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화. 백 번의 환생
고청양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이은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퉤.”
혼옥과 구봉은 입속에 고인 핏덩어리를 뱉으며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이준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이 방법으로도 이준을 깨울 수 없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보리나무가 이준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운도 더럽게 좋군.”
방금 그 충격으로 인해 혼옥과 구봉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보리나무의 나뭇가지 하나조차 꺾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리나무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이준을 바라보며 또다시 질투 섞인 분노가 치솟았지만.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가만히 이준을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혼옥과 구봉이 조용해지자 이곳의 분위기도 함께 무거워졌다. 두 세력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자, 이준이나 혼옥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멀리 떨어져 혹여나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는 것을 막으려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환각에 빠져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
고청양이 이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갈 방법은 없어 보여요. 조금 전에 시도해봤지만 공간 균열은커녕 선도 그을 수 없었어요. 우선 오라버니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어요.”
이은의 말에 고청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청양 역시 시도해봤지만 공간이 너무 견고하게 응집되어 있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그나마 이곳은 생명력이 강해 한동안은 아무 일도 없을 거야.”
* * *
알 수 없는 공간 속에 떨어진 그들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보리나무의 공간의 힘을 부술 수가 없었으니 이제는 모두가 가만히 앉아 이준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수련상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생기가 가득한 보리나무의 에너지는 그들에게 있어 천하에 비할 바 없는 영약이었으니, 멍하니 이준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수련이라도 하자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고족의 강자들과 채린 등은 번갈아 가며 혼족과 봉황족의 강자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 동안 보리나무 안에 앉아있는 이준은 마치 호박 속에 갇힌 모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숨조차 쉬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함에 미쳐가기 시작했다. 이곳에 갇혀 평생 나가지 못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7일이 흐른 후, 결국 참지 못하고 보리나무와 최후의 승부를 벌이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보리나무 안에 앉아있던 이준의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굳게 감긴 눈이 조금씩 열렸다.
생명의 기운이 흐르던 공간에 갑자기 이상한 파동이 흐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은 거대한 나무 안에 앉아있는 이준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마치 천 년은 산 사람의 그것처럼 깊어져 있었다.
“오라버니…….”
이은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소름 돋는 눈빛이군.”
하지만 혼옥 등 사람들은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이준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상대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이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보리나무 안으로 들어가 수련을 한 사람은 고적에서나 봤기 때문에 수련한 이후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준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천천히 바라보다 이은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으, 은아…….”
쉬다 못해 낡아버린 듯한 목구멍에서 이준의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투가 보리나무에 들어가기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의 눈동자 속에 묻어있던 지친 기색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그의 영혼 깊숙이 숨어버린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
이준은 고개를 들며 입에서 청록색 기체를 길게 내뱉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짝씩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준의 몸이 보리나무에 닿는 순간, 나무 표면은 마치 액체가 된 것처럼 부드럽게 변화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보리나무를 빠져나온 이준은 뻐근한 허리를 움직이며 맑게 웃음을 지었다. 이준이 본래 목소리를 되찾자 이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준 오라버니, 괜찮은 거예요?”
이은이 빠르게 다가가 이준의 몸 곳곳을 훑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준이 이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 이준은 보리나무 안에서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였지만, 그의 영혼은 나무 안에서 백 번의 환생과 수련을 겪은 상태였다.
고작 한 달 동안 이준은 투성 강자와의 싸움조차 하찮게 느껴질만큼 수많은 생사의 위기를 넘나든 상태였다.
“고맙다.”
이준이 고개를 돌려 보리나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쏴아-.
이준의 감사에 답하듯 한 달 동안 미동도 보이지 않던 보리나무가 강하게 흔들렸다.
“네 기운을 느낄 수가 없는데? 설마 투성이 된 건 아니지?”
고청양이 다가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고족 내에 있는 투성 강자들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게 쉽게 될 리가 있습니까.”
하지만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금의 이준은 구전 투존 전성기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 아직 투성이 되지는 못했다.
물론 다른 사람이라면 십 년이 걸려도 이루기 어려운 성과를 한 달 만에 이룬 것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준의 부정에 고청양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으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는 이준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감조차 잡지 못 하고 있었다. 이것은 상대가 자신의 실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잠시 후, 이준의 시선이 혼옥과 구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순간, 혼옥과 구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눈빛으로 봐서는 이준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하지만 이준은 그들을 보며 옅은 조소를 띨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보리나무에 들어가기 전에는 저들을 두려워했겠지만, 지금은 저 두 사람을 손 안에서 가지고 놀 자신이 있었다.
혼옥과 구봉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특히 혼옥은 더 이상 가식적인 미소조차 짓지 못하고 온 몸에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지금까지 혼족의 그 미친놈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그에게 이런 위기감을 주지 못 했었다.
