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화. 대전 임박
약로 역시 그들의 생각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준이 반드시 반투성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약로는 여느 때와 같이 이준이 들어간 밀실의 석문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약로님!”
그 때, 갑자기 멀리서 채린이 날아왔다. 2년 동안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운각에서 보내왔고, 약로 역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채린에게 좋은 연금비약과 여러 천연 보물을 제공하며 실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덕분에 채린은 불과 2년 만에 5성 투존에서 투존 최고급 강자가 되는데 성공한 상태였다.
“무슨 일이냐?”
채린의 굳은 표정을 발견한 약로가 긴장하며 물었다.
채린은 멀리 보이는 석문을 바라보다 어두운 얼굴로 저장반지에서 빨간 쪽지를 하나 꺼내 약로에게 건넸다.
“명하연맹이 보낸 것 입니다.”
“이게 무엇이냐?”
약로가 채린이 건넨 쪽지를 펼치며 물었다.
‘보름 후, 명하연맹 강자들은 성운각으로 집합한다. 이번 전투에서 이긴 자는 왕이 되고, 진 자는 역적이 될 것이다.’
“이놈들이…….”
“명하연맹이 일 년 넘게 조용하더니 갑자기 선전포고를 해왔습니다. 게다가 직접 성운각으로 오겠다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채린의 말에 약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년 전, 성운각과 명하연맹 사이에 충돌이 있던 이후 명하연맹은 한 번도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선전포고를 해왔다는 것은, 분명히 성운각을 무너뜨릴 수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약로 같은 상급 반투성 강자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동급의 반투성 둘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는 천명종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명종 내에는 오직 한명의 반투성만이 존재했고, 그마저도 아주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천명종과 연맹을 맺은 세력의 실력은 모두 그들만 못 했으니, 다른 곳에서 반투성 강자를 구해왔을리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당히 선전포고를 하며 성운각으로 찾아오겠다는 말까지 했으니, 또 다른 세력과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명령이다. 밖으로 흩어져있는 장로들 중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무를 맡은 자들을 전부 소환하고, 주요 도시를 지키고 있는 장로들에게 경비를 강화해 명하연맹의 습격을 방지할 수 있도록 당부하라.”
약로가 메마른 손으로 쪽지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리고, 밀정을 보내 명하연맹 내부의 소식을 알아올 수 있도록 하라. 이 녀석들이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궁금하구나.”
“네.”
채린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굳게 닫힌 석문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나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니 걱정 말거라. 내 생각에 곧 있으면 나올 것 같구나.”
채린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 말은 지난 2년간 약로가 입버릇처럼 해오던 말이었다.
“가자. 아직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다.”
말을 마친 약로는 곧바로 몸을 돌려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 후로도 한참동안 석문을 바라보던 채린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약로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끼로 뒤덮인 거대한 석문이 강하게 흔들리더니 미세한 균열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늘 성운각의 경비는 전에 없이 삼엄했다. 오늘이 바로 ‘명하연맹’이 보내온 선전포고 쪽지에 명시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명하연맹이 왜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운각 역시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을만큼 만만한 세력은 아니었다.
두 세력이 맞붙는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중주 곳곳에서 수많은 강자들이 이 대결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성운각은 소문을 듣고 흥미진진한 싸움을 구경할 생각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굳이 막지 않고 그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그와 동시에 강자들을 파견해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제압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기대 속에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 * *
고개를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다란 협곡의 정상에는 마치 예리한 칼로 반듯하게 베어버린 것처럼 평평하고 넓은 광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광장 위에는 사람들이 열을 맞춰 엄숙하게 서있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기운이 하늘 전체로 퍼져나가며 온 산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광장 중심에서 약로가 뒷짐을 진 채 평온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 뒤에는 채린과 아라, 예린, 그리고 성운각의 초대 장로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번 일과 관련된 정보를 얼마 얻지 못했습니다. 명하연맹의 일부 장로들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고 있더군요.”
성운계 입구 쪽을 바라보던 채린이 입을 열었다.
약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 명하 연맹이 무엇을 믿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아내는 것조차 어려웠다.
“성운계는 이미 최고 경계상태로 돌입한 상태입니다. 실력이 약한 제자들은 이미 몸을 피했고, 대부분의 장로들을 성운각으로 소환했습니다. 모든 게 준비됐으니 이제 명하연맹만 오면 됩니다.”
채린의 말에 약로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성운계 입구를 바라보던 약로의 눈동자가 빠르게 수축됐다.
“왔구나.”
광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운계의 입구로 향했다.
잠시 후, 커다란 구멍이 하나 생겨나더니 그 안에서 음산한 기운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약선, 오랜만이군! 잘 지내셨는가!”
찢어진 공간에서 거대한 인파가 물고기처럼 쏟아져 나오더니 유성처럼 빠르게 광장 상공으로 날아왔다.
