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1화. 마지막 지도조각
약로는 청동대문을 천천히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옅은 빛이 문 사이로 빠져나와 주변을 밝혔다.
눈앞을 가리던 빛이 걷히자, 광장보다 작은 고전(古殿)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전 안에는 돌로 된 의자가 수도 없이 놓여 있었는데, 이준 일행과 똑같은 망토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이준 일행이 들어오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망토로 신분을 숨겼다 해도 일부 사람들은 이준 일행의 신분을 몰래 훔쳐보려는 듯한 시선으로 훑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약로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대로 구석진 자리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는 소맷자락을 휘둘러 몸 주위에 얇은 장막을 만들어냈다.
“이곳엔 강자가 아주 많으니 조심해라.”
약로가 주의를 주자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곳에도 곳곳에 얇은 공간 막이 쳐져 있는 것을 보니 모두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우선 조용히 기다리자. 아마 곧 있으면 경매가 시작할 게다.”
약로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 채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역시 오늘 경매에 누가 참여했는지 살피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나갔고, 검은색 망토로 몸을 가린 사람들이 끊임없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고전 전체가 사람들로 빼곡해졌다.
“후…….”
무료한 기다림 속에 약로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허허, 익숙한 기운들이 조금 느껴지는 구나.”
이준의 질문에 약로가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약로가 느낀 것이 누구의 기운인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댕-!
그때, 길고 묵직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대전의 중심에서 백발의 노인 하나가 서서히 걸어 나왔다.
겉으로 보기엔 거의 죽어가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기이한 파동이 희미하게 노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투존 최고급 강자군.”
이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백발의 노인은 자신의 스승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 올라있는 강자였다.
“저 사람은 검보산의 산주, 보산 노인이다. 평생을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감정해 왔으니 보는 눈으로 따지자면 8레벨 연금술사 못지않지. 내가 저 자를 처음 봤을 때, 저 노인은 이미 중주에서 꽤 알아주는 강자였다. 지금은 투존 최고급 중에서도 9전(九轉) 투존 전성기 강자로 곧 있으면 반투성이 될 수 있는 존재지.”
약로의 목소리가 세 사람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9전 투존 전성기…….”
“허허, 공간거래회가 또 돌아왔습니다. 다들 별탈 없으셨는지요.”
그때, 보산 노인이 대전 안을 둘러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의 말에 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보산 노인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 아닌 듯 가볍게 손을 휘둘러 경매대 주위에 공간 결계를 만들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다들 모이신 것 같으니 바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비밀 경매의 첫 번째 경매를 시작하겠소.”
산 노인이 손을 앞으로 내밀어 허공에 맞대자,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새하얀 뼈 날개 하나가 눈앞에 솟아났다.
“요괴봉황의 날개?”
익숙한 날개를 보는 순간 이준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이런 위험한 물건이 경매의 첫 물품이라니, 과연 비밀 경매회의 명성이 헛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 봉황을 노리는 어둠의 손이 꽤 많은 가보네.”
이준은 흥미롭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령 운 좋게 이런 물건을 구했다 해도 당당하게 경매에 내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물건을 대놓고 거래할 수 있다는 것만 보아도 이 경매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실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요괴봉황의 날개입니다. 이곳에 앉아 있는 분들도 모두 이것이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지 알 겁니다. 비행 무투기로 제조한다면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속도를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도망치는 자를 따라잡거나 당할 수 없는 강적에게서 달아나는데 이만한 물건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보산 노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에서는 하늘 봉황족을 두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물건의 주인은 사색 비뢰를 소환한 8레벨 연금비약을 원하고 있습니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값을 제시해주시지요.”
이준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흥미로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유지했지만, 보산 노인은 재촉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첫 번째 입찰자를 기다렸다.
……
5분 정도 지났을까, 어디선가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하겠소.”
이준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 순간, 금색 망토로 온몸을 가린 사람이 옥병 하나를 보산 노인에게 던졌다.
옥병을 받은 보산 노인은 옥병 뚜껑을 열어보며 씨익 웃음을 지어보였다.
“더 높은 값을 제시할 사람이 있습니까?”
사방이 다시 침묵으로 뒤덮였다. 보산 노인은 예상한 듯 아무렇지 않았다. 이 날개의 주인은 실력이 6성 투존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사색 비뢰의 8레벨 연금비약과 바꾸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보산 노인은 손가락을 튕겨 요괴봉황의 날개를 낙찰자에게 보냈다.
“이곳은 다른 경매와 다르다. 보통 내놓는 물건들이 바꾸고 싶은 물건보다 훨씬 귀하면 대부분 포기한단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얼뜨기가 아니거든.”
약로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오늘의 두 번째 경매 물품은…….”
보산 노인의 손에서 다시 빛이 반짝이더니 금색 두루마리가 나타났다.
