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화. 두 여자의 만남
하지만 이준의 예상과 달리 평원의 중심 지대에 가까워졌음에도 8대 세력의 강자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평원의 중심에는 길이가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석대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석대 위에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강자들이 줄줄이 모여 있었다.
석대 위를 바라보던 이준의 눈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석대를 차지하고 있는 한 무리 중앙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여자 아이를 발견한 순간, 이준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이준이 석대에 도착했을 때, 가만히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여자 하나가 무언가를 느낀 듯 번쩍 눈을 떠 석대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이준을 발견한 그녀의 눈에 순간 살기가 돌았다. 이준만 아니었다면 용황 열매는 용족이 아니라 봉황족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다.
“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네.”
이준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곧바로 석대 위로 뛰어 올라 고족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가 석대 위에 발을 올리는 순간, 싸늘한 목소리가 석대 위에 울려 퍼졌다.
“여긴 네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꺼져!”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봉연?”
이준과 봉연 사이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에 석대 위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오라버니?”
그때, 석대 위에 앉아있던 무리 중 한 곳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 좀 곤란해 보이는데? 하늘 봉황들과 문제가 있는 모양이지?”
곧이어 은색 의복을 입은 남자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는 바로 이준과 함께 천상무덤에 들어가 수련을 했던 ‘고화’였다.
그의 말에 이은의 시선이 곧바로 봉연에게로 향했다.
“우선 지켜보자. 이준이라면 알아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이준이 9성 투존이 되었다는 걸 한 눈에 알아본 고청양이 말했다.
이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의 주변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바로 채린이었다. 그녀를 발견하는 순간, 이은의 눈동자가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광장에 순간적으로 적막이 흘렀다. 이준은 이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마. 시끄럽게.”
하지만 이준은 봉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일행들과 함께 석대 위로 올라올 뿐이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이준의 태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봉연은 곧바로 손을 들어 염력을 뿜어냈다.
쾅!
갑작스런 공격에 이준은 발걸음을 멈추며 자갈색 화염을 피워내 그녀의 염력을 불태워 버렸다.
“흥!”
그 순간, 거대한 에너지가 폭발하며 날카로운 봉황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이건 분명 고대 하늘 봉황의 힘이군.”
지금 그녀의 기운은 고적에서 발견한 고대 하늘 봉황에게서 느껴지던 에너지와 비슷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봉연의 실력이 폭등한 것은 틀림없이 고대 하늘 봉황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이준. 지금까지 받은 고통을 갚아줘야겠어!”
봉연이 증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는 용황 열매를 빼앗긴 대가로 봉황족 내에서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나마 그녀가 가지고 돌아간 하늘 봉황의 뼈 속에 고대 하늘 봉황의 피가 남아 있어 간신히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피는 너무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 뼈를 그대로 잘라내면 피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순수한 피를 얻어내기 위해 봉황족의 강자들은 뼈를 그대로 몸속에 이식하는 방법을 택했고, 이식 과정에서 뼈를 잘라내는 고통에 몸부림 쳐야만 했다.
그렇게 그 고통을 견디고 성공한 젊은 강자는 총 10명 중 단 2명이었고, 그 2명 중 한 사람이 바로 봉연이었다.
이식에 실패한 8명은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허!”
봉연의 갑작스런 행동에 채린을 비롯한 이준의 일행들도 곧바로 살기를 피우며 싸움에 돌입할 태세를 갖췄다.
“네가 이준이구나? 연이가 너와 얘기를 좀 하고 싶어하니 혼자 올라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손해일 거야.”
그때 봉연의 뒤에 서있던 백색 의복의 남자가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매우 기이한 오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던 봉황족의 다른 강자들 역시 그리 좋지 못한 눈빛으로 이준 일행을 노려보았다.
“손해는 그쪽일 텐데?”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른 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청양? 감히 봉황족의 문제에 끼어들겠다는 건가?”
“하하. 일 대 일 시합에 끼어들 필요는 없지. 그저 여럿이서 괴롭히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야.”
말을 마친 고청양은 씩 웃으며 이준에게 시선을 돌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은 그의 신호에 웃음으로 답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고족 무리에 섞여있는 이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은 역시 이준을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의 웃음은 마치 한 때 피는 꽃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하, 좋지. 그럼 한 번 해보거라.”
오색홍채를 가진 남자가 고청양을 노려보며 말했다.
뒤이어 봉연이 이준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준, 나올 용기는 있으려나?”
봉연의 도발에 이준인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오직 보리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강자들이 모인 곳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원하는 대로.”
봉연의 실력을 가늠할 순 없지만, 기껏해야 삼전 투존 전성기 강자 수준 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9성 투존 강자에게는 봉연이 괴물처럼 보이겠지만, 이준에게 있어 삼전 투존 전성기 정도는 크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하!”
