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화. 소연금탑
오랜만에 만난 네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이준은 얌전히 곁에 앉아 미소만 짓고 있었다.
“하하, 약선, 어린 나이에 투성이 된 데다 인성도 올바르다니, 아주 훌륭한 제자를 뒀소. 자네가 없었다면 내가 데리고 와버렸을지도 모르오.”
현공자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허허. 이젠 스승이 될 수도 없지. 염력으로 보나 연금술로 보나 내가 자네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 자, 약선 자네가 이제 투성이 된 제자까지 이끌고 연금탑에 왔다면 분명 보통 일은 아닐 터인데, 무슨 일인가?”
“그렇지.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지.”
현공자의 질문에 약로는 잠시 망설이다 연맹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흐음……. 글쎄, 내가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 영감들이 어떻게 나올지…….”
현공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곤란한 일인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놈들과는 언젠가 반드시 결판을 내야해. 놈들이 가장 탐내는 것이 바로 연금술사의 영혼 아닌가. 언제까지 놈들을 내버려둘 생각인가?”
이어지는 약로의 말에 현공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의 궁전이 아무런 이유 없이 영혼들을 모으고 있지 않을 것이다. 분명 어떤 큰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선뜻 그들과 전쟁을 선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큰 어르신이 계셨다면 그 분의 말 한마디로 빠르게 결정할 수 있었을 텐데…….”
현이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큰 어르신이 또 사라지신건가?”
약로의 물음에 현공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 하나 듣지 못한 지도 한참 되었네. 영혼석이 없었더라면 이미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을 게야.”
“큰 어르신이요? 그 분이 누구십니까?”
묵묵히 네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준이 궁금증을 참지 못 하고 물었다. 큰 어르신이라니, 그런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큰 어르신은 연급탑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현재 연금탑에서 가장 연배가 많으신 분이기도 하고. 그 분이 고개를 끄덕여준다면 이 연맹은 성립될 것이고, 그 분이 고개를 젓는다면 무슨 조건을 내걸어도 연금탑은 연맹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지.”
현공자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큰 어르신은 늘 투기 대륙 곳곳을 떠돌아다니시니 우리도 얼굴을 보기가 어렵지. 어르신은 불의의 사고로 어미의 뱃속에서 생명을 잃은 아이를 찾아 그 아이를 대신해 뱃속으로 들어가 보통의 아이로 태어나신다. 그리고 그대로 성장해 다른 신분으로 평생을 살아가다 그 몸이 죽고 나면 다시 밖으로 빠져 나오시지. 어르신의 말로는 생명을 경험하는 일이라고 하시던데…….”
말없이 현공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준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조차 다물지 못 했다.
“정말 신비한 능력을 가진 분이시군요.”
“아니, 그 분은 사람이 아니다…….”
현공자가 이준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 분의 본체는……연금비약이다.”
“사람이 아니라고요?”
이준은 순간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설마 전설 속의 그 황제 등급의 연금비약인가요?”
대부분의 연금비약은 9색 비뢰만 거치면 영기를 얻게 되지만, 마수의 형태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전설 속의 9레벨 연금비약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천지의 에너지를 흡수해 인간처럼 수련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하. 황제 등급의 연금비약은 옛날에도 아주 희귀했으니 지금은 누가 제련해낼 수 있겠느냐?”
현공자가 이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역시 ‘큰 어르신’의 정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이준과 똑같은 반응을 했었다.
“큰 어르신을 만든 선배 역시 연금탑 창시자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지. 그 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모든 힘을 다 바쳐 큰 어르신을 만드셨고, 그의 생명력과 영혼의 힘이 흘러들며 9레벨 연금비약이 완성된 것이지. 어찌 보면 큰 어르신은 그 선배의 또다른 몸이라고도 할 수 있겠구나.”
현공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후로 큰 어르신은 몇 번이나 연금탑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내셨다. 하지만 연금탑이 안정을 되찾고 나니 홀연히 사라져 투기대륙을 떠돌아다니고 계시지.”
이준의 이마에는 어느 새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9레벨은 9레벨 보물, 9레벨 흑수, 9레벨 황금 비약으로 나뉜다. 이 중 보물비약은 아직까지 자주 볼 수 있는 축에 속했지만, 흑수 비약과 황금 비약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9레벨 황금비약 다음이 바로 황제 등급의 연금비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이 등급의 연금비약을 제련할 수 없었다.
9레벨 흑수 비약을 제련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연금탑의 선조가 최소한 5,6성 투성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였다.
“큰 어르신의 얘기는 그만하세. 언제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분인데 그 분에 대해 이야기해봤자 뭐가 달라지겠나.”
현공자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뵜을 때 큰 어른신은 17, 18세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럼 연맹에 대한 일은요?”
이준이 물었다.
“큰 어르신이 연금탑을 떠난 후로 이런 큰일은 소연금탑 대장로회의 투표를 통해 결정하고 있다.”
“그 고리타분한 영감들을 상대로 투표를 진행한다니, 골치 아프겠군.”
“우리 세 명의 표를 모아도 과반인 다섯에도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든 대장로들의 생각을 움직여야 해요.”
현이가 입을 열었다.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닐세. 일곱 중 영혼의 궁전에 큰 원한을 품은 사람이 둘이니, 그들을 잘 설득한다면 다섯 표까진 확보할 수 있을게야.”
“그럼 연맹을 맺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군.”
