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2화. 통과
쉭!
전방 수백 미터 앞에는 혼옥 일행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목숨을 발판삼아 자신들의 염력을 최대한 아끼면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바로 뒤에는 하늘 봉황족이 따라붙어 있었다. 수많은 봉황족의 강자들은 앞장 선 구봉이라는 오색홍채 남자의 뒤를 바짝 따르며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겨우 깨어났지만 여전히 뺨이 붉게 부어오른 봉연이 있었다.
고개를 들다 이준과 눈이 마주친 봉연은 곧장 이를 꽉 깨물며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조금 전 있었던 일 때문인지 차마 그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출하지는 못했다.
이준의 시선은 봉황족을 지나쳐 그 뒤를 향해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세력들은 모두 체력을 완벽하게 보존한 상태로 거침없이 앞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벌써 마수 떼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뒤로 얼마나 더 무시무시한 녀석들이 있을까…….”
고개를 돌려 하늘끝을 바라보자, 새빨간 마수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 끝을 넘어갔을 때 더 흉악한 마수들이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크르릉!”
흉포한 마수의 울음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그 순간, 이준은 주변의 공기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뒤쪽에 오던 녀석들은 전부 죽은 건가…….’
뒤쪽에는 적어도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투존 강자들이 모여 따라오고 있었지만, 수천에 달하는 마수떼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여러분, 모두 조금 전 진영을 유지하십시오. 청양씨, 저와 함께 길을 틉시다!”
이준은 가볍게 숨을 한 번 고른 후, 빠르게 진영의 최전방으로 나아갔다. 마수들의 주의를 끌게 되는 순간 상황이 더 어려워질 것이 뻔하니 최대한 빠르게 앞으로 치고나가야 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고청양이 이준의 곁에 나타났다. 삼각형 진영을 만든 그들은 가장 약한 사람을 가장 가운데에 배치해 최대한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진영을 꾸렸다.
“마수들이 몰려옵니다. 갑시다!”
이준은 눈동자 속을 가득 채우고 달려드는 마수들을 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곧이어 이준의 몸에서 퍼져 나온 천지의 불꽃이 백 미터가 넘는 뜨거운 불의 용이 되어 거대한 꼬리를 마구 휘둘렀다.
“바다의 힘!”
그와 동시에 고청양의 목구멍에서부터 우렁찬 고함이 터져 나오며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마수들의 머리 위를 강타했다.
뒤에 있던 이은, 채린, 진율희, 아라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번개처럼 손을 휘두르며 백 미터 범위 내에 들어오는 마수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속전속결로 마수들을 무찌른 이준 일행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수백 미터를 날아갔다.
“저 녀석들도 꽤 잽싸구나.”
속도를 높이던 이준의 시선이 앞에 있는 혼옥에게 향했다. 그들은 이제야 진짜 실력을 뽐내며 가까이 접근하는 모든 마수들을 단칼에 베어나가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어?”
이준이 화룡으로 앞길을 막는 마수들을 깨끗하게 처치하며 물었다. 아직은 버틸 만했지만 계속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미 깊은 곳까지 들어왔어요. 최상급의 마수들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30분만 더 가면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이곳은 우리도 와본 적이 없어서 알고 있는 정보로만 움직여야 해요.”
“30분이라…….”
이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수들을 일일이 모두 상대하지 말고 속도를 높입시다!”
이준이 크게 외치며 더욱 더 속도를 높였다.
뒤에 있던 사람들 역시 주위에 있는 마수들을 계속해서 제거하며 이준의 뒤를 빠르게 따라갔다.
* * *
거대한 마수의 바다 속에서 몇몇 무리의 사람들이 격랑 속의 배처럼 불안정하게 비틀거리며 앞으로 날아갔다.
쿵!
이준의 주먹이 5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마수의 머리에 박혔다.
“고맙군.”
고청양이 가볍게 웃으며 이준에게 감사를 표했다.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의 이마는 이미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연금비약을 아무리 먹어도 소용이 없겠어.”
이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혼옥이 보이지 않는데요.”
이은이 어두운 표정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젠장, 이미 빠져 나간거야!”
“괜찮아요. 그 놈들이 사라졌다는건 우리도 곧 출구에 도달한다는 의미예요.”
이은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속도를 높입시다!”
그 순간, 이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염력을 쥐어짜내 9성 투존급의 마수 몇 마리를 그대로 날려 버리고 미친 듯이 앞으로 날아갔다.
쾅!
이준의 머리 위에 자갈색의 화룡이 다시 나타나 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마수와 강하게 부딪혔다. 그 순간, 마수의 몸이 그대로 터져버리면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그 틈을 타 빠르게 마수떼를 통과한 이준은 곧바로 바닥에 내려앉아 염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준이 발을 딛고 있는 곳 주위에는 방금 전까지 마수들과 사투를 벌였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마수의 흔적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주변을 돌아보던 이준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십 미터 밖에서 수많은 마수들이 거대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미친 듯이 포효하고 있었지만, 단 한 마리도 달려 들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온 건가?”