그들이 광장으로 다가오는 순간, 성운각의 모든 장로들은 천천히 염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약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잿빛 의복을 입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회색 장발이 길게 늘어졌지만 주름살 하나 없이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그의 파란 눈동자에서는 짙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수백 년을 살아온 요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회색 의복을 입은 남자는 겉으로 보나 기운으로 보나 일반인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가 서있는 위치로만 봐도 보통 실력자는 아닐 것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천명, 아직도 안 죽었군.”
“하하! 이미 죽어서 영혼만 남았던 자네도 다시 살아났는데, 내가 죽지 않은게 뭐 그리 이상한 일이라고.”
천명이라는 사내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약로는 천명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뒤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명하 연맹에서는 이번 대전에 사활을 건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적어도 백 명에 가까워 보이는 강자들 중 절반이 투존 강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들과 천명의 실력만으로 성운각에게 선전포고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지난 몇 년간 성운각은 엄청난 속도로 세를 불려왔고, 덕분에 지금 그들의 실력은 결코 명하 연맹에 뒤지지 않을 정도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다.
“약선, 내가 옛정을 생각해 명하연맹의 땅 근처에 있는 모든 강자들을 철수시킨다면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해주지.”
천명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허공 위에 울려 퍼졌다.
“터무니없는 소리!”
채린이 외쳤다. 명하연맹의 세력 범위 근처에 있는 모든 강자들을 철수시킨다면 성운각의 영역은 절반 이상 줄어들게 된다. 즉, 이 제안은 사실상 성운각에게 중주를 떠나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도발하러 찾아온 거였네요.”
아라가 입을 열었다. 명하연맹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성운각이 이 제안을 거절하리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약로는 차분한 얼굴로 천명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러자 천명 역시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약로의 눈을 주시했다.
“약선, 어떻소? 생각은 마치셨소?”
천명의 물음에 약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명하연맹의 실력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럼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알지.”
말을 마친 약로가 손을 들어 올리자, 협곡 주위에서 눈부신 빛기둥이 솟아나 며 명하연맹의 강자들을 가두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협곡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약선. 죽다 살아나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군. 방금 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게 성운각의 마지막 살길이었는데 말이야.”
천명이 기괴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쉭!
그 때, 그의 옆에 기다란 공간 균열이 생겨나면서 음산한 기운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익숙한 두 기운을 느낀 약로의 표정이 점점 어둡게 변했다.
“영혼의 궁전, 역시 너희들이었구나!”
“끌끌, 약선. 내가 성운각을 폐허로 만들어버릴 거라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2년이나 기다려 주었으니 다행인 줄 알거라!”
검은 안개가 자욱한 공간 균열 속에서 두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백골!”
그 괴상한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약로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검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 중 해골처럼 빼빼 마른 노인은 바로 보리 나무의 땅에서 보았던 2천존, 백골 성자였다. 그의 뒤에는 초급 반투성의 실력을 가진 노인이 서있었다.
두 명의 반투성 강자, 그리고 천명까지 합하면 명하연맹은 자그마치 세 명의 반투성 강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성운각 장로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약로, 내가 말한 조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지 않겠나?”
천명이 말했다. 약로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소매 속에 숨겨진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약로 선생님, 항복해봤자 소용없어요. 혼족과 명하연맹놈들이 어떤 놈들인데요.”
채린이 차가운 표정으로 앞을 노려보며 말했다.
주변에 있던 성운각 강자들 역시 약로를 바라보며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후…….”
한참이 지나서야 약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싸운다!”
줄곧 약로의 표정변화를 예의주시하던 천명은 상대의 표정이 매섭게 변하는 순간, 오늘 성운각이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오늘 성운각이 피바다가 되겠구나.”
“그것도 좋지. 강자도 이렇게 많으니 영혼도 수월하게 수집해갈 수 있겠소.”
백골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그에게 성운각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상급 반투성 강자 두 명과 하급 반투성 강자 한 명이라면 성운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투력이니 말이다. 오늘, 반드시 성운각을 중주에서 영원히 없애버리고 말 것이다.
약로가 백골 장로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백골과 천명은 내가 맡겠다. 남은 하급 반투성은 채린, 예린, 아라 너희 셋이 막는다!”
같은 반투성이라도 하급과 중급, 상급 반투성간에는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영혼의 궁전의 하급 반투성은 이제 막 반투성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정한 반투성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채린과 아라, 예린이 힘을 합친다면 죽이는 것은 어려워도 발을 묶어놓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약로님…….”
1대 2의 대결을 자처하는 약로를 보고 채린의 표정이 빠르게 바뀌었다. 약로 는 상급 반투성 강자지만 천명과 백골 장로 역시 상급 반투성이었다. 그런 두 강자를 혼자서 상대한다니, 제 아무리 약로라도 승산이 없었다.
약로 역시 어떤 위험을 겪게 될지 잘 알고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성운각의 강자들에게 혼족의 반투성을 맡겼다가는 얼마나 많은 장로들을 잃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조심하게.”
말을 마친 약로는 곧바로 백골과 천명이 있는 곳으로 번개처럼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