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5화. 금강유리체
이준과 채린, 아라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말없이 약로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약로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정화성자는 천 년 전 최고 강자이자, 정화의 불꽃의 주인이다.”
“정화의 불꽃의 주인이요?”
세 사람이 멍하니 약로를 바라보며 앞다투어 되물었다.
“정화성자는 천 년 전에 투기 대륙 전체를 호령하던 인물이다. 고적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투제에 가장 근접한 강자로 불렸다더군.”
“투제에 가장 근접한 강자라니…….”
이준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정화성자가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니.
“그럼 제 미간에 있는 것도 설마 정화성자가 남긴 것입니까?”
“그럴 것이다. 이 고대 지도는 틀림없이 정화성자가 남긴 것이다.”
약로는 이준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고적에 쓰인 기록으로 봤을 때 정화성자는 조금 괴팍하지만 정의로운 사람이었으니 비열한 방식으로 후배의 영혼을 강탈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스승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준은 조금 불안한 듯 눈알을 굴려댔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머릿속에 생겨난 광단을 제거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게 고대지도 안에 숨겨져 있는 걸 보니 정화의 불꽃과 연관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하. 고대지도를 모두 모은 것이 헛수고는 아닌 것 같구나.”
이어지는 약로의 말에 이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미 벌어진 일로 답답해 해봤자 아무 소용없었다. 지금은 그저 스승의 말을 믿는 수밖에.
“우선 변화가 있는지 지켜보자꾸나.”
약로가 이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3년 안에 투성이 될지를 먼저 고민해 보자꾸나. 정화의 불꽃의 위력은 지금까지 얻은 불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지금 네 실력으로 정화의 불꽃을 발견하게 된다면 넌 불꽃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이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역시 불꽃의 노예가 된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불꽃의 힘이 너무나 강력하면 사람이 불꽃에게 지배당해 화염의 노예가 되고 만다. 삼천불꽃도 이런 능력은 없었지만, 천지의 불꽃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정화의 불꽃이라면 정말로 자신이 불꽃의 노예가 될지도 몰랐다.
“정화의 불꽃을 찾더라도 어떻게 처리할지가 걱정이었는데, 그래도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다행이구나.”
약로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투성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네 수련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3년 안에 투성이 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일 테지. 그리고 투성이 되지 못하면 정화의 불꽃을 발견해도 손에 넣지 못할 것이다.”
“그럼 이준은 반드시 3년 안에 투성이 되어야 하는군요.”
“그렇다.”
채린의 질문에 약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이 녀석이라면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게다가 단숨에 실력을 올릴만한 방법도 생긴 것 같고.”
“스승님, 그 방법이라는 게 혹시 보리 나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준의 질문에 약로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보리심만 얻으면 3년 안에 투성이 될 수 있을 게다.”
“보리심……. 하지만 그런 보물을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을까요?”
약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는 보리 나무의 구슬이 있지 않느냐. 순도는 낮지만 반드시 보리 나무가 반응을 할 게다. 무엇보다 정화의 불꽃을 정말 얻고 싶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이준은 한숨이 나왔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3년 안에 투성이 되려면 보리심을 얻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자. 우선 성운각으로 돌아가 준비를 하자꾸나. 정보가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보리 나무를 찾으려는 자들로 인해 중주 전체에 난리가 날 것이다.”
약로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3년 안에 네가 투성이 될 수 있을지는 모두 이번 여정에 달려있다.”
* * *
마음의 결정을 내린 이준 일행은 곧바로 성운각으로 돌아갔다.
성운각에 도착한 그들은 며칠 동안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 사이, 보리 나무와 관련된 소식이 폭풍처럼 무서운 속도로 중주 전체를 휩쓸었다.
보리 나무의 땅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보리심을 얻어 투성이 될 수 있다면 목숨을 걸어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며칠 사이에 체력을 완전히 회복한 이준은 곧바로 밀실로 들어가 수련에 돌입했다.
약로의 말대로 투성이 되지 못하면 정화의 불꽃에는 손조차 댈 수 없으니, 한시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실력을 가장 빨리 높이는 방법은 고급 무투기를 수련하는 것이었다. 이준이 곧바로 밀실에 들어간 것 역시 얼마 전에 얻은 ‘금강유리체’를 수련하기 위해서였다.
이 1격 무투기를 성공적으로 수련해낸다면, 보리 나무의 땅에서 있을 혈투에서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 *
그윽한 향이 방 안에 가득 스며들었다. 돌침대 위에 앉아있던 이준은 말없이 황토색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두루마리를 펼치자, 측면에 적혀있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금강유리체.”
이준은 두루마리를 이마에 갖다 댔다.
그 순간, 두루마리 위에서 황금색 빛이 번쩍이며 대량의 정보가 홍수처럼 이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1격 하급 무투기, 금강유리체. 몸이 금강유리가 되어 어떠한 물체도 모두 부숴버릴 수 있다. 무투기 레벨이 최고에 이르는 순간, 온몸이 금빛으로 변해 세상을 밝히며 주먹과 발로 천지를 파괴할 수 있게 된다.’
수련법을 확인한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투성 강자가 창조한 무투기다웠다.
