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3화. 혼족 투성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성운계를 천천히 둘러보는 이준의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쉭!
이준은 순간 이동하듯 거대한 광장에 생겨난 구덩이 밑에서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약로를 바라봤다. 지금 이준의 눈빛은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하지만 이준을 잘 아는 사람은 이 모습이 가장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콜록……. 하하, 드디어 나왔구나. 조금만 늦었어도 이 늙은이 장례 치러줄 뻔했다, 이놈아.”
약로는 입속에 고인 핏덩어리를 뱉으며 환하게 웃었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이제 저에게 맡기십시오.”
이준은 약로를 안아 구덩이 속에서 나와 커다란 석대 위에 조심히 올려두었다. 그러자 성운각 장로들이 황급히 날아와 약로의 상태를 확인했다.
“채린과 이은, 예린이도 많이 다쳤다.”
약로가 손등으로 피 묻은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세 여자가 힘없이 무형의 힘에 이끌려 그가 위치한 석대 위로 날아왔다.
이준은 세 여자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채린의 어여쁜 얼굴은 이미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있었고, 옷 전체에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저장반지에서 커다란 담요를 꺼내 채린의 몸 위에 덮어준 이준은 말없이 연금비약을 꺼내 아직 정신이 깨어있는 아라에게 건넸다. 아라는 연금비약을 받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영혼의 궁전의 삼 천존이 한 짓이야. 하급 반투성이었어.”
“응.”
이준은 아라를 바라보며 온화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조심해…….”
이준이 몸을 돌릴 때, 쉬어버린 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말고 푹 쉬고 있어.”
이준은 말을 마친 뒤 주변에 서있는 성운각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 많은 걸 보니 수련에 들어간 사이 새로 들어온 강자들인 것 같았다.
평소에 자신만만하던 장로들마저 이준을 보는 순간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준에게서 느껴지는 무서운 기운에 투존 강자들마저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스승님과 제 친구들을 부탁합니다.”
“예, 소각주님.”
네 사람을 챙긴 이준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서는 백골, 천명, 그리고 영혼의 궁전의 삼 천존이 한데 모여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준이 지극히 평온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바라보자 세 사람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1성 투성. 반투성도 아닌, 진짜 투성이다.
백골이 상급 반투성이 되는 데까지는 장장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천명 은 훨씬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1성 투성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고작 2년 만에 투존 전성기에서 반투성을 건너뛰고 1성 투성이 되어 돌아왔으니,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성운계는 햇빛이 잘 들지. 이곳에 묻히면 죽어서도 햇볕은 잘 쬘 수 있을테니까 너무 억울해 하지마.”
이준의 몸이 귀신처럼 흐려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순식간에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준, 건방지구나. 1성 투성? 하! 내가 지금 당장 다른 장로를 불러오지 못할 줄 아느냐!”
백골이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혼족에서도 그림자조차 밟을 수 없는 존재로 꼽히는 투성 강자를 감히 그 따위가 부를 수 있겠는가?
그의 말에 이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파동이 퍼져 나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준이 공간을 완전히 차단해버리면서 소환은커녕 공간 두루마리를 사용해 도망가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준이 곧바로 공간을 봉쇄해버리자 백골의 표정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뭘 보고 있소? 저 녀석이 우릴 그렇게 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소? 1성 투성이라 해도 아직 실력이 안정적이지 않소. 우리 셋이 뭉치면 승산이 있단 말이오!”
천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뭉칩시다!”
말을 마친 천명은 곧바로 염력을 폭발시켜 천 미터가 넘는 거대한 환영을 소환했다. 그와 동시에 백골과 삼 천존 역시 염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세 명의 반투성이 모든 힘을 쏟아내자, 하늘과 땅 사이에 폭풍같은 염력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세 사람을 주시하던 이준의 눈동자는 깊은 호수처럼 조금도 일렁이지 않았다.
“천명혈권!”
