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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696화 (696/818)

696화. 깊은 곳

그 동안 이준 일행은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마주쳤다. 그들 역시 보리심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보리 마을은 보리 나무의 땅과 가장 가까운 도시로, 보리 나무의 땅이 악명으로 인해 거의 유령도시가 되어버린 곳 이었다.

그러나 보리심을 얻기 위해 나타난 수많은 강자들로 인해 늘 적막만이 가득했던 도시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이준의 첫 도착지 역시 보리 마을이었다. 마을에 도착한 이준은 곧장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혼자서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 * *

“무슨 일이야?”

정보를 수집하러 갔던 이준이 잔뜩 어두워진 표정으로 돌아오자, 채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먼저 보리나무의 땅에 들어간 강자들이 전부 죽었대. 투존 최고급 수준의 강자들도 있었지만,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 했다고 해.”

이준의 말에 일행들의 표정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그럼 어떻게 하지?”

아라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준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일 이곳에 있는 다른 세력의 강자들과 함께 들어가자. 그들 뒤를 따라가면서 그 안을 천천히 관찰하는 거지.”

* * *

이튿날 아침. 보리 마을 밖이 사람들로 빼곡하게 가득 찼다.

이준 일행은 수천 명이 넘는 인파의 가장 뒤에 자리를 잡았다.

멀지 않은 곳에는 수백 미터가 넘는 나무들이 거인처럼 태양을 가리고 우뚝 서 있었다. 숲 깊은 곳에는 등골이 오싹할 만큼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고, 그 안에서 흉악한 마수의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눈앞에 줄줄이 늘어선 수천 명의 사람들의 모습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투성이 될 수 있다는 욕심에 모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따위는 잊은지 오래였다.

잠시 후, 주변이 점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더니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거대한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리는 저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고 나면 움직이자.”

이준의 말에 따라 네 사람은 구석진 곳에 가만히 선 채 먼저 달려 나간 사람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무려 30분 가까이 지나서야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쉭!

이준이 고대 숲으로 들어가는 순간, 주변이 어둠에 휩싸이면서 썩은 풀잎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준 일행은 불과 10분 만에 수 킬로미터를 이동해 숲의 제법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그 사이 수 십 마리의 마수들을 마주쳤지만, 숲의 초입이라 그런지 아직 이준 일행을 위협할만한 실력을 가진 마수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준의 표정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인간의 발을 거부해 온 보리 나무의 땅이 고작 이 정도 수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준은 조금씩 속도를 줄이며 앞에 있는 무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이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자신들의 앞에 있는 무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것을 보고 대응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휙!

“독안개가 끼기 시작했어.”

그때, 거대한 나무 위에 멈춰선 아라가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준 일행이 발이 우뚝 멈춰섰다.

이곳의 독은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너무 오래 마신다면 투존 강자라 해도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 이걸 먹어.”

아라는 웃으며 새빨간 알약 몇 개를 꺼내 세 사람에게 건넸다. 그녀의 독에 대한 이해는 8레벨 연금술사가 된 이준보다도 몇 수는 위였고, 설사 이준이 열사람 있어도 아라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이준 일행이 아라가 건넨 알약을 삼키고 다시 발을 옮기기 시작할 무렵, 앞쪽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중독 된 것 같네. 가자.”

이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속도를 높였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독안개는 점점 더 짙어졌고, 주위에서는 끊임없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에 의해 정신이 붕괴된 강자들이 날뛰며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쿵!

이준 일행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계속해서 독안개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격렬한 염력파동이 갑자기 전해져 왔다.

이준은 속도를 줄이고 바닥에 내려와 공터에 놓인 새까만 시체를 바라보았다. 눈도 채 감지 못한 시체의 얼굴에는 공포와 후회가 묻어있었다.

“투존 강자네…….”

이준은 한숨을 쉬었다. 투존 강자마저 견딜 수 없는 독이라니……. 왜 보리 나무의 땅이 오랜 시간 공포의 땅으로 여겨졌는지 이해가 가는 장면이었다.

“투존 강자의 염력으로 온몸을 감싸면 독기체도 뚫을 수 없을 텐데, 여긴 참 이상해.”

이준이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아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독기체를 몸속으로 흡수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강하게 떨리면서 표정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왜 그래?”

놀란 이준이 황급히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이건 그냥 독안개가 아니라 독충이야.”

“독벌레?”

아라의 말을 들은 이준은 독안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독충의 흔적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 벌레야. 저 사람들의 몸속으로 흡수된 것도 사실 이 수억 마리의 작은 벌레들이었던 거야.”

이어지는 아라의 설명에 이준은 빠르게 천지의 불꽃을 자신의 온 몸 구석구석으로 흘려보내 보았다.

끼익, 끼이익!

이화가 몸속 깊은 곳까지 태우기 시작하자, 어디선가 소름 돋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 망할 것들…….”

곧이어 이준의 손가락 끝에서 새카만 잿더미가 흘러 나왔다. 그것은 몸속에 침투했던 독충들의 찌꺼기였다.

자신의 몸에 있던 독충을 모두 처리한 이준은 곧바로 채린과 예린, 그리고 ‘청성’이라는 성운각 장로의 몸에도 불을 붙여 몸속에 있는 독충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다들 나와 5미터 이상 떨어지지 마. 이 독벌레는 염력도 뚫고 들어오니까.”

