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7화. 진율희와의 재회
“스승님. 저들이 계속 우릴 쫓고 있어요.”
깊은 숲 속, 나뭇가지를 발판 삼아 뛰어 오른 한 여자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곁에는 새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얼마 전 화종의 종주가 된 진율희였다.
“천명종 이 나쁜 놈들. 우리가 마수를 상대하고 있는 틈을 타 습격하다니. 그 바람에 청화 장로도 마수의 손에 죽어버렸어. 화종으로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겠어!”
진율희의 뒤에 있던 한 노부인이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녀의 입가에 묻은 핏자국으로 보아 방금 전까지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잔인한 놈들,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주변에 있던 화종 장로들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소리쳤다.
“장로님들. 지금은 이런 얘기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천명종은 분명 우리를 여기서 모조리 죽여 버릴 생각일 겁니다. 일단은 살아남는게 급선무예요.”
진율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는 이준의 도움으로 화 할머니가 물려준 염력을 모두 흡수해 이미 8성 투존이 되어있었다.
그녀의 말에 장로들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마친 진율희는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화종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장로들이 모두 수련에 들어간 탓에 이곳에 함께 온 사람은 9성 투존 장로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 장로마저 천명종의 습격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스승님. 천명종 쪽에는 9성 투존 강자가 두 명이에요. 게다가 저들의 속도라면 머지않아 따라잡히고 말 거예요.”
나설아의 말에 진율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때는 내가 널 지킬 테니 신경 쓰지 말고 곧바로 도망가거라.”
“그럼 스승님은요?”
“화종의 종주로서 뒤를 지켜야지…….”
그때, 진율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으며 나설아를 붙잡아 빠르게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쾅!
매서운 강풍이 앞에서 날아와 두 사람이 있던 거대한 나무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끌끌, 진율희 종주. 쓸데없는 저항은 그만두시지.”
“뻔뻔한 놈!”
나설아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곧이어 나뭇가지 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대나무처럼 빼빼 마른 노인은 검은 옷을 입은 채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나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쉬쉭!
앞길을 막히자마자 진율희의 뒤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열 개도 넘는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 진율희 종주, 도망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소.”
가장 선두에 있던 중년의 사내가 진율희와 나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류창석. 화종과 전쟁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건 아니지. 수련 중인 그 화종 늙은이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거든. 하지만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너희 둘을 천명종으로 데려간다면 누가 이 일이 천명종의 소행인 것을 알 수 있겠나?”
류창석이란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히히, 부종주. 변수가 생기기 전에 어서 끝내시오.”
류창석의 뒤에는 자주색 부채를 들고 있는 사내가 서있었다. 사내의 정체는 바로 이준을 죽이려던 요화군자였다.
“맞소. 부종주가 나선다면 금방 끝날 것이오.”
요화군자의 곁에 있던 노인이 한마디를 보태자, 류창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치켜들었다.
“진율희와 그 제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죽여라!”
“예!”
류창석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천명종 강자들이 번개처럼 진율희 일행을 포위하며 폭포같은 염력을 쏟아냈다.
“설아야. 내가 포위망을 뚫을테니 그 틈을 타 달아나라.”
진율희가 한숨을 쉬며 조용히 속삭였다.
“스승님…….”
나설아는 손에 들린 장검을 꽉 움켜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이 저들의 손에 죽는다면 제가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휴…….”
나설아의 한마디에 진율희는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쳐라!”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지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천명종 강자들이 화종의 강자들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쾅쾅!
화종 장로들 역시 이를 악문 채 모든 염력을 폭발시켰지만, 이미 부상을 입은 터라 얼마 가지 못해 진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쿵!
진율희가 염력을 퍼뜨리며 주먹을 휘두르자 천명종 강자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하지만 뒤이어 달려드는 두 명의 강자들로 인해 숨 돌릴 틈도 없이 전투를 이어나가야만 했다.
“히히, 진율희 종주. 이번엔 우리와 함께 가게 될 것 같군.”
요화군자가 진율희의 공격을 재빠르게 피하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염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진율희는 차가운 얼굴로 바람의 장막을 만들었다. 천명종 투존 강자 네 사람이 힘을 합쳐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방어막이었다.
펑!
그때, 그녀의 곁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한 여인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설아야!”
진율희가 놀란 얼굴로 바람을 일으켜 나설아를 붙잡으며 외쳤다.
“히히, 싸울 때는 한 눈을 팔면 안 되지.”
진율희가 나설아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두 개의 그림자가 번개처럼 날아들어 그녀의 양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푸흡!”
진율희의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오며 그녀의 몸이 거대한 바위 위에 거세게 부딪혔다.
“진율희, 곱게 따라오는 편이 좋을 거야.”
요화 군자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진율희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바로 그때, 하늘 위에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눈부신 황금빛이 번개처럼 하늘을 가르고 요화군자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퍽!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금색 그림자가 주먹을 휘두르자, 요화군자의 몸이 일격에 터져 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곁에 있던 천명종의 강자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황급히 달아났다.
“천명종의 개는 여전히 꼴도 보기 싫군.”
요화군자를 박살내버린 거대한 금빛 형체에게서 천둥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류창석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어째서 우리 천명종의 일에 끼어드는 것 입니까?”