“영혼의 쇠사슬!”
천명과 백골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무시무시한 염력이 분노한 용처럼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준 역시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의 두 눈에선 끝을 알 수 없는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오늘을 너희 세 사람의 제삿날로 만들어주마!”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의 손끝에서 네 개의 화염이 폭발하듯 솟아나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백 미터가 넘는 네 가지 색의 고리가 만들어졌다.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그 화염 고리를 앞으로 날려 보내자, 세 명의 반투성이 내뿜은 염력과 사색 화염이 강하게 맞부딪혔다.
쉭-!
네 개의 불고리와 세 반투성의 무투기가 맞부딪히는 순간, 사방으로 거대한 파문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달리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고 백골과 천명, 삼 천존의 염력이 불에 닿은 얼음처럼 빠르게 녹아내렸다.
네 개의 화염 고리사이에는 어느 새 거대한 검은 구체가 생겨나 있었고, 화염 고리가 회전할 때마다 공간이 무너지며 검은 구체의 크기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드드득-.
“저 무투기는 뭐야?”
백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치켜뜨며 외쳤다.
“천지의 불꽃을 이용해 만든 새로운 무투기인 모양이군. 매번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구나.”
말없이 하늘에 떠있는 검은 구체를 바라보던 약로가 말했다. 그 검은 구체에 닿는 순간, 영혼마저도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길 수 없소, 갑시다!”
떨리는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던 백골이 뒷짐을 진 채 이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조금 전 일로 그는 이준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을 마친 백골은 곧바로 몸을 돌려 성운계 출구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천명와 삼 천존 역시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세 사람이 갑자기 떠나버리자 남아있던 명하연맹 강자들도 혼비백산하여 허겁지겁 성운계 밖을 향해 도망쳤다.
“어딜!”
그때, 이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거대한 화염 구체에서 검은 빛이 터져 나와 도망치는 백골 일행을 덮쳤다.
“으악!”
빛 속에 빨려 들어간 강자들은 황급히 염력으로 몸을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염력이 피어나는 순간 그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검은 빛과 염력이 만나는 순간 그들의 염력이 뜨거운 불앞에 놓인 얼음마냥 속절없이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뭐야?”
백골의 얼굴에서는 완전히 핏기가 가셔있었다. 반투성인 그들의 염력조차 검은 빛기둥에 닿자마자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속도로 보아 머지 않아 그들도 다른 투존들과 마찬가지로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어서 빛기둥을 빠져나가시오!”
천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늘 이 자리가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말했을 텐데.”
이준이 피식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자, 공간이 순식간에 굳어버리며 빛기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대로 가두어 버렸다.
펑펑펑!
백골 장로를 비롯한 명하 연맹의 강자들과 혼족의 강자들은 미친 듯이 팔을 휘두르며 이준이 만든 공간 벽을 부수려 했지만, 그들의 실력으로는 단단한 공간 장벽에 금조차 가게 만들 수 없었다.
“으아악!”
비명소리가 들려온지 채 3분도 되지 않아 백골을 비롯한 세 명의 반투성을 제외한 모든 강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준, 날 놔주면 천명종은 앞으로 성운각을 주인으로 섬기겠네!”
점점 염력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낀 천명이 겁에 질려 하늘을 보며 간절히 소리쳤다.
“거절하지.”
하지만 이준은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악랄한 놈!”
항복조차 소용이 없자, 천명의 모공에 피가 갑자기 차오르더니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이!”
옆에 있던 백골은 굳은 얼굴로 삼 천존과 함께 천명에게서 떨어졌다.
펑!
모두가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천명의 몸이 대폭발을 일으키며 굳어버린 공간을 부숴버렸다.
하지만 이준이 인결을 바꾸자 검은 구체가 무서운 흡인력을 뿜어내며 천명의 몸이 폭발하며 생겨난 에너지 폭풍을 모두 집어삼켜 버렸다.
