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화. 비밀
“하…….”
혼족의 투성 강자가 만든 공간 균열이 사라지자, 이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며 살기를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 성운각의 장로들과 제자들을 바라봤다.
“장로님들은 상황을 수습해주십시오. 부상자는 빠르게 치료를 받도록 하고, 제자들은 그대로 열심히 수련하시면 됩니다.”
이준이 성운계 전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
모든 사람들이 공손한 태도로 이준에게 고개를 숙였다. 진정한 투성이 된 이준이 혼자서 무려 셋이나 되는 반투성을 박살냈으니, 이제 성운각은 중주 전체에서도 손에 꼽는 세력으로 거듭날 것이다.
“스승님, 채린아, 괜찮아?”
“하하, 별 거 아니니 걱정 말아라.”
약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스승을 뛰어넘었구나.”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투성은 커녕 평범한 투사조차 되지 못했던 자신의 제자가 어느 새 자신을 뛰어넘어 투기 대륙 전체를 호령하는 진정한 강자가 되었으니, 자신이 투성이 된 것보다 더욱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조금 전 그 사람, 혼족의 투성이었느냐?”
“예. 하지만 뭔가 약점이 있는 건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약로의 질문에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약로 역시 영문을 알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 그가 직접 손을 썼다면, 이준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백골을 살려 달아나는데 그쳤단 말인가?
“흐음…….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한참을 생각했지만 별다른 답이 나오지 않자, 약로가 무거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화제를 바꿨다.
“우선 돌아가서 2년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십시오.”
“그러마.”
이준이 약로를 부축해 대전으로 향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분분히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성운각의 대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대전으로 이동한 이준은 약로와 채린 등에게서 자신이 밀실에서 수련에 열중하던 2년 동안 벌어진 일들에 대해 전해들었다.
“명하연맹이라…….”
명하연맹이 천명종과 같은 세력이 연합해 구성된 연맹이라는 걸 알게된 이준의 표정이 점점 더 싸늘하게 굳어갔다.
“오늘 천명이 네 손에 목숨을 잃고 명하연맹의 수많은 강자들이 이곳에서 죽었으니 앞으로 성운각도 조용하지만은 않을 게다.”
약로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명하연맹은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혼족은 얘기가 다르죠. 우리도 하루 빨리 세력을 확장해야겠습니다. 연맹을 만들어 보는건 어떨까요?”
“연맹을?”
이준의 제안에 약로를 비롯한 장로들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혼족에게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명하연맹 같은 연맹을 만드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글쎄, 투기 대륙 전체에 혼족에게 대항하려는 세력이 몇이나 될까?”
채린이 반박했다.
“아냐. 분명히 있을거야. 그들이 영혼을 수집하러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공분을 살 일을 너무 많이 했어. 연금탑만 해도 영혼의 궁전이라면 치를 떨잖아.”
영혼의 궁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강자의 영혼을 수집하는 것이다. 영혼이 강한 사람들은 대부분 연금술사였으니, 얼마나 많은 연금술사들이 암암리에 그들에게 잡혀갔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연금탑의 실력이 강한 건 알겠는데, 연금탑의 수장들도 투존 최고급 단계 아니야?”
아라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건 외부로 드러난 힘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연금탑이 무엇으로 연금술사의 성지가 됐겠으며, 또 어떻게 영혼의 궁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느냐?”
약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연금탑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단연 약로였다.
“게다가 이준이 수련하는 동안 현공자도 반투성이 되었다. 하급 반투성일 뿐이지만 분명히 도움이 될게다.”
“현공자 선배님도 투성이 되셨습니까?”
이준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연금탑 수장님들께서 영혼의 궁전의 전주와 싸운 적이 있다고 현공자 선배님이 말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이었다면 영혼의 궁전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이 말을 믿었겠지만, 지금은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천존인 백골만 해도 상급 반투성의 실력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연금탑의 세 수장이 그보다 강한 영혼의 궁전의 전주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하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진짜 전주가 아니라 전주의 영혼을 영혼의 궁전 강자의 몸에 주입시켰던 것뿐이었다. 진짜 전주와 맞붙었다면 그 세 수장은 참혹하게 당했을테지. 이 이야기는 수장들 앞에서 꺼내지 말거라.”
웃으며 말을 마친 약로가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연금탑은 알아도 연금탑 안에 있는 소연금탑은 모르는구나.”
“소연금탑이요?”
그의 말에 아라 뿐만 아니라 이준도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연금탑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준이 역시 과거에는 간신히 소연금탑에 들어갈 자격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약로는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소연금탑에 들어갈 수 있는 첫 번째 자격이 바로 7색 비뢰의 8레벨 연금비약을 제련해내는 것이거든. 영혼의 힘 역시 영혼단계여야 하고 말이다.”
“7색 비뢰에 영혼단계의 영혼이라니……. 너무 까다로운데요.”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7색 비뢰의 8레벨 연금비약을 제련하는 것은 그에게도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투성이 된 지금이야 이야기가 다르지만, 예전 같았으면 절대로 소연금탑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소연금탑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연금탑의 진정한 실력자들이지. 그들이 있어 혼족 놈들도 연금탑과 전쟁을 벌이지 못 했던 것이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나도 허리를 숙여야 할 정도로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다. 나도 소연금탑에 있던 적이 있었다. 그 곳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제 발로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역시 연금탑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영혼의 궁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연금탑에 있는 사람들도 혼족 놈들에게 원한이 많으니, 그들과 연맹을 맺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소연금탑에도요?”
