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3화. 요명
‘도대체 얼마나 깊은 거야.’
이준은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투성의 속도로 한참을 내려왔건만, 아직도 호수의 바닥이 보이질 않았다.
스스-!
그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물살이 급격히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쿠웅!
이준은 곧바로 몸을 돌려 주먹을 날렸다. 무시무시한 힘이 그대로 물살을 반대로 가르며 갑자기 나타난 검은 그림자와 거세게 부딪혔다.
“이런 곳에 생명체가 있다니…….”
사방으로 퍼진 핏물을 보며 이준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스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검은 그림자의 주위에서 다시 물살이 일렁이더니 시꺼먼 안개가 퍼져 나왔다.
이준의 표정이 빠르게 변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괴생명체는 뱀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전신에는 단단한 검은 비늘이 빼곡하게 뒤덮여 있었다.
“쉭쉭!
모습을 드러낸 요괴뱀이 입을 벌리자, 수백 개가 넘는 검은색 물줄기가 화살처럼 이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물줄기에 담긴 섬뜩한 한기와 힘을 느낀 이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이준의 머릿속에 가람 아카데미의 지하에 있던 용암세계가 생각났다. 그 안에는 다른 곳에서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기이한 생물들이 가득했었다.
‘젠장, 저놈에게 발목을 묶였다가 염력이 바닥나기라도 하는 날이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는 순간, 이준은 번개처럼 물살을 가르며 더욱 아래 쪽으로 내려가 몸을 숨겼다.
검은 뱀 역시 이준의 뒤를 따라 쏜살같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그 괴상한 뱀은 거머리처럼 이준의 뒤를 따라붙었다.
상대를 떼어낼 수 없다고 판단한 이준은 자갈색 화염을 손에 모아 뒤편으로 날려보냈다.
끼기긱!
이준의 손을 떠난 화염이 놈이 쏘아낸 날카로운 물줄기를 증발시키며 빠르게 날아갔다.
끼이-!
계속해서 이준의 뒤를 쫓아오던 뱀은 자갈색의 화염의 열기에 겁을 먹은 듯 더 이상 달려들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연신 물줄기를 뿜어냈다.
‘젠장, 저 물줄기의 위력이 보통이 아니야. 반투성이라 해도 막아내기 어려운 수준이겠는걸.’
간신히 검은 뱀을 따돌리는데 성공한 이준은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래 쪽을 바라보았다.
아래 쪽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옅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기이한 빛을 발견한 이준은 곧바로 속도를 높여 호수의 더욱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아래로 내려가기를 한참, 마침내 그의 발이 호수의 바닥에 닿았다.
“이곳이 지옥 이무기 호수의 끝인가?”
호수의 바닥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모래사장과 바위 파편만이 가득했다. 그가 발견한 기이한 빛의 정체는 바로 그 바위 파편들이 내뿜는 빛이었다.
“이곳은 분명 더 깊은 지하와 연결되어있을 거야. 하지만 그곳까지 들어가기 전에 내가 얼어 죽을 것 같은데…….”
온 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낀 이준은 서둘러 천지의 불꽃의 온도를 높이며 황천의 결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황천의 결정은커녕 결정 부스러기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설마 전부 지옥이무기족이 가져간 건가?’
한참을 찾아봐도 보이지 않자 이준의 표정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으……살려……주시오…….”
그때, 다 죽어가는 목소리 하나가 물살을 타고 이준의 귓가에 들려왔다.
“누구냐!”
화들짝 놀란 이준은 황급히 염력을 터뜨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곳에 어떻게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소리는 마치 환청을 들었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잘못 들었나?’
바로 그때, 그의 발밑에 있던 모래가 강하게 뒤흔들리며 그 아래 묻혀있던 백미터도 넘는 기다란 쇠사슬이 나타났다.
조심스럽게 쇠사슬을 당겨보자 반대편 지면이 흔들리며 세 개의 쇠사슬이 더 나타났다. 그 쇠사슬들은 모두 주변에 있는 거대한 산에 묶여있어 아무리 힘껏 당겨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네 개의 사슬이 교차되는 지점에는 새까만 진흙 덩어리가 고여 있었다.
이준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사방으로 진흙이 튀며 그 아래 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옥 이무기의 호수 바닥에 묻혀있던 것은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의 투성 강자였다.
‘투성 강자잖아? 3성, 아니 그 이상이야! 어떻게 여기에 묶여있는 거지……!’
“살려주시오……살려줘……날 살려주면 당신을 지옥이무기족의 주인으로 모시겠소…….”
이준을 발견한 투성 강자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미친 듯이 절규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이나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정체불명의 투성 강자를 바라보던 이준은 상대가 자신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왜 여기에 묶여있죠?”
“후욱……후욱…….”
사슬에 묶인 기이한 강자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을 쳐댔다.
그 순간 이준은 사방에 널린 쇠사슬에서 음산한 에너지가 전해지면서 그의 염력을 얼려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생명을 앗아갈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태로 살아남아 있는 것 같았다.
‘누가 이런 짓을……. 한 번에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하잖아.’
“난 지옥이무기족의 족장, 요명이라 하오……. 구해주시오! 구해만 준다면 무슨 요구든 다 들어주겠소.”
자신을 요명이라 소개한 강자가 간절한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옥이무기족의 족장? 제가 알기로는 요소천이라는 자가 지옥이무기의 족장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악랄한 놈이 내 자리를 빼앗아 나를 이곳에 가둔 지 수백 년이 지났소.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복수하고 말 것이오!”
