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화. 실종된 영족
옥함을 받은 이준은 떨리는 얼굴로 옥함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청록색의 다람쥐가 얌전히 누워있었다. 그 다람쥐에게서 풍기는 약향을 맡는 순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보리단 아닙니까?”
한참동안 다람쥐를 살펴보던 이준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그래.”
약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 보리단은 8색 비뢰 밖에 소환하지 못했다. 그래도 너에게 보리심이 있으니 이 보리단이 있다면 반투성이 될 수 있는 확률도 올라가겠지.”
약로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성운각을 떠난 보름 동안 이준을 위해 사방을 뛰어다니며 보리단을 찾아왔다는 생각에 이준은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이준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옥함을 꼭 껴안았다.
“하하. 사제 간에 고마울게 뭐가 있더냐.”
약로가 고개를 저으며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운각과 불의 연맹에 관련된 일은 나에게 맡기고 너는 수련에 집중하거라. 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최대한 빨리 반투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3년 후 정화의 불꽃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 손에 넣을 수 있지 않겠느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화의 불꽃을 얻는 순간 혼족도 두렵지 않은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오랫동안 정화의 불꽃을 쫓아왔는데, 억울해서라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채린과 아라, 예린은 내가 맡아 가르칠테니 안심하고 들어가거라. 그녀들도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 기회만 있다면 아주 빠르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약로는 이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뒤에는 채린, 아라 등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말없이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 스승님.”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저장반지에서 옥병 하나를 꺼냈다. 옥병의 입구에는 얇은 화염막이 씌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서 미약한 영혼의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승님, 이건…… 한샘의 영혼입니다. 어찌됐든 이 녀석은 스승님이 처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준이 약로에게 옥병을 건네며 말했다. 약병을 바라보는 약로의 표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진한 슬픔이 묻어났다. 고아였던 아이를 친아들처럼 여겨 그의 모든 능력을 전수해주었지만, 결국 제자의 배신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 했었다. 한샘의 배신은 약로의 마음에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흉터를 남겼다.
옥병을 받는 약로의 메마른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예전보다 더 늙어버린 약로의 쓸쓸한 표정에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진 이준은 곧바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동안 스승님을 아버지처럼 모셨습니다. 저는 절대로 스승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준의 갑작스런 행동에 약로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이준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이준을 끌어올리기도 전에 채린이 이솔을 품에 안고 다가와 말없이 무릎을 꿇었다.
“녀석들‥‥.”
약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시울은 이미 붉게 변해 있었다. 그는 그제야 하늘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제자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
이솔이 보석처럼 빛나는 눈망울로 약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아이고, 착한 아가…….”
약로가 채린의 품에서 이솔을 들어 올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서 일어나거라. 내가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했구나. 그렇다고 내가 설마 죽기라도 하겠느냐?”
그의 말에 이준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채린을 일으켜 세우고는 옥함을 손에 든 채 산속에 위치한 거대한 밀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도 다 됐으니 들어가 볼게. 이번엔 또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끝날 것 같진 않아. 그 동안 스승님 말씀 잘 듣고 있어.”
“응.”
이준의 말에 채린과 아라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 몸조심 하십시오.”
이준은 약로를 향해 인사를 올린 뒤 몸을 돌려 석문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쿠웅-!
이준이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석문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왔다.
모든 사람들은 말없이 거대한 석문을 바라보았다. 이번 수련은 그리 짧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가자. 이제 우리는 이준이 반투성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꾸나.”
약로가 이솔을 안은 채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의 수련 기간이 무려 2년이나 걸릴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2년. 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준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약로 등의 사람들은 이준이 보리심과 보리단의 도움을 받아 금세 반투성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보리심이 있다고 곧바로 투성의 성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구전 투존 전성기 단계에 들어선 이준이라면 늦어도 일 년 안에 반투성이 되리라는 것이 모두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다. 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와도 열리지 않는 석문 위에는 이미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이준이 수련을 하고 있는 밀실은 성운각의 금지구역이 되어 몇몇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약로가 영혼의 힘을 통해 이 수백 미터 크기의 산속의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산속 깊숙한 곳에서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강해진 이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 * *
이준이 수련을 하는 동안에도 중주에는 소란이 끊이질 않았다. 혼족의 복수가 생각보다 일찍 시작되지 않은 덕에 성운각은 그 기회를 노려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갔다.
수많은 강자들이 하나둘 풍존과 반투성이 된 약로의 명성을 듣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히 약로가 보리단을 제련할 수 있다는 소식이 퍼진 후에는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투존 최고급 강자들까지 모여들어 성운각의 초대장로를 자처했다.
