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8화. 천마구렁이 사냥작전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진율희가 이준과 채린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어쩌다보니 천명종 놈들이 널 노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아…….”
이준의 말에 진율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흘깃 눈을 돌려 채린을 훑어봤다.
“널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가한제국에 있을 당시, 진율희는 고하의 부탁으로 타르사막에 가 채린의 손에 있는 대지의 불꽃을 빼앗아 왔었고, 운남종이 멸망할 때 역시 채린과 맞섰었다. 이처럼 나쁜 일로만 얽혀있는 두 사람이니 여기서 다시 만난 것이 반가울 리는 없었다.
“나도.”
채린의 짤막한 한마디에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 이준은 최대한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라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라는 자기라고 별 수 있겠냐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각주님. 이번 일은 정말 고맙습니다.”
그때, 나설아에게 받은 연금비약을 삼킨 화종의 장로가 걸어와 이준을 향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하하, 아닙니다. 성운각과 화종은 원래 가까운 사이 아닙니까. 진율희 종주와도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장로님들은 이곳에 오신지 얼마나 되셨는지요?”
“5일 정도 됐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길을 몰라 속도가 더뎌지는 군요. 그 와중에 천명종이 마수를 이용해 덫을 깔아 놓은 탓에 청화 장로가 죽고 말았습니다.”
장로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안타깝게 됐군요. 제가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텐데……. 그래도 놈들을 모조리 저세상으로 보내줬으니 저승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이준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애도의 말을 전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세력들은 현재 어떤 상황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다른 세력들은 보리 평야 근처에 있을 거야. 그 곳은 고대유산이 남겨진 곳으로 마수들도 접근하지 못하니 이 살벌한 보리 나무의 땅에서 유일한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지.”
“보리 평야라…….”
이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진귀한 보물들은 기이한 마수들이 보호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니, 보리심 역시 강력한 마수가 지키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보물을 얻으려면 여러 세력들이 뒤엉켜 난전을 벌일 때를 노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보리 평야에 도착한 사람들은 모두 상당한 강자일 것이고, 영혼의 궁전처럼 이준과 관계가 좋지 않은 세력들도 그 곳에서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같이 움직일까? 함께 움직이면 위험이 닥쳐도 서로 도울 수 있을 거야.”
이준이 진율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투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리심을 손에 넣어야 했고, 이런 상황에서는 한명이라도 더 실력있는 아군을 확보해두는 것이 좋았다.
“그래.”
진율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동쪽으로 가자. 서쪽이 더 가깝기는 하지만 그쪽은 전투력이 5전(五轉) 투존 전성기 강자와 맞먹는 천마구렁이의 출몰 지역이야. 그쪽으로 갔다간 분명 들키고 말 거야.”
“천마구렁이?”
진율희의 설명에 이준은 순간 흠칫했다. 천마구렁이는 칠색 이무기나 채린처럼 뱀 계열에 속하는 고대의 마수로, 실력도 실력이지만 흉폭한 성격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외부 세계에서는 이미 사라진 마수인데, 이 곳에서는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천마 구렁이의 피에는 육체의 힘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었고, 이는 지금의 이준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였다.
고적에 따르면 천마 구렁이는 피연못에서 번식하며, 그들의 후손이 충분한 힘을 흡수할 수 있도록 수백 년에 걸쳐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수집해 그것들을 피연못에 넣어 막 태어난 후손의 몸에 주입한다고 했다.
“너희가 천마구렁이를 직접 본 거야?”
“응. 죽을 뻔 했어.”
“그렇구나. 난 그쪽으로 가야겠어. 천마구렁이가 필요하거든.”
“뭐?”
이준이 직접 그 위험한 천마구렁이를 찾으러 가겠다고 하자, 진율희를 비롯한 사람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 걱정 마. 천마 구렁이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릴 잡아먹을 순 없을 거야.”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진율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 그렇다면 함께 가자. 우리 쪽에 부상자가 이렇게 많은데 여기서 찢어지는 게 더 위험할 거야. 마침 우리가 길을 아니까 천마 구렁이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하하. 그럼 부탁할게. 걱정 마. 별 일 없을 거야.”