‘요소천’이라는 세 글자에 요명이라는 자의 눈에는 시뻘겋게 핏대가 섰다.
이준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수백 년 동안 이런 곳에 봉인되어 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한기가 몸속에 스며들 때마다 칼로 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 끊이지 않을 텐데, 상상만 해도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요소천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난 요소천의 친형이오.”
요명이 쉰 목소리로 힘겹게 운을 뗐다.
“본래 지옥이무기족의 수장이 되는 것은 나였쇼. 장로들 역시 내 편이었기 때문에 그놈이 족장이 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소. 그걸 알고 있던 그는 나를 따르는 척 하다가 몰래 독을 타 힘을 빼놓은 뒤 나를 공격해 이곳에 날 가둔 것이오.”
“왜 죽이지 않고 이곳에 가둔 겁니까? 그게 더 쉬울 텐데요.”
“그렇게 쉽게 죽게 놔두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요명의 목소리에서는 깊은 회한과 증오가 묻어났다.
“하지만 내가 당신을 도와준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이미 요소천은 지옥이무기의 족장으로 수많은 장로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는 지옥의 지팡이가 있소. 이건 지옥이무기 족장의 신물로, 이게 있어야만 진짜 족장이 될 수 있소. 내가 여기서 벗어나 요소천만 처치한다면 내가 바로 새로운 족장이 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장로들도 모두 나의 편으로 돌아설 것이오.”
“지금 당신의 실력은 어떻게 됩니까? 요소천은요?”
“봉인 될 당시 나는 중급 반투성이었소.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이곳에 갇혀 여러 고초에 시달린 덕분에 2성 투성이 되었지. 날 구해준다면 금방 염력을 되찾아 최상의 상태가 될 것이오.”
요명이 말했다.
“내가 반투성일 때 요소천의 실력은 투존 최고급 밖에 되지 않았소. 아마 지금은 1성 투성이 되었을 것이오. 하지만 그의 오른팔인 지옥이무기족의 대장로는 1성 최고급 수준의 강자요. 그 망할 영감이 요소천과 함께 날 이곳에 가두었지.”
“1성 투성이 두 명이라는 말입니까?”
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옥이무기족에는 자그마치 셋이나 되는 투성강자가 있는 셈이었다. 과연 마수계의 3대 세력으로 손꼽히는 세력다운 실력이었다.
“나의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그 두 사람이오. 그 두 녀석만 없애면 나는 다시 지옥 이무기족의 족장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날 구해준다면 그 은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갚겠소.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소. 제발.”
요명은 애절한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준은 아무 말 없이 주먹을 쥐었다. 삼대 고룡도가 보람을 노린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어떻게든 지옥이무기와의 동맹을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투성이 됐다고는 하나 지옥이무기족에 혼자 맞서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기 때문이다.
요소천의 명성은 이준도 들어본 적 있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악행도 서슴지 않는 사람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그런 녀석이 북룡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요명이 지옥이무기족의 수장이 된다면, 자연스레 삼대 고룡도와 지옥 이무기족의 연합을 끊어낼 수 있었다.
“아직 믿을 수 없습니다.”
이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요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쌍하기는 했지만, 그를 구해줬다가 뒤통수라도 맞게 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이준의 말에 요명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지만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믿어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을 구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게다가 족장의 자리를 찾는 것을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준은 눈을 반짝이며 요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직접 영혼을 꺼내 당신의 영혼에 영혼 인결을 새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만일 날 속이면 곧바로 영혼 인결을 폭파시킬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투성 강자라 해도 다시는 실력을 되찾을 수 없게 되겠지요.”
이준의 말에 요명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지금 이 말은 그의 목숨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해야만 믿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싫다면 전 곧바로 떠나겠습니다. 저도 여기에 드러눕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요명은 이를 꽉 깨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어떤 가혹한 조건이라도 이런 곳에 묶인 채 죽을 때까지 고통을 받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좋소. 그렇게 하시오. 지금 당장 그 망할 녀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오!”
“좋습니다!”
요명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준은 곧바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
잠시 후, 요명이 긴 숨을 내뱉으며 미간을 통해 영혼의 힘을 꺼냈다. 밖으로 빠져나온 영혼의 힘은 이내 검은색의 거대한 뱀으로 변했다.
이준은 곧바로 뜨거운 열기가 퍼지는 영혼을 퍼뜨려 검은색 뱀의 이마에 각인을 새겼다. 검은색 뱀의 이마에 이준의 영혼 인결이 새겨지는 순간, 뱀의 몸이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다시 요명의 이마 속으로 되돌아갔다.
각인된 영혼이 요명의 이마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의 영혼파동이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 참. 전 이곳에 황천의 결정을 찾으러 왔습니다.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황천의 결정은 지옥 이무기의 호수에서도 보기 아주 드문 물건이오. 보통 천 년에 한 번 주먹만 한 크기의 결정이 생겨나지. 그 동안 생겨난 결정은 모두 내가 집어삼켰소.”
잠시 머뭇거리던 요명이 입을 열어 붉은색 빛을 뿜어내는 수정 하나를 뱉어내며 말했다.
“이게 바로 황천의 결정인가…….”
마치 혈관 속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매우 신비로운 결정체를 바라보던 이준은 조용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