금강유리체를 수련하려면 독특한 방식으로 염력을 뼈, 피와 살, 피부에 융합시켜야 했다.
“후…….”
이준은 천천히 두 눈을 감고 두루마리에 기록된 방법으로 금강유리체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우득!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며 이준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금빛이 짙어지면서 이준의 몸은 점점 더 빠르게 팽창했다. 그렇게 3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이준의 키가 평소보다 두 배 이상 커지고, 새하얀 피부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잠시 후, 황금빛이 빠르게 약해지며 이준의 키와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커헉!”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무섭게 이준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터져 나왔다.
이준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두루마리를 노려봤다.
금강유리체를 수련하기 위해서는 극심한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는 얘기를 빼먹다니! 사람의 몸이 갑자기 수배로 팽창하면 피부가 찢어지고 근육이 터져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뼈까지 부서지는 것이 당연했다.
이는 연금비약과 천지의 불꽃, 투제의 피 등으로 단련된 이준의 몸이 아니었다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정도로 위험한 수련법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수련법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반드시 이 무투기를 수련해내야만 했다.
이 고통만 버텨내면 변신할 때 느껴지는 고통도 적응이 되어 금강유리체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계속해서 몸을 팽창시켜 피부, 근육, 뼈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휴. 아주 고문이 따로 없네.”
이준이 다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황금빛이 다시 폭발하면서 그의 몸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이준의 입에선 선혈이 터져 나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피의 양은 점차 줄어들었다.
* * *
그렇게 반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그 사이 중주의 수많은 세력들이 이미 보리 나무의 땅으로 뛰어난 투사들을 파견해 둔 상태였다.
보리 나무가 세상에 나타나는 순간, 이상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바로 그때, 미리 그 곳에 자리를 잡아둔 수많은 세력과 강자들간에 엄청난 혈전이 벌어질 것이다.
다시 엿새라는 시간이 흐르고, 지평선 아래 숨어있던 태양이 대지를 뚫고 올라와 대륙을 환하게 비추며 중주의 동북쪽 하늘에서 이상하리만치 맑은 공기가 파도처럼 멀리 확산되었다.
* * *
성운각의 깊은 곳에는 성운각 초대 장로들이 만든 밀실들이 가득했다. 오직 장로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그 밀실들은 성운계에서 가장 짙은 에너지가 모여 있는 곳 이었다.
평소 이곳에는 수많은 장로들이 모여 함께 회의를 하고 수련을 진행했고,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쾅!
돌연 공터에서 굉음이 터져 나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밀실 중 하나가 갑자기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문제가 일어난 밀실에서는 눈부신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쿵!
또 다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단단한 건물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잠시 후, 8미터도 넘는 황금색 거인이 일어나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황금색 거인이 입을 여는 순간, 무시무시한 음파가 성운계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게 뭐야?”
거인의 엄청난 힘을 느낀 장로들은 빠르게 날아가 황금색 거인의 주위를 둘러쌌다.
“허허. 이게 바로 금강유리체인가……. 역시 독특해.”
그때, 먼 곳에서 약로와 채린, 아라가 날아와 허공에 멈춰 섰다.
약로가 나타나자 장로들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각주님. 이건……?”
“하하. 소각주다.”
약로의 말에 모두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온몸이 황금빛으로 뒤덮인 거인을 바라보았다.
“하하!”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황금 거인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눈 깜짝할 새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콜록…….”
다시 작아진 이준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연신 기침을 해댔다.
“7미터밖에 되지 못했다니 아쉽네요……. 유리금강체를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으면 9미터까지 커질 수 있다고 하던데…….”
아쉬움이 가득한 이준의 표정을 본 약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욕심 부리지 말거라. 지금까지 마셨던 연금비약과 천연 보물들이 없었다면 반년 안에 이 정도 수준이 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게다.”
잠시 후, 약로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보리나무가 출현한다는 게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스승의 말을 듣는 순간, 이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성운각의 다른 장로들함께 보리나무의 땅으로 가거라.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일어난다면 네 몸에 있는 공간 옥패를 깨라. 그럼 내가 바로 지원을 가도록 하마.”
약로가 말했다.
“그리고 중주의 이름난 세력 뿐 아니라 8대 세력의 강자들도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이어지는 약로의 설명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성 강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걸린 일이니, 8대 세력 역시 혈안이 되어 달려드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성운각을 지키고 있어야 하니, 네 힘으로 모든걸 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하거라. 그리고 보리 나무의 땅 깊은 곳에 도착하면 이 두루마리를 찢거라.”
약로가 공간 두루마리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언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빠를수록 좋지. 네가 수련을 하던 반년 동안 다른 세력들은 이미 보리 나무의 땅 주위에 자리를 잡았으니까.”
스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의 눈동자에서 자갈색의 화염이 솟아올랐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이번에 이준과 동행한 것은 채린, 아라, 예린과 성운각의 투존 최고급 강자 하나였다. 천화존자는 아직 수련중이기 때문에 함께 가지 못했다.
중주 동북쪽에 위치한 보리 나무의 땅은 성운각과 상당히 멀기 때문에 동북 변방지역에 도착하는 데까지만 해도 6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