이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정말 괜히 알려준 것 같다.”
진율희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준에게 주의를 주려던 것이 오히려 흥미를 돋울 줄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그럼 모두 우선 쉽시다. 30분 뒤 움직이죠.”
이준의 말에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휴식을 취했다. 이준 역시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가 앉아 휴식에 들어갔다.
30분의 휴식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시간 맞춰 눈을 뜬 이준은 얼굴색이 한결 좋아진 화종 일행들을 보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준이 무언가 느낀 것처럼 뒤쪽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기운을 숨기세요. 누가 왔습니다.”
이준의 말에 모두 놀라 황급히 숲속으로 숨어 기척을 숨겼다.
쉬쉭!
잠시 후,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한 무리가 하늘 위에 나타났다.
“저 녀석들, 언제 고대 마수들이 달려들지도 모르는데 겁도 없네.”
아라는 눈썹을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이준은 하늘 위에서 빛을 발하는 그림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리의 선두에 서있는 것은 이준에게 상당히 익숙한 인물이었다.
‘봉연?’
그녀를 보는 순간, 이준은 속으로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적에서 봤을 땐 고작 투종에 불과했는데, 지금 봉연에게서 전해지는 느낌은 분명 일반 투존 최고급 강자 수준이었다. 게다가 예전과 전혀 다른 느낌이 그녀의 영혼에서 느껴졌다.
‘고대 하늘 봉황의 힘이군…….’
이해하기 어려운 일 이었다. 고대 하늘 봉황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어째서 봉연이 그 힘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분명 실력이 폭등할 만한 일이 있었을 거야. 이 정도면 나도 상대가 안 되겠어. 이번에 기필코 천마 구렁이를 찾아 금강유리체를 최고 레벨로 수련해야겠군. 최대한 빨리 9성 투존이 되어야 해!’
* * *
험준한 산봉우리가 거대한 뱀처럼 기다랗게 이어지고, 깊은 산중에서는 어두운 기운이 끊임없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천마구렁이의 영역이었다.
돌연변이 마수인 천마 구렁이는 아주 보기 드물며, 혈통으로 따지면 고대 뱀 마수들에 가까운 존재였다.
이준이 찾으려는 것은 사실 천마구렁이가 아니라 그들이 수백 년 동안 모아 만들어진 천마 피연못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천마구렁이가 모은 천지보물들이 가득한 피연못에 일반 사람이 들어간다면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이런 에너지는 천마 구렁이의 후손만이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오랜 수련과 강화를 통해 이미 마수보다도 강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천마피연못은 지금의 이준에게 가장 완벽한 보충제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번에 금강유리체를 최고 레벨로 올리고 나면 9성 투존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 *
검은 안개가 자욱한 산봉우리 밖.
“천마 구렁이는 바로 이곳에 있어.”
진율희의 말에 이준의 눈빛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가자! 움직일 준비 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준이 산봉우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채린, 예린, 아라 등 사람들과 화종 사람들이 줄줄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준 일행은 기척을 최대한 감춘 채 산봉우리를 가득 메운 검은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검은 안개에 들어가는 순간, 뱀의 울음소리가 따갑게 귓등을 때렸다.
곧이어 산봉우리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백 미터가 넘는 검은색 뱀꼬리가 이준 일행을 덮쳐왔다.
“하!”
이준은 눈부신 금빛을 터뜨리며 순식간에 7미터가 넘는 거인으로 변신했다.
금강유리체가 된 이준은 황금으로 다져진 두 손으로 거대한 뱀의 꼬리를 거칠게 내리쳤다.
쾅!
뱀의 꼬리와 이준의 주먹이 맞부딪히며 매서운 강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크르릉!