“소연금탑의 전성기 시절, 탑주가 제자를 하나 받아들였다. 그 제자는 단 4년 만에 그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노인들을 뛰어넘었지. 하지만 그가 혼족에서 온 사람이었다는 걸 누가 알았겠느냐. 신분이 폭로되고 탑주는 사제의 정을 생각해 그를 놔주었지만, 그 양심도 없는 녀석이 혼족 강자들과 함께 탑주를 습격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준의 입가에 쓴 웃음이 번졌다.
“그 일 때문에 연금탑은 영혼의 궁전과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큰 손실을 입고 말았지. 그런 일이 어디 쉽게 잊혀 지겠느냐?”
“그럼 연금탑에게 연맹을 제안해봐야겠군요.”
이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성운각의 일이 끝나면 내가 직접 연금탑으로 찾아가마.”
약로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로와 연금탑은 인연이 깊으니 그가 직접 나선다면 연맹이 성사될 확률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화종과 불의 협곡도 함께 연맹을 구성한다면 분명 영혼의 궁전을 겁내던 종파들도 하나둘씩 모여들 거야.”
채린이 말했다.
“화종에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최고 장로가 두 명 있다. 둘 다 투성 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화종 제자들도 그녀들의 존재를 잘 모르지.”
약로가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갚을 빚도 있고, 너와 진율희도 가까운 사이이니 화종과 손을 잡는 것도 어렵진 않겠구나.”
“예?”
화종 안에 투성 계급의 강자가 두 명이나 숨어있다는 것에 이준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그들의 존재를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허, 중주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은 세력이 어떻게 그 정도 무기도 없겠느냐?”
약로는 발이 넓어 투기대륙의 온갖 세력들 안에 숨어있는 노인들에 대해 꽤나 잘 알고 있었다.
“불의 협곡도 너희가 생각하는만큼 단순한 세력이 아니다. 불의 협곡의 창시자는 네 선조인 이현과도 맞먹는 실력자였지. 게다가 지금 불의 협곡의 선배 중에도 투성이 하나 있는걸로 알고 있다. 그 사람 역시 상급 반투성 실력으로 진정한 투성이 되진 못했지만, 기꺼이 힘을 더해 주실 것이다.”
이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자신과 연이 닿은 세력들이 그렇게 많은 강자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었다.
“그 분은 젊을 때 아주 큰 부상을 당해 지금까지 후유증이 남아있는데, 이 후유증만 해결된다면 분명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이어지는 약로의 설명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연맹을 구성할 세력들의 실력은 이준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었다. 만일 그들을 모두 모아 연맹을 만든다면 중주 최고의 세력이 될 것이다.
‘정화의 불꽃이 나오기 전에 연맹을 만들어 둬야 해.’
혼족도 분명 정화의 불꽃을 노릴 것이다. 정화의 불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연맹을 성립시켜야 했다.
* * *
성운각과 명하연맹의 싸움은 이준의 등장으로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이번 일로 이준과 성운각의 이름이 중주 전체에 널리 퍼졌다.
반면 명하연맹에 합류한 종파들은 이후에 겪을 일로 불안에 떨기 시작했고, 온갖 세력들이 앞 다투어 명하연맹을 탈퇴했다.
그렇게 3일이 흐르자, 성운각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두 명의 투성 강자가 이끄는 성운각의 반격에 명하연맹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명하연맹의 강자들은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고, 성운각의 강자들에 의해 본부마저 궤멸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준과 성운각의 보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빙하곡과 풍뢰각을 비롯해 명하연맹의 중심을 차지했던 모든 세력이 보복의 대상이었다.
* * *
풍뢰각.
이준은 이미 불바다가 되어버린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뛰쳐나오는 모든 강자들을 시체로 만들었다. 동정도, 자비도 없었다. 때마침 이준이 수련을 끝내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그들 역시 성운각에게 똑같은 일을 했을테니까.
“이준. 감히 풍뢰각을 건드리다니, 하늘 봉황족이 절대로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성운각 투존 강자의 공격으로 피를 쏟으며 날아가던 나정필이 독기 서린 눈으로 이준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들도 곧 내 손에 죽을거야.”
이준은 냉담한 표정으로 나정필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풍뢰산에 왔을 땐 나정필의 눈조차 쳐다볼 수 없었지만, 이제 그들의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우리 성운각에서 총 28명의 강자가 당신 손에 죽었어. 피는 피로 씻어야지.”
이준은 천천히 손을 뻗어 나정필을 가리켰다.
그러자 나정필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번개의 움직임을 사용해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느려.”
하지만 이준이 피식 웃으며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자, 나정필의 육신이 새빨간 핏물을 뿜어내며 폭발하고 말았다. 그렇게 나정필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했다.
손을 서서히 거둔 이준은 나정필 육신의 잔해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성운각 장로가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소각주님. 분부하신 한씨 가문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풍뢰각의 공격을 받아 천북성의 이류가문으로 몰락했다고 합니다.”
이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몰락한 것은 자신과 너무 가까이 지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수련에 집중하느라 이후 그들에게 찾아올 문제에 대해서까지 생각하지 못 했었다.
“사람을 보냈습니까?”
이준이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중주로 처음 왔을 때, 한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준은 사막 한 가운데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당시 한씨 가문이 천북성 홍씨 가문을 밀어내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그 이후 풍뢰각의 보복으로 인해 가문 전체가 몰락하고 만 것이다. 자신을 도왔다가 이런 일을 당했으니 모르는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장로 세 사람이 갔습니다.”
성운각 장로가 공손히 대답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북쪽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