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5화. 연맹
천북성, 한씨 가문.
쾅!
한씨 가문의 강자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갑자기 나타난 세 노인을 바라보았다. 소맷자락만 흔들어도 한씨 가문에 행패를 부리러 왔던 강자들이 피를 토하며 정원 밖으로 나가 떨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런 강자들이 자신들을 도와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씨 가문의 가주, 한철이라 합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양쪽 귀밑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자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그의 양 옆에는 늘씬한 여자 두 명이 서있었다. 두 사람은 바로 이준이 중주에 왔을 때 그를 도와준 한씨 가문의 딸, 한율과 한설이었다.
“하하, 한 가주님. 우린 성운각 소각주님의 명을 받고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백발의 노인이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성운각?”
한철의 뒤에 서있던 한설이 파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이준이에요.”
“이제 풍뢰각은 없어졌습니다. 한씨 가문이 동의만 한다면 그 빈자리를 한씨 가문이 채울 수 있도록 저희 세 사람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지요.”
노인의 말에 한철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대로 가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운각의 휘하에 들어와 풍뢰각의 영토를 다스리라니…….
“이 일은 소각주님이 직접 명하신 일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안 왔나요?”
한설이 붉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성운각 장로들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젓더니 저장반지에서 옥병 두 개를 꺼내 한설과 한율에게 건넸다.
“이건 소각주님이 두 아가씨에게 선물하신 물건입니다. 한설 아가씨에게 구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옥병을 보자 반짝거리던 한설의 두 눈이 이내 어두워졌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옥병을 받아 조용히 물러났다.
* * *
성운각은 장장 10일에 걸쳐 피의 복수를 마무리했다. 10일 동안 적어도 20여개가 넘는 세력들이 성운각 강자들의 손에 멸망했다. 상급 반투성과 1성 투성 강자가 있는 성운각은 이미 중주내에서도 손에 꼽는 절대강자가 되어 있었다.
복수가 끝나자, 성운각 사람들이 서서히 철수하기 시작했다. 명하연맹에 몸을 의탁했던 세력들 중 주축이 되었던 세력들은 모조리 뿌리 뽑았지만, 작은 세력들에게까지 철퇴를 내리지는 않았다. 과도한 보복은 반감을 낳기 때문이었다.
성운각이 풍뢰각과 천명종, 빙하곡을 쓸어버리는 동안 혼족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 일행은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들이 가만히 있는 것은 이대로 물러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힘을 모아 허점을 찌를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있을 혼족과의 결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연맹을 세워야 했다.
이에 성운각은 명하연맹을 쓸어버리는 동시에 화종과 불의 협곡에 서신을 보냈다. 두 세력 모두 연금탑만큼 강력하진 않지만 중주에서 손에 꼽히는 세력이니만큼,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혼족을 무너뜨릴 가능성 역시 높아지는 것이 당연했다.
나머지 작은 세력들은 3대 세력과 먼저 연맹을 결성하면 자연스럽게 따라 붙을 것이기 때문에 급하지 않았다. 작은 세력들에서 숨어있는 강자들을 추려내 정예 부대를 만든다면, 혼족에 대항할 수 있는 완벽한 세력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 * *
화종.
옅은 꽃향이 그윽하게 퍼지는 텅 빈 대전 안에 몇몇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대전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는 진율희도 있었다. 하지만 화종의 종주는 진율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녀의 자리에는 다른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황토색 옷을 입은 그녀들은 백옥처럼 매끈하고 빛나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눈꼬리에 옅은 물고기 꼬리 문양이 그려져 있어 더욱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두 사람의 밑에는 화종의 대장로들이 공손한 태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대장로님들은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위(首位)에 앉은 여자가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두루마리 위에는 성운각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대장로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태상 장로님. 성운각은 이미 우리 화종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큰 세력이 되었습니다. 다만 영혼의 궁전에 대적하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이 연맹에 동의한다면 혼족을 적으로 돌리게 될텐데, 너무 위험한 결정입니다.”
황색 옷을 입은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선 이 영감은 죽은 줄 알았더니 상급 반투성이 되어 있다니, 게다가 그가 거둔 제자는 약로를 뛰어넘어 투성이 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우리 화종은 천명종의 압박으로 인해 크게 세력이 꺾인 상태입니다. 다시 예전 같은 힘을 찾기 위해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진율희가 입을 열었다.
“믿을수가 없군요. 큰 언니와 내가 중급 반투성일 때도 천명 그 노인을 당해낼 수 없었는데, 성운각의 소각주가 그 자를 죽여 버릴 줄이야.”
황색 옷을 입은 여자는 진율희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진율희. 이준과 아는 사이라고? 그 자는 믿을만한가?”
진율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색 옷을 입은 여자가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일은 큰언니가 결정하시지요.”
진율희는 몸에 힘이 들어갔다. 화종의 종주는 그녀였지만, 이런 큰일은 반드시 이 두 사람의 결정을 따라야 했다. 즉, 이준을 도우려면 두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잠시 후, 냉담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여인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연맹을 결성해 영혼의 궁전에 대적한다.”
“휴…….”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진율희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것으로 이준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성운각에 회신하세요.”
황색옷의 여자가 명령을 내리자, 화종의 장로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였다.
* * *
불의 협곡.
“연맹을 맺어 영혼의 궁전에 맞서자고? 흥, 됐다! 돌아가라고 해!”