그렇게 허무하게 상급 반투성 강자 한 명이 죽고 말았다.
휙!
희미한 빛이 사라지는 순간, 혼족의 두 반투성이 유성처럼 빠르게 빛기둥 안에서 빠져 나갔다.
“버러지 같은 것들.”
이준이 귀신처럼 두 사람 앞에 나타나 주먹을 날리며 말했다.
백골과 삼 천존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서 이준의 주먹이 날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주위의 공간이 쇠사슬처럼 단단하게 그들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그 순간, 백골이 옆에 있던 삼 천존을 끌어당겨 자신의 방패로 삼았다.
쾅!
이준의 공격을 받은 삼 천존의 몸이 빨갛게 변하면서 용암 같이 뜨거운 열기가 그의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삼 천존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결국 삼 천존도 잿더미로 변해 사라지고 말았다.
한줌의 자비도 없이 두 명의 반투성을 살해한 이준의 모습에 백골은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너도 함께 따라가야지.”
눈 깜짝할 새에 삼 천존을 태워 죽인 이준은 곧바로 백골의 앞으로 날아와 주먹을 날렸다.
쉭!
하지만 이준의 주먹이 그의 몸을 강타하려는 순간, 공간이 매섭게 요동치더니 악마처럼 새까만 팔 하나가 번개처럼 튀어나와 그의 주먹을 가로막았다!
“혼족의 투성? 드디어 나타났군.”
이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얇은 피에 포장된 뼈처럼 앙상한 검은색 팔뚝엔 검은 기운이 느껴지는 기이한 무늬들이 가득했다.
팔뚝이 나타나는 순간, 주위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팔뚝에서 퍼져 나오는 흡인력은 영혼마저 모조리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하늘 위에 있던 검은 구체가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날아와 갑자기 나타난 검은 팔뚝을 강타했다.
쾅!
검은 구체와 혼족 투성의 새까만 주먹이 맞부딪히는 순간, 무시무시한 열기를 머금은 검은 화염이 혼족 강자의 팔뚝을 타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치익!
그 순간, 혼족 강자의 피부에 새겨진 문양이 마치 살아있는 독사처럼 빠르게 튀어 나와 검은 화염을 집어삼켰다.
챙!
이준의 화염을 제거한 검은 팔뚝은 곧바로 백골의 몸을 붙잡아 공간 균열 속으로 끌어당겼다.
“어딜 가려고?”
이준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 붙었다. 혼족의 투성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쉽게 백골을 데리고 달아나게 둘 수는 없었다.
두 투성 강자가 자신의 몸을 양쪽에서 끌어당기자, 뼈가 끊어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백골의 몸에서 분수처럼 피가 흘러나왔다.
“아아아아악!”
“여기서 죽어라!”
백골의 몸을 붙잡은 이준은 곧바로 그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의 주먹이 백골의 이마에 내리 꽂히는 순간, 그의 머리는 바닥에 떨어진 수박처럼 터져 버리고 말 것이 분명했다.
“허, 어린 녀석이 손속이 잔인하구나.”
그 때, 공간 균열 속에서 나이든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다시 한번 백골의 몸을 잡아당기면서 손을 뻗어 이준의 주먹을 쳐냈다.
쾅쾅쾅!
그와 동시에 거대한 염력 폭풍이 몰아치며 이준의 몸을 밀어냈다.
“투성이 된 것은 놀랍지만, 그 정도로 우리 혼족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지 마라. 그리고 네 아버지를 구하고 싶다면, 직접 혼계로 오거라. 기다리마.”
결국 검은 안개에 싸인 팔뚝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백골과 함께 공간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걱정 마라. 곧 갈 테니까.”
이준은 공간균열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저 공간 통로를 뚫고 들어가 혼족 놈들을 박살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최고급 투성이었던 이현조차 혼족을 당해내지 못 했는데, 이제 막 투성이 된 자신이 단신으로 혼족을 쓸어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