이준이 전투를 받아들이자 봉연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오색비단이 하늘을 뒤덮은 채 날카로운 칼처럼 이준에게 쏟아져 내렸다.
“여전하군. 폭등한 힘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다니, 마치 보물을 주운 거지같네.”
그러나 이준이 봉연을 조롱하며 가볍게 팔을 휘두르는 순간, 짙은 화염이 뿜어져 나오며 봉연의 비단을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봉연을 상대하는 이준의 발걸음은 이상하리만치 여유가 넘쳤다.
이준의 행동에 봉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기껏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강해졌는데 이준의 상대가 될 수 없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늘봉황의 그림자!”
분노 섞인 봉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거대한 하늘 봉황의 환영이 솟구쳤다.
“까악!”
곧이어 하늘 봉황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준은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봉황의 환영을 보는 순간, 봉연의 갑작스런 성장이 하늘봉황의 유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준, 죽어라!”
“여전히 잔기교나 부리고 있군.”
거대한 봉황의 환영이 이준을 덮치려는 순간, 그의 두 눈에서 눈부신 금빛이 터져 나왔다.
번쩍이는 금빛이 황금색 태양처럼 광장 전체를 환하게 비췄다.
갑자기 눈을 찔러오는 빛에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이준에게 돌진하던 하늘봉황 환영이 이미 이준과 강하게 부딪혔다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쾅!
광장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강하게 흔들렸다. 바닥에서 느껴지는 강한 진동에 이준과 가까이 있던 강자들 중 몇 몇이 견디지 못하고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사람들은 억지로 눈을 뜨려 해봤지만 먼지에 시야가 가려져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시건방진 녀석.”
일부 강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날린 투존 전성기 강자의 공격에 맞대응하다니, 보나마나 시체가 되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훗.”
봉연은 승리를 확신한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쿵!
바로 그때, 뿌연 먼지 속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지더니 거대한 황금빛이 빠르게 줄어들며 귀신처럼 봉연의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봉연의 앞에 선 이준은 죽기는커녕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봉연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다시 공격을 하기도 전에 이준의 주먹이 봉연의 얼굴 앞으로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퍽!
봉연은 그대로 날아가 바닥을 쓸며 백 미터 이상을 날아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새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네 힘이 어디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힘을 네 것을 만들지는 못 했군.”
이준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힘은 스스로 단련해야만 나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이준도 이현에게 힘을 물려받았지만, 이렇게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 자신을 다스리고 또 다스렸다. 봉연과 같이 행동했다면 영원히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없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개 같은 놈이!”
이준의 말에 하늘 봉황족의 강자들이 주먹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멈춰. 연이가 저 자보다 못한 거지. 부축해 오거라.”
그때, 오색홍채를 가진 남자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꽤 괜찮은 실력이군.”
“내 실력을 확인 해보고 싶으면 다음번에는 직접 나오시오. 여자를 앞에 내세우는 건 너무 비겁하지.”
“하하, 알겠소. 다음번엔 내가 직접 나서도록 하지.”
“언제든지.”
대화를 마친 이준은 그대로 등을 돌려 채린 등 사람들과 함께 고족이 위치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오색 홍채를 가진 사내의 손에 쥐고 있던 옥패가 가루로 변하며 발밑에 떨어졌다.
“오라버니. 이번엔 많이 늦으셨네요.”
이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분이 그 채린 언니죠? 오라버니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이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채린은 약간 당황한 듯 이은을 바라보았다.
어쩌다보니 이준과 자신 사이에 둘의 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가 생겨버렸고, 둘의 관계 역시 부부와 비슷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준의 마음은 언제나 이은에게 향해 있었고, 이는 이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기묘하게 엉켜있는 관계이다 보니 채린은 이은을 보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 했다.
두 사람 중간에 서있던 이준은 어색한 기류를 느끼곤 마른기침을 연발하더니 한쪽으로 가 자리에 앉았다.
고청양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무언가 분위기가 미묘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채린을 바라봤다. 그들 역시 채린과 이준의 관계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아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은이 가만히 있으니 그들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도 보리 나무 때문에 온 거죠?”
“응.”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이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준은 이은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것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안으로 더 들어가면 보리 나무의 땅 가장 깊은 곳에 도착해요. 그곳에 바로 보리나무가 있고요.”
이은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마수들이 구름처럼 모여 보리 나무를 지키고 있어서 뚫고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며칠 동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시험해봤는데 결국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고 목숨을 잃거나 포기하고 되돌아왔어요.”
“어쩐지 다들 피비린내가 진동하더라니…….”
“네. 그래서 지금은 다함께 힘을 합쳐야만 들어갈 수 있어요.”
이은이 기다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임시 동맹의 중심은 혼족의 차기 족장이라, 오라버니를 받아줄지 모르겠어요.”
이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의 시선이 빠르게 그녀의 손끝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