이준이 차가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가 새하얀 화염이 떠다니는 자갈색 화염을 소환해 주위를 감싸자,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독안개가 달아나듯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휴, 아라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됐겠는걸.”

이준이 거대한 나무 아래에 누워있는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시 후, 자갈색 화염에 둘러싸인 다섯 개의 그림자가 더욱 속도를 높여 숲 안으로 날아갔다.

* * *

독기운이 자욱한 숲속에서는 여전히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쉭!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반짝였다. 신기하게도 불빛이 지나가는 자리엔 독안개가 뿔뿔이 흩어지며 길을 터주었다.

“독충들이 천지의 불꽃을 엄청 무서워하는 것 같네.”

“천지의 불꽃은 밝은데다가 엄청나게 뜨거우니까. 어둡고 서늘한 걸 좋아하는 독충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지.”

아라의 말에 이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뒤를 돌아보니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 중 이 독안개를 뚫고 지나온 사람들은 고작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더욱 무서운 것은 독지대를 무사히 벗어나는데 성공하더라도 그 안쪽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독기운이 점점 옅어지는 걸 보니 이곳을 벗어날 때가 된 것 같아.”

채린이 말했다.

“응. 속도를 내야겠어. 이미 큰 세력들은 우리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들어가 있을테니까.”

말을 마친 이준은 활을 떠난 화살처럼 전방을 향해 전속력으로 튀어 나갔다.

잠시 후, 독안개가 점점 옅어지다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독안개 구역을 빠져나온 이준 일행은 거대한 바위 위에 착지했다.

그들의 눈앞에는 끝없이 이어진 산들이 길게 뻗어 있었다. 거대한 용이 길게 늘어져있는 것처럼 뻗어있는 높다란 산맥에서는 고대의 기운이 끊임없이 퍼져 나와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후…….”

먼 곳에 펼쳐진 산맥을 바라보던 이준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그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에너지를 탐지해 보았다. 기다랗게 늘어선 산맥에는 8성 최고급 투존이 된 이준조차 긴장할 정도로 강한 기운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이곳의 흉악마수들은 아주 옛날부터 살아있던 녀석들이라 실력이 아주 무섭습니다. 똑똑하진 않지만 힘으로만 따지면 다른 마수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지요.”

이준의 뒤를 따라 바위 위에 착지한 청성 장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취색의 구슬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바로 보리 점액 속에 박혀 있던 보리구슬이었다.

마수들이 진을 치고 있는 이 광활한 구역에서 전설의 보리나무를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눈을 감고 보리구슬 속의 움직임을 느껴보던 이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산맥의 서북쪽 방향이었다.

“너무 멀어서 확실한 지점을 찾을 수 없어. 하지만 대충 저쪽 방향에 있는 것 같아.”

“가자.”

보리구슬을 집어넣은 이준은 곧바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바로 그때, 절벽 아래에서 마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구역질나는 악취와 함께 흉폭한 마수 몇 마리가 이준에게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조심해!”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란 채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콰광!

그러나 이준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자갈색 화염이 폭발하며 그를 향해 달려들던 마수들이 새까만 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쪽엔 마수가 너무 많아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아.”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방향을 틀어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쉭!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울려 퍼지며 십 여 개의 그림자가 이준 일행을 스쳐 지나갔다.

이준을 앞질러 간 십 여 명의 사람들은 모두 투존 이상의 실력을 가진 강자들이었다.

그들 역시 보리심을 노리고 이곳에 온 것이 분명했지만, 실력으로 보아 보리 나무가 있는 곳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때문에 이준은 굳이 그들과 싸움을 벌이지 않고 자신들을 앞질러 가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가자.”

잠시 후, 이준이 마수의 에너지가 가장 적게 느껴지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 * *

아우우-!

고대의 기운이 가득한 산맥에서는 끊이지 않고 난폭한 마수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쿵!

갑자기 숲속에서 염력 폭풍이 휘몰아치며 거대한 마수의 몸에 부딪혔다. 그 순간 염력폭풍 속에 있던 강렬한 독이 마수의 몸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가며 거대한 마수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거대한 마수가 쓰러지자, 숲속에서 이준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독에 대한 내성이 없네.”

아라가 새까맣게 변해버린 마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청성 장로가 길을 찾아 돌아올 때까지 좀 쉬고 있자.”

이준이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마 큰 세력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보리 나무에 가까울거야.”

하지만 이준은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보리심을 얻는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쉭!

그 사이, 길을 찾아 나섰던 청성 장로가 다시 돌아왔다.

“어떻습니까?”

이준이 고개를 들어 청성 장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앞쪽은 크게 위험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앞에 천명종 놈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천명종?”

이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만난 세력이 천명종이라니, 마주치게 된다면 보나마나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지켜보다가 몰래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뭐였죠?”

“그들 앞에 다른 무리가 하나 더 있는데, 그들의 뒤를 몰래 칠 생각인가 봅니다.”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우린 가던 길만 가면 돼요.”

이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역시 조용할 날이 없는 녀석들이다. 여기서도 다른 사람들을 해칠 생각만 하다니…….

“앞에 있는 세력은 어디서 왔죠?”

“아마 화종인 것 같습니다.”

이준의 질문에 청성 장로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화종?”

그 말에 이준의 발이 우뚝 멈춰섰다. 이렇게 되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소각주님,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자 청성 장로가 머뭇거리며 다시 그의 의중을 물었다.

“갑시다. 천명종을 박살내러.”

이준의 목소리에서 차가운 살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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