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9화. 9성 투존
천마 구렁이가 얌전히 똬리를 틀자, 이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예린의 뱀의 눈은 뱀 계열 마수들을 통제하는 데 있어 세상 무엇보다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실력으로 천마구렁이를 통제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상대는 5전 투존 전성기 수준의 마수가 아니던가.
쉭!
잠시 후, 살기가 사라져버린 천마구렁이의 거대한 몸이 강하게 떨리더니 검은 안개를 뿜어내며 미친 듯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역시 어려운 상대야…….’
천마 구렁이가 뱀의 눈에 저항하는 모습을 본 이준은 곧바로 천지의 불꽃으로 빠르게 놈의 몸을 감싸 검은 안개를 증발시켰다.
“저항하지 못하게 막아야 해!”
이준이 소리를 지르자, 칠색 이무기로 변한 채린이 천마구렁이를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천마구렁이의 몸에서 퍼져 나오던 안개 역시 다시 몸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아라, 진율희와 청성 장로등 사람들도 염력을 뿜어내 전력으로 천마구렁이를 억제했다.
강한 압력이 숨통을 눌러오자 천마 구렁이도 더 이상 발버둥 치지 못 했다.
“예린아, 빨리!”
천마구렁이가 다시 저항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이준이 예린을 재촉했다.
“네!”
이준의 신호에 맞춰 예린의 두 손이 빠르게 인을 맺기 시작했다. 인결이 완성되는 순간, 몸속에서 낮은 포효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그녀의 몸 뒤에서 천마 구렁이보다도 더 거대한 머리 아홉달린 뱀의 환영이 나타났다.
천마구렁이의 동공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전설속의 고대 하늘 뱀의 힘은 천마 구렁이에게도 공포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뱀의 눈, 발동!”
청록색 꽃 세 송이가 예린의 눈동자를 중심으로 서서히 움직이며 천마 구렁이의 거대한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잠시 후, 엄지손가락만 한 청록색 광선이 빳빳하게 굳어있는 천마구렁이의 머리에 닿으며 손바닥만한 녹색 꽃 문양이 놈의 머리 위에 새겨졌다.
그러자 살기가 가득하던 천마 구렁이의 눈에 온순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성공한 거야?”
하늘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천마 구렁이를 바라보던 이준이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물었다. 예린이 이 거대한 녀석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보리 나무를 찾아가는 길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 분명했다.
예린이 눈을 감자, 그녀의 등 뒤에 솟아났던 거대한 뱀의 형상이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거대한 뱀이 되어 하늘 위에 떠있던 채린은 그제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예린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전설속의 머리 아홉 달린 하늘 뱀을 조종하는 능력이라니……. 예린의 힘은 뱀 마수인 그녀에게 있어 천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지배된 거야?”
이준 역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예린에게 다가갔다.
“네. 이미 힘이 많이 빠진 상태라 훨씬 수월했어요.”
“다행이네. 이제 천마 피연못을 찾으러 가자.”
이준은 곧바로 검은 안개가 퍼져 나오는 거대한 산봉우리를 향해 날아갔다.
* * *
거대한 산봉우리에는 단 한 마리의 마수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천마구렁이에 의해 모두 쫓겨난 것이 분명했다.
이준 일행은 산속에 퍼진 에너지파동을 따라 빠르게 천마 구렁이의 둥지를 찾는데 성공했다.
산 중심에 위치한 천마 구렁이의 둥지에는 음습한 기운이 가득했고, 곳곳에 마수와 인간의 뼈가 널려 있었다.
이준 일행은 백골로 뒤덮인 작은 산을 지나 산굴 끝에서 걸음을 멈췄다.
산굴 끝에는 새빨간 자갈들이 잔뜩 깔려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십 미터 정도 되는 연못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독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댔다. 연못에서 끓는 기포가 터질 때마다 짙은 에너지가 퍼지는 걸 보니, 그들이 찾던 곳이 틀림없었다.
“여기가 천마 피연못이야?”
아라가 소름이 돋아난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응. 분명 여기가 맞아.”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연못 속에서는 그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강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여기서 2, 3일 정도 머물러야겠어. 그 동안 예린이는 천마 구렁이를 소환해 이곳을 지키게 해 줘. 천마 구렁이가 있다면 다른 강자들도 섣불리 접근하지 못할 거야.”
“네.”
“별 일 없겠지?”
채린이 피연못을 바라보며 걱정되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 에너지가 강하긴 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돈 아니야.”
“그럼 최대한 조심해.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신호 보내고…….”
이준의 고집에 채린은 한숨을 내쉬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연못에서 물러났다.
그제야 이준은 웃고 있던 표정을 풀고 굳은 얼굴로 피연못을 바라보았다. 생각한 것보다 에너지가 훨씬 짙었다. 천마 구렁이가 어떤 물건을 넣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준의 몸이 연못 안으로 들어가자, 잔잔하던 피연못이 강하게 흔들리면서 기포가 끊임없이 끓어올랐다.
“천마피연못.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고!”
연못에 들어가기 무섭게 끔찍한 고통이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광폭한 에너지는 수천 마리의 독사처럼 이준을 극한의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천마구렁이가 이곳에 뭘 넣었는지는 몰라도 연못에 들어가기 무섭게 이준의 피부가 타들어가며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쉬이익-.
피부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이준은 천지의 불꽃을 소환해 화염 장막으로 몸을 감쌌다.
‘천마 구렁이도 잡았는데, 피연못 쯤이야!’
치익!