물론 약로가 명성을 듣고 찾아온 초대 장로들에게 곧바로 보리단을 넘겨줄 리는 없었으니, 모여든 강자들은 공을 세우기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그렇게 성운각은 중주에서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온 천명종과 같은 세력들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세를 불려나갔다.
그러나 성운각이 커질수록 성운각과 이준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천명종이 가만히 앉아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과거에는 성운각의 영역이 좁아 천명종과 서로 충돌할 일이 없었지만, 성운각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결국 천명종과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 세력 중 누구도 우위를 잡지 못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천명종 쪽으로 균형추가 기울고 말았다. 천명종이 갑자기 빙하곡, 풍뢰각 등 중주에서 유명한 종파들과 ‘명하연맹’이라는 이름으로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힘을 합쳐 연맹을 결성하면서 성운각은 순식간에 열세에 처하고 말았다.
이에 약로와 풍존은 성급하게 명하연맹에 맞서지 않고 차분히 퇴각하며 중요 거점들의 방어를 강화하는 동시에 공간 통로를 건설해 중요한 도시들을 전부 하나로 연결하는 작전을 펼쳤다.
약로의 기민한 대처로 인해 성운각의 중요 거점들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명하연맹의 강자들이 성운각의 도시를 공격한다 해도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명하연맹은 결국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를 선택했다. 성운각에서 상당수의 도시를 포기하고 퇴각을 선택하면서 상당한 이익을 봤기 때문에 그들 역시 목숨을 걸고 전쟁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하연맹의 이런 결정으로 인해 중주의 수많은 강자들은 천명종과 빙하곡, 풍뢰각이 손을 잡고도 성운각 하나를 무너뜨리지 못했다며 그들을 비웃었다.
* * *
명하 연맹이 퇴각을 결정하며 중주에는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8대 세력 중 하나인 영족(靈族)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다시 중주 전체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이준이 천상 무덤에서 나올 때, 영족의 이공간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고족내에 돌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족의 이공간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 안에는 단 하나의 생명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백만이 넘는 사람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소식에 중주의 유력한 세력들은 물론이고 고족을 비롯한 8대 세력마저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사라진 것은 투기 대륙 전체를 들었다 놨다하는 8대 세력의 한축을 차지하고 있는 영족이었다.
이에 모든 세력들이 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중주에서 여러 추측이 난무하고 있을 때, 8대 종족들 사이에서도 크게 의견이 갈렸다. 사실 그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지만 적도, 연맹도 아닌 애매한 사이에 불과했다.
아주 먼 옛날, 8대 세력은 ‘태령황제의 옥’을 얻기 위해 엄청난 대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마지막 투제가 남긴 그 물건 속에는 투제가 될 수 있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8대 세력이라 해도 눈이 뒤집히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 했고, 전쟁은 태령황제의 옥을 8등분해 나눠가지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들은 영족이 사라진 게 어쩌면 8대 종족 중 한 종족이 한 짓이며, 그 목적은 바로 영족의 손에 잇는 태령황제의 옥을 빼앗기 위해서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8대 세력 중 영족을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은 고족과 혼족 뿐이었다.
고족은 8대 세력 중에서도 명실상부한 최강의 세력이었다.
반면 혼족은 8대 세력 중 가장 역사가 깊은 곳으로, 그 실력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어 누구도 그들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 했다. 누군가는 혼족이 고족보다 강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정말로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따라서 모두들 고족이나 혼족이 이런 일을 벌인 것 아니냐고 의심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족과 영족, 고족과 혼족을 제외한 나머지 네 세력은바짝 날을 세운 채 고족과 혼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고족이든 혼족이든 태령황제의 옥을 손에 넣기 위해 영족을 친 것이라면, 나머지 네 세력도 언제 공격당할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해 고족은 자신들은 영족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완전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혼족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세력들과 대화조차 하지 않고 제 갈길을 갔다.
그렇게 두 세력 모두 침묵을 유지하는 가운데 시간이 지나면서 영족에 관한 일도 차츰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 * *
영족의 일로 발생했던 풍파가 잦아드는데는 고작 반 년 정도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중주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사건들이 터지니, 딱히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지 않는 이상 8대 세력의 이야기라 해도 채 1년을 가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렇게 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찾아왔다.
이준이 수련에 들어간 지도 벌써 2년이었다.
2년 동안 이준이 들어간 산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고, 그저 석문 위를 가득 뒤덮은 거친 잡초들만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무려 2년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일부 초대 장로들 사이에서 무언가 일이 잘못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반투성이 되었다면 분명 하늘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날 텐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현상을 목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약로 역시 그들의 생각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준이 반드시 반투성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