그때, 산 전체에 섬뜩한 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 높이 뻗은 산봉우리 안에서 백 미터가 넘는 구렁이가 튀어 나왔다.
검은색 비늘이 가득한 구렁이는 한 눈에 봐도 엄청난 체구를 자랑했다. 비늘 위에서는 검은 안개가 짙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놈의 머리는 마치 잔뜩 일그러진 사람의 얼굴 같았다.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무시무시한 생김새였다.
천마구렁이가 나타나는 순간, 하늘 위에서 어두운 기운을 가득 머금은 먹구름이 생겨났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구렁이가 새빨간 두 눈으로 살기를 가득 품은 채 이준 일행을 노려봤다.
“움직여!”
이준이 천마구렁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놈의 실력은 적어도 5전 투존 전성기 정도였다. 화련을 사용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야 놈에게 대항할 수 있었다.
“응.”
채린이 고개를 끄덕인 뒤 하늘 높이 뛰어오르며 거대한 칠색 이무기로 변화했다. 본 모습으로 돌아간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천마 구렁이마저 잠시 움찔하며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순수한 혈통으로 따진다면 천마 구렁이는 칠색 이무기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쿵!
하늘 위에서 형형색색의 먹구름이 요동치더니 뱀으로 변한 채린의 손끝에서 일곱 빛깔의 번개가 터져 나와 천마구렁이를 공격했다.
천마 구렁이가 징그러운 입을 벌리자, 검은색 빛기둥이 뿜어져 나오며 채린의 번개를 받아냈다. 놈의 혈통은 채린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실력만큼은 명백하게 놈이 몇 수는 위였다.
쾅!
황금색 거인으로 변한 이준은 쏜살같이 천마구렁이에게 돌진해 거대한 주먹을 날렸다.
무시무시한 힘을 자랑하는 이준의 주먹에 천마 구렁이를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모조리 사라지고, 심지어 검은색 비늘마저 찢겨나가고 말았다.
이준이 공격하는 순간, 청성 장로는 물론 진율희, 아라까지 동시에 공격을 펼쳤다.
강력한 염력 폭풍이 온 하늘을 뒤덮으며 천마구렁이의 몸을 덮치자, 거대한 몸뚱아리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쉭!
하지만 천마구렁이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잠시 비틀거리던 놈은 새빨간 두 눈을 번쩍이며 이준을 향해 거대한 꼬리를 휘둘렀다.
챙!
거대한 뱀꼬리가 이준의 몸에 부딪히자, 날카로운 금속성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
이준은 온 힘을 다해 천마구렁이의 꼬리를 두 팔로 안은 채 자갈색 화염을 터뜨렸다. 그러자 천지의 불꽃이 천마구렁이의 몸을 단번에 에워싸며 검은 안개를 모두 불태웠다.
치이익!
작열하는 불꽃이 내뿜는 엄청난 고온에 천마 구렁이가 미친 듯이 발버둥치며 온 산을 뒤집어 놓았다.
“쉽지 않은 녀석인 걸.”
완강하게 버티는 천마구렁이를 보며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천마구렁이를 꽉 붙잡은 이준은 주먹으로 놈의 꼬리를 인정사정없이 두드렸다. 금강 유리체로 생겨난 광적인 힘에 뜨거운 화염까지 더해지자 천마구렁이의 꼬리에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하지만 천마구렁이는 굴복하기는커녕 더욱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이준을 공격했다.
“이준 도련님. 제 눈을 보게 만들어주세요!”
이준의 머릿속에 천마구렁이를 저지할 수 없다는 생각이 스치는 찰나, 예린의 목소리가 그의 귓등을 때렸다.
다음 순간, 기이한 청록색 눈동자가 천마 구렁이의 눈앞에 나타났다.
청록색 꽃 세송이가 빠르게 회전하는 눈과 새빨간 구렁이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놈의 눈동자에 넘실대던 흉폭함과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