“금강유리체(金剛琉璃體). 1격 하급 무투기로 천 년 전 유리성자가 만든 것입니다. 최고급까지 수련하게 되면 육체가 마치 금강(金剛)처럼 단단해져 불사(不死)의 몸이되며 손발 하나로 천지를 부술 수 있지요.”
이준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이 무투기의 주인은 1격 하급의 물 속성 공법과 바꾸고 싶어 합니다. 물론, 그 가치에 맞는 연금비약과도 교환할 수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에 관심을 보인 많은 사람들은 보산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사람이 파란색 두루마리를 꺼내 보산 노인의 손에 던져주었다.
보산 노인은 두루마리를 받아 한 번 확인하더니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두 개의 두루마리가 보산에게 날아들며 순식간에 네 개의 1격 하급 무투기가 모여들었다.
밖에서는 하나만 있어도 남부러울 것이 없는 1격 무투기가 네 개나 있었다. 비밀 경매회의 위상이 다시 한 번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두루마리를 내놓는 사람이 없자 보산 노인은 네 개의 두루마리를 펼쳐 꼼꼼히 살펴본 뒤 세 개의 두루마리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보냈다.
“무투기 주인의 선택을 통해 이번 경매 결과가 결정되었습니다.”
곧이어 그의 손에 있던 황금색 무투기 두루마리가 대전 뒤로 날아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손에 떨어졌다.
“허…….”
두루마리를 손에 넣지 못한 세 사람은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보산 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경매를 이어갔다.
무투기에서 수련법, 연금비약과 온갖 천연보물, 무기에서 약솥까지 온갖 종류의 보물들이 경매대에 올랐다. 모두 외부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날 만큼 대단한 물건들이지만, 이곳에선 그렇게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이준은 ‘저승의 독전(毒典)’이라는 독경이 나왔을 때 아라를 위해 오색 비뢰의 8레벨 연금비약 두 개로 샀던 것을 제외하면 전혀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놓쳐선 안 될 만큼 이준의 마음에 꽂히는 물건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승의 독전’은 천 년 전, 저승성자라는 투성 강자가 발명한 것으로, 독을 사용하는 것을 매우 즐기던 강자가 남긴 수련법이었다. 그 안에 있는 독은 투존 강자도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본래 이 수련법은 독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제 몸을 해치는 수련법에 불과했지만, 아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련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후 이준은 구매하지는 않았지만 경매에 나온 물품을 보며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외부세계에서 보기 드문 물품들이 순조롭게 거래되면서 대전 안의 분위기가 갈수록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준이 기다리는 지도 조각은 여전히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두 개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번에 거래될 경매품은…….”
잠시 후, 보산의 손에 누렇게 변색된 지도 조각 하나가 나타났다.
그 지도 조각을 보는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불똥이 튀었다.
“허허, 이것은 찢어진 지도 조각으로 특별한 에너지가 느껴지진 않지만, 우리가 연구한 결론에 따르면 정화의 불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보산 노인이 손에 들린 지도 조각을 하늘 높이 들며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지도조각에 꽂혔다.
* * *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대전 안을 둘러보는 보산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 지도조각 하나만으로 정화불꽃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손에 얻고 나면 정화의 불꽃과 관련된 소식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지도조각을 탐내고 있었다.
“허허, 이 지도조각의 주인은 연금비약을 원하고 있습니다. 교환 조건은 최소 육색비뢰 이상입니다. 자, 경매를 시작합니다.”
잠시 후, 한 노인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육색 8레벨 연금비약 세 개를 내놓겠소.”
“육색 8레벨 연금비약 네 개.”
“다섯 개……”
한 노인을 시작으로 단 몇 분 만에 경매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저희는 어떡하죠?”
이준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우선 조급해 하지 말고 기다려보자.”
가격이 오를 때마다 이준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지도조각 하나일 뿐인데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들다니, 생각하지 못한 결과였다.
결국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지도 조각의 가격은 육색 8레벨 연금비약 10개까지 치솟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손을 드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칠색 8레벨 연금비약 다섯 개!”
그때, 누군가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가격을 올렸다.
대전 안에 순간 적막이 잦아들며 사내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여덟 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든 노인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이준의 스승, 약로였다.
“팔색 8레벨 연금비약 하나!”
약로가 가격을 올리자, 칠색 연금비약 세 개를 내놓겠다던 사내가 다시 한 번 가격을 올렸다.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좌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지도 조각 하나에 팔색 연금비약이라니,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었다.
“세 개.”
하지만 약로가 담담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가격을 올리자, 경매장 내부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하지만 이준이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싸늘한 목소리가 이준의 귓등을 때렸다.
“다섯 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비쩍 마른 그림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준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정체불명의 강자는 곧바로 이준을 향해 날카로운 에너지를 쏘아보냈다.
“흥!”
그 순간, 약로가 가볍게 손을 휘둘러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흩어버렸다.
“실력이 대단한 사람인데요.”
“조심해라. 저 자는 반투성이 되기 직전의 강자다.”
약로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긴장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