마수들이 달려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이준의 입에서 그제야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고개를 돌려 앞쪽을 바라보던 이준의 눈에 풀잎이 무성한 나무가 홀로 광활한 평원 위에 우뚝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 나무에서 서서히 퍼져 나오는 맑은 기운이 시시때때로 바뀌며 기이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저게 바로 보리나무구나.”
이준의 심장이 또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보리나무?!”
이준이 멀리 보이는 나무를 넋 놓고 바라보던 그때, 뒤쪽에 서있던 고족의 강자들과 아라 등도 나무를 발견하곤 환호성을 내질렀다.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던 보리나무가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다니,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엄청 큰데…….”
아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들이 서있는 곳에서 보리나무까지는 아직도 거리가 꽤 있었지만,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나뭇잎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혼족 사람들은 이미 저쪽으로 갔을 겁니다. 우리도 빨리 움직여야 해요.”
이준이 침착하게 먼저 앞으로 걸어 나가자, 다른 사람들도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 마수바다 쪽이 또 한 번 소란스러워지더니 몇몇 사람들이 힘겹게 빠져 나와 텅 빈 공터에 내려왔다.
“저게 보리나무야?”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역시 보리나무였다. 모든 사람들은 커다래진 눈으로 거대한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준 일행이 이미 보리나무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구봉의 표정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저들을 따라간다!”
“예!”
봉황족 강자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며 빠르게 이준 일행의 뒤를 쫓아 날아갔다.
* * *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이준은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보리나무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보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그 나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경외감이 느껴졌다.
잠시 후, 점점 더 속도를 높이던 이준 일행의 시야에 익숙한 뒷모습이 나타났다.
“혼옥?”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만히 서있는 그를 바라보며 이준 일행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왜 여기서 여유롭게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조심해요.”
이준은 조용히 경고를 보낸 뒤 속력을 낮추며 혼옥 일행과 멀지 않은 곳에서 우뚝 멈춰섰다.
고개를 들어보니 늠름하게 서있는 보리나무가 보였다. 가까이서 보는 보리나무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수천 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몸통은 마치 하늘과 땅을 하나로 잇는 기둥과도 같았고, 하늘에서 따스한 햇볕이 내려와 보리나무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햇빛에 비친 무성한 이파리를 보는 순간, 상쾌한 기운에 마음속 깊은 곳까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준은 보리나무에서 왠지 모를 공포를 느꼈다.
그 불안감은 한층 강력해진 영혼에서 느껴지는 것이었다. 지금의 이준은 어떠한 위험도 모두 감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이 공포의 이유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투기대륙의 가장 진귀한 보물 중 하나인 보리나무이니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게 이상한 거겠지. 게다가 이 나무가 정말로 아주 오래된 거라면 이미 지혜가 생겨났을 거야.’
이준은 굳은 표정으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보리나무에게 영혼이 있어 수련을 할 수 있었다면, 분명 투기대륙에서 가장 무서운 생물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쉭!
잠시 후, 봉황족과 다른 세력의 강자들 역시 하나둘씩 이준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이준과 혼옥 등을 바라보며 서서히 자리에 멈춰 섰다.
“어렵게 여기까지 와놓고, 왜 멈춰있는 겁니까?”
구봉이 말했다.
그러자 앞에 있던 혼옥이 억지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하하. 모두 오셨네요. 다들 보리나무를 위해 모였는데, 당연히 기다려야지요.”
그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혼옥이 제 아무리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도 이 곳까지 온 사람들은 모두 그의 본 모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혼옥은 또다시 빙긋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뒤에 있는 보리나무를 가리켰다.
“저곳이 바로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사실 마수바다를 지나왔다 해도 최대의 난관은 다름 아닌 저 보리나무가 있는 곳입니다.”
“에?”
그의 말에 모두 의아하다는 듯 혼옥을 바라보았다.
“혼족과 고족의 기록에 의하면 아주 오래 전 한 선조님이 보리나무를 발견한 적이 있었으나 그 후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 이후 한 강자가 소식이 끊긴 선조님을 찾으러 갔을 땐 이미 보리나무와 함께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였다고 합니다.”
혼옥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조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순 없지만, 분명 저 보리나무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겁니다.”
“참고로, 그 당시 선조님은 반투성이었습니다.”
“반투성?”
그의 말에 이준 일행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러니 모두 보리나무를 우습게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번에 가장 넘기 어려운 난관은 바로 저 보리나무니까요.”
“차마 혼자 가기 무서워서 여기서 기다렸나보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청양이 혼옥을 흘겨보며 말했다.
혼옥은 미소를 지을 뿐 굳이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거대한 보리나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어차피 사람들도 다 모였으니, 보리나무가 있는 곳이 도대체 어떤지 한 번 실험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심 하세요.”
이준이 혼옥의 뒷모습과 보리나무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한 뒤,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혼옥의 말이 진짜든 가짜든 여기까지 힘겹게 와놓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구봉 등 다른 사람들 역시 잠시 머뭇거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의 생각 역시 이준과 같았다. 그렇게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