지금의 나는 그저 영혼에 불과해 너무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구나…….”
황천요성은 또다시 긴 한숨을 내뱉은 뒤 자신의 손에 있는 황금색 액체를 이준에게 날려보냈다.
“이곳까지 온 것은 운명이오, 황천의 분노를 얻는 것은 네 능력이다. 황천의 힘은 결코 평범한 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너는 자격을 갖췄으니, 이 힘을 너에게 물려주마.”
황금색 액체가 손에 닿는 순간, 이준은 자신의 피가 빠르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준이 감사 인사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산봉우리가 무너져 내리며 황천요성이 앉아있던 바위가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곧이어 황천요성의 영혼 역시 빠르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됐다. 그저 내가 만든 무투기들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이 무투기들을 완벽하게 익혀내도록 하겠습니다.”
이준은 황천요성을 향해 다시 한번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황금색 액체를 이준에게 건네주는 순간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그의 영혼이 이곳에 남아있을 수 있던 것 역시 투성 강자의 피 덕분인 것 같았다.
“허허…….”
이준의 감사인사에 황천요성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