“보리나무에서 수련하더니, 꼭 사람이 바뀐 것 같네.”
구봉이 중얼거렸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 이준을 죽여 버리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푸스스스스.
그때, 보리나무에서 갑자기 청록색의 안개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보리나무의 힘을 봤던 혼옥 등의 강자들은 황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보리나무 안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청록빛 구슬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보리구슬이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 큰 소리로 외쳤다.
“전부 보리구슬이야!”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떨리는 눈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청록빛 구슬을 멍하니 바라봤다. 바깥 세계에선 보기도 어려운 보리구슬이 여기선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니, 두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빼앗아라!”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염력을 폭발시키며 녹색 구슬을 미친 듯이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훗.”
하지만 이준이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살짝 흔들자 허공에 떠있던 녹색 구슬들이 마치 주인의 명령을 따르듯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손을 피해 이준에게 날아갔다.
“고마워!”
보리구슬을 손에 쥔 이준이 보리나무를 보며 크게 외쳤다. 그가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기자, 보리구슬들이 차례대로 이은, 채린, 고청양 등 사람들에게 날아갔다.
“고맙다.”
고청양, 고형 등 몇몇 사람들은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앞에 떠있는 보리구슬을 저장반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하, 별 거 아닙니다.”
이준은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고개를 돌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준 앞에 있던 보리구슬 몇 개가 중립을 지키고 있던 강자들에게 빠르게 날아갔다.
이준의 갑작스러운 선의에 몇몇 강자들은 잠시 당황하다 이내 재빨리 보리구슬을 붙잡았다. 잠시 후, 그 뒤에 일어날 일에 섞이지 말라는 이준의 뜻을 알아차린 그들은 황급히 먼 곳으로 몸을 날렸다.
혼옥, 구봉 등 사람들은 굳은 얼굴로 멀리서 보리구슬을 나눠주고 있는 이준을 노려보았다.
“이 개자식이, 죽여 버리겠어!”
구봉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
구봉의 살기 가득한 목소리에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흉악마수 같이 음산한 그의 눈빛이 빠르게 구봉에게 향했다.
구봉은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냉정함을 찾고 어두운 표정으로 이준을 노려보았다.
“우리도 이곳에 오기 위해 수많은 난관을 넘었는데, 보리구슬까지 전부 가져가버리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이준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도리? 설마 그게 당신 생각은 아니겠지요?”
이준은 자신의 실력이 크게 늘지 않았더라면 언제든 상대가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구봉은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살의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쥔 채 혼옥을 바라봤다.
“혼옥. 설마 저 녀석이 보리구슬을 전부 가져가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요?”
혼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준 군. 우리 혼족과 봉황족에게만 보리구슬 8개를 나눠 주시지요. 그럼 얌전히 넘어가겠습니다.”
한참을 침묵하던 혼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이준은 손을 펴보았다. 현재 그의 손에는 보리구슬 11개가 남아있었다. 그들에게 8개를 주고나면 3개 밖에 남지 않는데, 순순히 넘겨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 보리구슬을 주게 되면 앞으로 두 세력에서 투성이 출현할 수도 있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과 원한관계에 있는 상대가 힘을 기르게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짤막한 한 마디에 현장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독기어린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던 혼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를 처리하는 수밖에.”
쿵!
혼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혼족과 봉황족 강자들의 몸에서 염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혼족과 봉황족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고족의 강자들 역시 차가운 표정으로 염력을 뿜어냈다.
“혼옥. 혼족 놈들이 정말로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
“흥, 우린 한 번도 너희 고족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
고청양의 말에 혼옥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픽 웃으며 이준을 쳐다봤다.
“네 명성은 우리 혼족에서도 자자하다. 사 천존도 망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지. 진작 널 찾아오려 했지만 그 영감이 원하지 않아 널 지금까지 살려둔 것 뿐이다. 하지만 오늘이 네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검은 염력이 순식간에 혼옥의 몸을 뒤덮으며 터져 나왔다.
혼옥에게서 퍼져 나온 강한 파동을 느낀 이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준은 나에게 맡기시오. 구봉. 나머지 녀석들은 하늘 봉황족과 다른 혼족 강자들에게 맡기는 것으로 하지요.”
혼옥의 말에 구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을 바라봤다.
“저 녀석은 내가 맡고 싶었지만, 혼옥 군이 그리 말씀하시니 양보하겠습니다.”
“가라!”
쿵!
구봉의 외침이 울려 퍼지는 순간, 고족 강자들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하며 염력이 천지를 뒤덮을 기세로 터져 나왔다.
“하!”
이은이 소맷자락을 강하게 휘두르자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염력이 곧바로 강자들의 눈앞까지 퍼지다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수적으로는 혼족과 봉황족의 강자들이 위였지만, 실력면에서는 역시 이은을 비롯한 고족의 젊은 강자들이 한수 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