류창석은 싸늘한 눈빛으로 황금색 거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7미터 크기의 황금빛 거인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요화군자의 시체를 걷어 차 류창석에게 날렸다.
“죽고 싶은 것이냐!”
이준의 행동에 류창석의 눈에는 시뻘겋게 핏대가 섰다.
그가 주먹을 내지르자, 요화군자의 시체가 ‘퍽’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서 온 놈이기에 천명종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냐!”
류창석이 귀신처럼 거인의 머리 위에 나타나 주먹을 내리치며 말했다.
“대천명의 용권!”
크르릉!
류창석의 몸에서 터져 나온 염력은 삽시간에 거대한 흑룡으로 변신해 공간을 가르며 황금색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이에 맞선 황금 거인이 주먹을 내지르자, 허공 위에 검은색 공간 균열이 빠르게 뻗어 나갔다.
쾅!
거대한 금빛 주먹과 흑룡이 맞부딪히는 순간, 무시무시한 힘이 해일처럼 터져 나오며 시커먼 흑룡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코앞에서 느껴지는 무서운 힘에 류창석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심지어 아직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류창석의 가슴에 거대한 망치로 얻어맞은 듯 무시무시한 충격이 전해졌다.
펑펑!
류창석은 그대로 날아가 거대한 바위 위에 고꾸라졌다. 그의 몸에 남아있던 힘이 바위에 전해지며 거대한 바위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던 천명종 강자들의 눈빛이 빠르게 흔들렸다. 투존 최고급 강자인 류창석은 이곳에서 가장 강한 실력을 가진 자였다. 그런데 그가 거인의 주먹 한방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으니, 그들로써는 도저히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온 놈이지?”
“젠장! 구 장로, 남아있는 모든 장로들은 나와 함께 저놈을 쳐라!”
비틀거리며 일어난 류창석이 피를 닦으며 소리쳤다.
그의 말에 가장 먼저 나섰던 빼빼 마른 노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르릉!
다음 순간, 천명종 강자들의 몸에서 일제히 염력이 터져 나왔다.
10명에 가까운 투존 강자들의 연합 공격에 공기마저 공포를 느끼는 듯 세차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조심해!”
진율희가 급히 소리쳤다.
“하!”
하지만 황금색 거인은 달아나기는커녕 거대한 발을 구르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파괴하라!”
어떤 무투기도 쓰지 않은 거인의 몸에서는 대지마저 갈라버릴 듯한 무시무시한 힘이 느껴졌고, 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허공 위에 검은 색 균열이 생겨났다.
쾅!
거인의 주먹에 닿은 무투기들이 폭발을 일으키며 천명종 강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피가 터져 나왔다.
“푸흡!”
류창석과 빼빼 마른 노인을 제외한 모든 강자들이 피를 쏟으며 백 미터 멀리 날아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도대체 누구냐!”
류창석이 살기로 가득한 거인의 눈을 보고는 움찔하며 소리쳤다.
쿵!
하지만 거인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거대한 발을 움직여 성큼성큼 류창석을 향해 다가갔다.
“도망쳐!”
상대와의 실력차를 절감한 류창석은 창백하게 질린 채 몸을 일으켜 뒤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네가 누군지 알아내 반드시 죽여주겠다!”
혼비백산 도망가던 류창석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천명종 부종주가 된 이래, 이렇게 처참하게 패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그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부신 황금빛 거인이 또 다시 그의 앞을 막아섰다.
‘어째서 이렇게 빠른 거야?’
류창석이 다시 방향을 틀어 달아나려는 찰나, 거인의 거대한 주먹이 그의 등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어억!”
류창석의 몸을 감싸고 있던 염력 방어막이 종잇장처럼 찢기며 내장, 심지어 뼈까지 모조리 박살이 나버렸다.
“푸흡!”
내장이 섞인 검붉은 피가 류창석의 입에서 흘러나오며 그의 눈이 빠르게 생기를 잃었다.
류창석이 숨을 거두자, 황금색 거인은 그제야 바닥으로 내려와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류창석과 함께 있던 깡마른 노인이 달아난 방향이었다.
쉭!
그때, 강한 바람소리가 귀를 찌르더니 시체 한구가 바닥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시체가 떨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율희를 비롯한 화종 사람들이 이준 일행이 있던 곳으로 날아왔다.
“너, 넌 메두사여왕?”
채린을 발견한 진율희가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물리며 말했다.
“운남종의 종주군.”
채린은 그제야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황금색 거인을 바라보며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화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변해 달려오길래 대체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저 계집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서둘렀던 건가?”
채린의 말에 진율희의 시선이 곧바로 거대한 황금색 거인에게로 향했다.
“이준?”
진율희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설아가 경악한 표정으로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는 거인을 바라봤다. 혼자서 천명종의 강자들을 몰살시켜버린 사람이 바로 이준이라니!
잠시 후, 황금색 거인이 빠르게 줄어들어 진율희와 나설아에게 익숙한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하하. 괜찮아?”
진율희가 한참 동안 이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너였구나.”
이준은 웃으며 저장반지에서 옥병 하나를 꺼내 진율희에게 건넸다. 그녀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그 안에서 연금비약을 하나 꺼내 삼킨 뒤 다른 장로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도록 나설아에게 그 약병을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