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화. 혼전의 사자
“직접 성운각에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얘기할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약로가 대전 안을 천천히 훑으며 슬슬 운을 뗐다.
“몇 년 동안, 영혼의 궁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연금탑이 가장 큰 손실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연금술사들이 놈들의 손에 잡혀갔지요. 또, 화종을 갉아먹던 천명종의 배후에도 놈들이 있었지요. 과거 화운 영감도 영혼의 궁전 놈들과 큰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약로의 이야기에 언급된 사람들이 저마다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얼마 전 천명종이 소수 세력들과 손을 잡고 명하연맹을 꾸려 성운각을 공격했습니다. 그 배후에도 마찬가지로 영혼의 궁전이 있었지요. 저와 이준 역시 놈들과 끊을 수 없는 악연이 있으니, 우린 모두 한 배를 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약로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맹은 그렇다 쳐도, 이 이후에 다른 종파 내부에서 개입하는 일이 발생하진 않겠지?”
화운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연맹에선 실력 고저에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하오. 그러니 다른 종파의 일에 대해 간섭하는 일 역시 없을 것이오.”
약로의 한마디에 사람들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들이 가장 걱정스러웠던 부분이 바로 이런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연맹에는 사실 많은 규칙이 없습니다. 그저 함께 손을 잡고 서로를 지지하며 세력을 지키는 것이 목표이지요. 혼자서는 영혼의 궁전을 당해낼 수 없으니 모두 함께 힘을 합치자는 것입니다.”
이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마음에 드는 이야기군.”
소연금탑의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연맹인만큼 반드시 맹주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렇지 않으면 통일된 의견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맹주는 누가 맡겠소?”
화종에서 온 청 선자라는 여인이 입을 열었다.
순간 대전 안에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이 부분은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부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맹은 우리가 제안한 것이지만, 우리가 맹주 자리를 차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추천을 받아 맹주를 뽑는 것이 어떻습니까?”
약로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이에 사람들은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허허, 다들 걱정 마십시오. 먼저 연맹 전체를 책임질 맹주를 정하고, 나머지 세력에서 각각 부맹주를 하나씩 뽑을 예정입니다. 이 부맹주 세 사람의 의견이 맞으면 맹주의 결정보다 우선시하도록 할 것이니 맹주가 강제로 명령을 내릴 일은 없을 겁니다.”
분위기를 읽은 이준이 연맹의 제도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맹주 자리는 반드시 실력이 강한 사람이 있어줘야 하오. 난 일단 그 자리에 맞지 않소. 그리고 화운 영감도 실력은 강하지만 성질이 더러워서 맹주론 어울리지 않소.”
청 선자의 말에 화운 영감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뒤집었지만 차마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이런 일을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불의 협곡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맹주로 가장 적합한 자는 두 명이 남았소. 소연금탑의 임 선생, 그리고 약선. 두 사람은 중주에서도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으니 맹주로 가장 적합하지 않겠소?”
청 선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소연금탑의 대장로는 곤란하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난 나이가 많아 안되오. 연맹을 보호하는 건 할 수 있지만 내가 맹주가 된다면 연맹의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침체될 것이오. 그러니 맹주는 약선에게 맡기도록 하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낀 약로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거절할 수도 없겠구려. 모두가 절 믿어주시니 맹주의 자리는 잠시 동안 제가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더 적합한 인재가 나타난다면 맹주 자리를 그분에게 넘기는 것으로 하지요.”
약로가 맹주직을 맡는 것이 확정되자, 화운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연맹 이름을 지읍시다. 연맹을 만들었으면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영혼의 궁전의 별칭인 혼전은 영혼으로 궁전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지 않소.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 머리 위에 있는 하늘에서 이름을 따 창천부는 어떠한가?”
대장로가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혼전 위에 창천연맹……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준이 웃으며 대장로의 말에 찬성했다.
“그럼 그 이름을 두 글자로 줄여 천부(天府)라고 부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하늘에 터를 잡는다……. 아주 멋진 이름이구려!”
화운 선조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허허. 괜찮구려.”
“아무런 이견이 없다면 우리 연맹의 이름은 천부연맹으로 하겠소.”
대충 의견이 모인 듯하자, 약로가 웃으며 연맹의 이름이 정해졌음을 알렸다.
“연맹도 꾸려졌으니 이제 새롭게 탄생한 우리 천부연맹을 위해 한 잔 듭시다.”
이준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바로 그때, 이준의 표정이 빠르게 식으면서 대전 중앙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공간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나며 검은색 안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부? 하하!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이름은 거창하게도 짓는구나.”
“혼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준의 동공이 빠르게 작아졌다.
검은 안개가 끊임없이 일렁이다가 하나로 응집되어 검은색 형체를 만들어냈다.
“환영을 보낸걸 보니 담력이 좀 부족하신가봅니다.”
이준이 비웃듯이 말했다. 앞에 있는 검은색 그림자는 그저 안개가 모여 만들어진 환영일 뿐, 본체와는 아무런 연결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끌끌, 건방진 놈……. 네 놈이 이렇게까지 머리가 클 줄 알았다면 진즉 이씨 가문을 피바다로 만들었을 것을…….”
“그 말을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군. 그런 쓸데없는 협박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라면 당장 없애주지.”
그림자의 입에서 새어나온 말에 이준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말을 마친 이준은 곧장 오른손을 뻗어 환영이 나타난 공간을 조준했다. 그러자 이준의 손에서 격렬한 공간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이번에 이곳에 온 이유는 네 손에 있는 태령황제의 옥 때문이다.”