천지의 불꽃이 나타나는 순간, 연못에서 뿜어져 나오던 에너지가 모두 순수 한 에너지로 전환되어 이준의 몸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 * *
이틀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채린, 아라, 진율희 등은 모두 천마 구렁이가 있는 산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곳에는 흉악한 고대 마수들이 없으니 안심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예린이 풀어둔 천마구렁이는 산봉우리를 돌아다니며 하루종일 검은 안개를 내뿜었다. 그 덕에 이곳에 찾아왔던 수많은 강자들도 깜짝 놀라 황급히 달아났다.
천마구렁이가 있어 그들은 이틀 동안 안전하게 이준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 * *
섬뜩한 붉은 빛을 내뿜던 피연못은 어느새 옅은 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에너지를 이준이 모두 흡수해버렸기 때문이었다.
피 연못의 중심에는 상반신을 드러낸 사내가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이준의 몸은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엄청난 에너지를 머금고 있었다.
사흘 째 되는 날, 피 연못이 마침내 완전히 말라붙었다.
연못의 바닥에는 해골이 가득 했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물건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그렇게 다시 두 시간이 지났을 때, 보이지 않는 파동이 갑자기 이준의 몸속에서 용솟음쳤다.
쿵!
묵직한 굉음과 함께 바닥에 있던 해골이 전부 가루로 변해버리며 그 여파로 산굴마저 조금씩 흔들렸다.
그 순간, 이준의 기운이 마치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미친 듯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구-웅!
이준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며 이준의 몸을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뻗아나갔다.
펑!
영혼 깊숙한 곳에서 다시 한 번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새빨개진 이준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금강유리체!”
곧이어 이준의 몸이 금빛으로 번쩍이면서 빠르게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부풀어 오르던 이준의 몸은 8미터까지 커졌지만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8미터가 되는 순간 한계에 도달했는지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쾅!
“하압!”
이준이 온 힘을 쥐어짜내 다시 한 번 인을 맺자, 서서히 팽창을 멈추던 이준의 몸이 다시 부풀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9미터까지 올라갔다.
온몸이 황금 빛으로 물든 거인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만 같은 기운이 사방을 휩쓸었다.
쿵쿵쿵!
이준이 두 발을 강하게 구르자, 바닥이 십 미터 가까이 움푹 파였다. 동시에 황금거인으로 변신한 이준이 포탄처럼 휙, 날아가 산굴 정상에 강하게 부딪혔다. 순식간에 거대한 통로를 뚫은 그는 번개처럼 산을 뚫으며 산의 정상까지 올라갔다.
쾅!
산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른 이준의 몸에서 눈부신 금빛이 뿜어져 나오자, 채린을 비롯한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9성 투존이 된 건가?”
“소각주님의 속도는 언제나 놀랍군요.”
채린의 말에 청성 장로 역시 감탄하듯 말했다.
화종 장로들 역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들이 이준을 처음 봤을 땐 고작 2성 투존 강자였는데, 반년 만에 9성 최고급이 되어 나타나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잠시 후, 눈부신 금빛이 서서히 잦아들며 9미터에 달하던 거인이 빠르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축하드립니다, 소각주님.”
“운이 좋았습니다.”
청성 장로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동안 별 일 없었지?”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이준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시간을 꽤 많이 허비했어요. 늦기 전에 어서 보리평야로 가야 해요.”
“응.”
3일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분명 보리평야일 것이다.
“가자. 늦지 않으려면 지금 움직여야 해.”
“천마 구렁이를 타고 가는 건 어때요? 저 녀석이라면 마수들을 만나도 그냥 지나갈 수 있을 거예요.”
예린이 하늘 위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천마 구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좋지.”
이준은 씩 웃으며 곧바로 하늘 높이 올라가 천마 구렁이의 등에 올라탔다.
그의 뒤를 따라 진율희와 채린을 비롯한 사람들이 하나 둘 거대한 뱀의 등 위에 올라탔다.
예린의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지자 짙은 안개가 퍼져나와 검은 구름이 되었다.
천마 구렁이는 검은 구름을 타고 번개처럼 보리 나무의 땅 깊은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 * *
이준 일행은 천마 구렁이 덕에 최소 3일은 걸려야 할 거리를 하루 만에 이동할 수 있었다.
천마 구렁이는 보리나무의 땅에서도 손에 꼽는 힘을 가진 마수였고, 그 흉폭한 성격으로 인해 실력이 비슷한 마수들마저 피해 다니는 상대였다. 덕분에 길을 가는 내내 어떤 마수도 감히 이준 일행의 앞을 막지 못 했다.
이 외에도 이준 일행은 곳곳에서 모여든 세력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상당수가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세력이었지만, 실력만큼은 결코 얕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이준 일행은 불과 이틀 만에 보리 평야에 진입할 수 있었다.
보리 평야는 본래 보리 나무의 땅에서 강자들이 대결을 벌이던 장소로 쓰이던 곳으로, 수많은 강자들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마수들도 함부로 발을 딛기 어려울 정도로 에너지가 가득한 곳 이었다.
보리 평야에 가까워지자, 이준 일행은 천마 구렁이를 다시 집어넣고 직접 움직여 이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천마 구렁이를 끌고 이동하면 다른 강자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십 분 정도를 날아가자, 널따란 평원이 나타났다.
평원 위에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강자들이 줄줄이 서있었다.
보리 나무의 땅에 들어온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들 조심해.”
“네.”
이준의 당부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 일행이 거대한 광장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 녀석들에게서 피비린내가 강하게 나고 있어.”
이준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따로 모여 있는 무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의 몸에서는 마수의 피비린내가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설마 고대 마수들을 사냥하고 다닌 건가?’
이준은 그들을 가볍게 훑어본 뒤 말없이 일행들과 함께 평원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아마도 이곳에는 8대 세력의 젊은 강자들도 찾아왔을 것이다. 보리심과 보리구슬은 투존 최고 수준의 강자들을 투성으로 만들어 줄 보물이니, 그들이 이런 자리에 빠질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