현공자의 말에 약로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5 대 5라면 희망이 있다.
“그건 확답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딪혀 볼 순 있겠지. 아니면 함께 소연금탑으로 가지 않겠나? 이 일을 알린다면 분명 노인들 사이에서 소동이 일어날걸세.”
현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세. 그곳도 안 가본 지가 오래 됐군.”
약로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을 바라보았다.
“소연금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중주에서 손에 꼽는 연금술사들이다. 너도 그곳에 가면 식견을 좀 더 넓힐 수 있을 게다.”
“하하. 그 영감들에게 식견을 넓힐 수 있게 해주는 거겠지요.”
현이가 웃으며 말했다.
현공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 끝으로 걸어가 매끈한 벽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강한 파동이 빠르게 퍼지면서 순식간에 벽 안에 공간통로가 생겨났다.
“가세”
현공자가 웃으며 앞장 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준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공간통로가 생겼던 벽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 * *
공간통로에 들어간 지 1분도 되지 않아 이준의 눈앞이 하얗게 밝아졌다. 잠시 후, 구름을 뚫고 가파르게 솟아오른 거대한 협곡이 나타났다.
“약재 냄새…….”
이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봉우리 곳곳에는 커다란 약초밭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약초밭에서 키우고 있는 것은 모두 바깥세상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진귀한 약재들뿐이었다.
“제 2의 연금세계라 해도 되겠어.”
이준이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 약초밭은 모두 소유주가 있다. 이것들이 바로 대장로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지.”
현공자가 산봉우리 위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무성한 약재들이 드넓게 펼쳐진 곳에는 몇몇 장로들이 뒷짐을 진 채 서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약재를 기르는 평범한 농부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몸에서는 하나 같이 진한 영혼의 힘이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준을 보고도 본체만체하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약로를 발견하고는 눈이 동그래져 고개를 숙였다.
현공자는 거대한 산봉우리의 정상에 도착하고 나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3대 수장은 먼저 약로와 이준을 조용하고 깨끗한 방으로 안내한 후 황급히 대장로들을 찾아가 연맹에 관한 일을 설명했다.
약로와 이준은 방 안에서 차를 마시며 그들의 결정을 기다렸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네.”
잠시 후, 방으로 돌아온 현공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좋은 소식은 연맹 수락에 대한 찬성 의견을 다섯 표나 얻었다는 것일세.”
이준과 약로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다섯 표라면 승산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쁜 소식은 3일 후에 대장로원에서 새로운 장로를 받는데, 그에게도 투표권이 있다고 하는걸세. 하지만 문제는 그 자가…….”
현공자가 말꼬리를 흐리며 약로를 바라봤다.
“설마 호 영감인가?”
“그렇네.”
현공자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가 새로운 장로로 들어온다면 분명 반대표를 던지겠지. 그 영감은 아직도 자네에게 연금대회의 우승자 자리를 빼앗긴 것에 원한을 품고 있으니까.”
“흥, 당신이 소연금탑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미 대장로가 되어 이런 머리 아픈 일도 생기지 않았겠죠.”
현이는 약로를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약로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떡하나? 그 늙은이가 반대하면 연맹은 무산이 되고 말걸세.”
진태자의 말에 현공자와 약로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영감을 새로운 장로로 들이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요?”
현이가 말했다.
“말이야 쉽지. 하지만 누가 감히 그 늙은이에게 시비를 걸겠소. 약선이야 소연금탑에서 제 발로 나갔으니 그 늙은이와 말싸움을 벌일 자격조차 없고.”
현공자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약 영감은 자격이 없지만 이준은 있죠. 연금대회 우승자이자 차기 연금탑 수장 후보로 꼽히는 자인데, 당연히 자격이 되지 않겠어요?”
“이준?”
현이의 말에 현공자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 늙은이가 훨씬 선배지만 이준이라면 붙어볼만 하겠어.”
약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이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영감은 내가 키운 제자에게도 이길 수 없을 걸세.”
“하하, 정말 그런다면 그 영감 얼굴이 참 봐줄 만하겠군.”
네 노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준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 호 영감님은 몇 색 비뢰까지 제련할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도 아주 오랫동안 그 늙은이를 본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봤던 게 20년 전이겠구나. 그 때가 8색 비뢰였으니 지금은 분명 9색 비뢰까진 나오겠지.”
“9색 비뢰…….”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한 때 약로와 연금대회 우승자 자리를 놓고 다투던 인물다웠다.
“네가 그를 이기려면……. 9레벨 연금비약을 제련해야겠구나.”
말을 마친 약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9레벨 연금비약 중 가장 낮은 등급인 보물 등급의 연금비약만 되어도 제조가 지극히 어려워 약로의 실력으로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준이 1성 투성이 됐다고는 하나, 경험이 너무 부족해 9레벨 연금비약을 만드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능하겠느냐?”
“9레벨 연금비약이라…….”
약로의 질문에 이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 봐야죠.”
한 번도 9레벨 연금비약을 제련해본 적이 없었지만, 투성이 된 지금이라면 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준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세 수장도 조금 마음이 놓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하세. 우리가 이준이 소연금탑의 장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준비하지. 연금대회 우승자라는 경력이 있으니 분명 큰 문제는 없을 걸세.”
“알겠네.”
“그럼 3일 동안 여기서 느긋하게 기다리게. 연금술사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소이니 딱히 불편하지는 않겠지.”
현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