불의 협곡 깊은 곳에 위치한 방 안에서 새빨간 머리의 노인이 두루마리를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그의 반응에 탁상 앞에 서있던 당진과 당화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콜록, 콜록…….”
한바탕 소리를 지른 노인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심 기침을 뱉었다. 그의 모습에 당화연이 황급히 다가가 등을 두드렸다.
“그래도 너밖에 없구나, 화연아.”
새빨간 머리의 노인은 조금 괜찮아졌는지 고개를 들어 탁상 위로 집어던졌던 두루마리로 시선을 옮겼다.
“이준이 1성 투성이라고? 나이도 어리지? 좋다. 너와 혼사를 치르면 연맹을 결성해주겠다고 해라!”
쾅!
당화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할아버지, 뭔 소리예요! 이러면 장례도 안 치러줄 줄 알아요!”
“크흠, 화연아.”
당진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당화연을 말렸다.
“그 나이에 투성이 된 것만으로도 미래는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느냐. 그런 녀석과 혼사를 치르게 해준다는데! 고맙다고 인사는 못할 망정!”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화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팩 돌렸다.
“아버님. 연맹에 동의한다면 아버님의 병을 치료해주겠다고 합니다.”
“뭐?”
새빨간 머리카락의 노인이 눈썹을 뜰썩이며 되물었다.
“안 하겠다면?”
“……그래도 찾아와 독을 제거해주겠답니다.”
이어지는 당진의 말에 노인의 표정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노인은 못 마땅하다는 듯 입을 씰룩이다가 툭 던지듯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참 괜찮은 놈이군.”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좋아. 이번 기회에 영혼의 궁전 놈들에게 본 떼를 보여줘야겠구나.”
말을 마친 노인이 의자 위에서 일어나 허리를 펴자, 묵직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허허, 한참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았는데, 바깥 세상에 이 화운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되려나…….”
* * *
“화종과 불의 협곡 모두 수락했다고요?”
성운각 대전 안.
두 장로의 이야기를 들은 이준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하. 화종과 불의 협곡 모두 확실하게 답변했습니다. 이제 각주님과 소각주님이 언제 이 소식을 발표할지 결정만 하시면 됩니다.”
성운각 장로가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그의 말에 이준과 옆에 있던 채린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일은 시작이 어려운 법. 중주에서 무시할 수 없는 명성을 가진 화종과 불의 협곡의 손을 함께 잡는다면, 명하연맹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을 만들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리는구나.”
약로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럼 언제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까요?”
채린이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거라. 두 세력과의 연맹이 성사됐지만 혼족을 상대하기 위해선 반드시 연금탑을 끌어들여야 한다.
약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준 역시 고개를 끄덕여 스승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연맹에 끌어들일 세력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연금탑이었다. 그러나 연금탑과 연맹을 성사시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연금탑은 중주의 대소사에 대해 항상 중립을 지켜왔으며, 그 어느 편에도 서 본적이 없었으니, 영혼의 궁전과 관계가 좋지 않다해도 그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 또한 없었다.
“아니면 우선 서신을 보낼까요?”
아라가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약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을 연맹에 끌어들이기 위해선 나와 이준이 직접 연금탑에 가야 한다. 다른 자를 보내봤자 결과는 보나마나 뻔하지.”
“예.”
이준 역시 약로와 생각이 같았다. 연금탑은 화종, 불의 협곡과 달리 반드시 약선과 자신이 직접 방문해야 설득할 수 있었다.
“알겠어. 성운각은 내가 지키고 있을게. 언제 출발할 생각이야?”
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녀 역시 연금탑을 끌어들이는 것이 이번 일의 핵심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룰 거 없이 오늘 당장 가야겠습니다.”
이준이 약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혼족에 대항할 최강의 연맹을 세우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연금탑을 연맹에 가입시켜야 했다.
* * *
대화를 이준과 약로는 곧바로 연금성을 향해 출발했다. 성운각은 이제 막 상황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채린, 아라 등의 강자들은 모두 성운각에 남아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투성이 된 이준과 반투성인 약로의 속도로는 반나절이면 연금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연금성에 다시 돌아온 순간, 이준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중주에서 처음 이름을 날린 것은 연금탑이 주관하는 연금술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별의 불꽃을 얻었고, 이제는 영혼의 궁전에 대항할 강력한 동맹을 얻게 될 것이다.
연금성에 들어온 두 사람은 한시도 허비하지 않고 곧장 연금탑 안으로 진입했다.
* * *
연금탑 꼭대기에 위치한 회의실 안.
연금탑의 장로는 황급히 3대 수장에게 이준과 약로가 찾아왔음을 알렸다.
“운영을 아주 잘 하고 있구나.”
약로는 찻잔을 입에 대며 말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닫혀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커다란 회의실 안에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 귀한 손님이 오셨구만. 약선 영감, 정말 자네를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현공자가 입이 귀에 걸린 채 말했다. 그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환히 웃고 있는 연금탑의 나머지 두 수장, 진태자와 현이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오. 잘 지내셨소?”
약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연금탑의 세 수장은 거의 뛰듯이 약로에게 걸어와 그의 손을 맞잡았다.
“몇 년이 지나도 우리 늙은이들과 다르게 여전히 빛이 나는구려.”
약로의 짤막한 한마디에 현이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소녀 같은 현이의 모습에 이준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