검은 안개 속 그림자가 말했다. 그와 동시에 검은 안개가 갑자기 거울로 변하며 그 위에 환영이 떠올랐다.
거울에 비친 거대한 감옥 안에는 검은색 쇠사슬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었으며, 그 중앙에는 수척해진 한 사내가 쇠사슬에 묶인 채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준의 표정이 늑대처럼 사나워졌다. 분노를 참지 못한 이준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자, 주위에 있던 의자가 모조리 박살이 나버렸다.
“아버지!”
그 속에 비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준의 아버지, 이한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거의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말 한 마디만 해도 다음 해 오늘이 네 아버지의 기일이 될 것이다. 아버지 제사상을 차리고 싶지 않다면 태령황제의 옥을 내놓거라.”
검은 안개 속에 있는 그림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림자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준의 눈이 이성을 잃은 마수처럼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준. 정신 차려!”
그때, 차가운 손이 이준의 손을 붙잡았다.
손등을 타고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에 조금 정신을 차린 이준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살기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이준은 긴 숨을 들이마셨다.
“태령황제의 옥을 내놓아라!”
검은 그림자가 한 번 더 이준을 향해 외쳤다.
“개소리, 내가 태령황제의 옥을 넘기면 너희들이 아버지를 살려두겠어?”
이준이 핏발 선 눈으로 검은 안개 속 그림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태령황제의 옥을 가지고 싶다면 아버지를 내 앞에 모시고 와라. 아버지가 죽는다면 너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없을 줄 알아.”
냉정을 되찾은 이준의 대답에 그림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대천존의 말대로 이런 건 안 통하는구나.”
“알았으면 꺼져.
“끌끌, 이준. 연맹 따위를 만든다고 정말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우리 혼전의 진짜 실력을 깨닫는 순간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될 것이다.”
부전주가 기괴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연금탑, 그리고 화종과 불의 협곡……. 네놈들도 참으로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구나. 곧 혼전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흥, 어디 한번 해보거라.”
대장로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청 선자와 화운 선조는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할 말은 끝난 것 같으니 이제 꺼지시지. 조만간 내가 먼저 찾아갈테니 기다려라.”
이준이 주먹을 움켜쥐자, 공간이 무너져 내리며 검은 그림자를 짓뭉개기 시작했다.
“끌끌. 오만한 놈. 투성 최고급 강자였던 이현조차 우리 손에 죽었는데, 1성 투성 따위를 죽이지 못할 것 같으냐? 하하! 한 번 찾아와 보거라. 내가 직접 널 처리해주마!”
그림자는 그 말을 끝으로 이준의 힘에 의해 박살나 흩어지고 말았다.
“연맹 결성에 대한 소식이 이미 혼전 귀에 들어갔었나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나타날 리가 없지.”
대전 안이 서서히 조용해지자 약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런 유치한 협박을 하는 걸 보니 놈들도 위기감을 느낀 것이 분명합니다.”
이준이 말했다.
“조금 전 그 자는 혼전의 부전주일 것이네.”
이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장로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놈의 실력은 3성 투성 정도일걸세. 하지만 본체가 직접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니 우리와 정면으로 싸워 이길 자신이 없는게지.”
이어지는 대장로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연맹에 대한 기본적인 틀은 모두 완성이 되었습니다. 궁금한 점 없으십니까?”
이준이 모든 사람을 가볍게 훑어보며 말했다.
“없네. 그나저나 조만간 영혼의 궁전 놈들과 일전을 벌일 준비를 해야겠군. 놈들도 그냥 넘어갈 마음은 없는 모양인 것 같으니 말이야.”
화운의 말에 나머지 세력의 대표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럼 최대한 빨리 각 세력의 주요거점에 공간 통로를 만들어 놈들의 습격에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준이 말했다.
“좋네. 그럼 서둘러 일을 시작하지.”
이번에도 성격이 급한 화운이 가장 먼저 답을 한 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연금탑의 대장로와 화종의 강자들도 잇달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성운각, 연금탑, 화종, 그리고 불의 협곡이 모여 연맹을 결성했다는 소식에 중주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이 소식을 들은 여러 세력들 역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중주는 힘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곳이니, 비교적 힘이 약한 세력들은 천부 연맹에 가입해 그들의 보호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 소식이 널리 알려진 지 3일 째 되는 날, 성운각 전체가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수많은 세력의 수장들이 연맹에 합류시켜 달라며 성운각으로 모여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약로와 이준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천부연맹은 혼전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만큼 그들과의 싸움에서 도움이 될 수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을 모두 받아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여든 세력 중 상당수는 강한 연맹에 가입해 자신들의 잇속을 차리려는 기회주의자들이었고, 정말로 혼전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를 가진 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이에 이준은 풍존에게 이 일의 처리를 부탁했다.
풍존자는 실력이든 명성으로든 약로와 비교할 수도 없지만 조직을 관리하는데 있어서는 약로보다 몇 수는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연맹이 결성되자마자 약로는 풍존자가 맡고 있던 일들을 다른 장로에게 인계하고 그를 황급히 성운각 안으로 불러 복잡한 일을 해결했다.
역시 풍존자의 관리 능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성운각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크고 작은 일이 하나둘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매우 복잡해 보이는 일들도 한번 그의 손을 거치면 아무런 문제없이 말끔히 처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