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7화. 연금비약 제련
그는 바로 가한제국의 ‘단왕’ 고하였다. 현재 연금술 본당의 당주로 있는 그의 뒤에는 연금술 의복을 입은 노인들이 줄줄이 서있었다.
하나 같이 낯선 얼굴인 걸 보니 이준이 불의 연맹을 떠난 뒤에 들어온 사람들인 게 분명했다.
“연맹주님, 몇 년 사이에 더욱 강해져서 돌아오셨군요. 이제는 감히 눈조차 마주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고하가 이준을 향해 인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불의 연맹에 들어온 이후로 절치부심하여 연금술을 단련했고, 덕분에 지금은 7레벨 고급 연금술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그보다 더욱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으니, 허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고하 대가님은 지금 서부 대륙 최고의 연금대사다. 연금술 본당 역시 대가님이 관리하시면서 크게 발전했지. 불의 연맹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연금술 본당의 공이 커. 저 뒤에 계신 분들은 본당의 장로들이고. 모두 6레벨 연금술사로 연금술 본당의 기둥들이지.”
채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준이 막 무언가 말을 하려는 찰나, 귓가에 채린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금술 본당은 불의 연맹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게다가 몇 년 사이 불의 연맹이 급속도로 발전한건 사실상 연금술 본당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하지만 그로 인해 고위층에서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지. 심지어 연금술 본당이 없으면 불의 연맹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까지 있을 정도니까. 연금술 본당은 독립적인 성격을 갖고 있고 나는 연금술사가 아니기 때문에 본당 사람들에겐 고하보다 높이 평가받을 수 없어.”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이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연금술사들은 모두 오만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들이니, 그런 자들을 모아 놓은 연금술 본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하는 정직하지만 아랫사람을 관리할 능력은 없기 때문에 그런 자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오만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키운다면 불의 연맹에게 독약이 될 거야. 이대로 둘 순 없어.’
이준은 고하와 본당 장로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승천의 비약도 그런대로 괜찮지만 최고의 선택은 아닙니다. 고하 대가님, 여의단(如意丹)이라는 연금비약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여의단’이라는 말에 고하와 본당 장로들의 표정이 대번에 바뀌었다.
“8레벨 연금비약, 여의단?”
“8레벨 연금비약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고하가 의심 섞인 얼굴로 이준에게 물었다. 그의 뒤에 있던 장로들의 눈에도 의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7레벨 고급 연금비약을 만들 수 있는 고하는 서부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연금대사였다. 이준의 행적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래도 고하가 불의 연맹 내에서는 최고의 연금술사가 아니겠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여의단은 5색 비뢰를 소환할 수 있는 8레벨 연금비약이지요. 고하 대가님, 내일 연금비약 제련을 선보일 테니 연금술 본당의 모든 연금술사들을 집합시켜 주십시오. 불참하는 자는 즉시 불의 연맹에서 쫓아내겠습니다.”
“이곳을 떠날 때 연금술 본당에게는 다른 당에게 없는 특별한 권리와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7레벨 연금술사가 아직도 5명이 되지 않는다니, 솔직히 말해 기대 이하이군요.”
이준은 고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 심각해진 이준의 목소리에 고하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본당 장로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없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채린조차 고하 앞에서 이런 말을 하지 못 하는데, 어찌 몇 년이나 연맹을 떠나있던 연맹주가 돌아오자마자 연금술 본당에 손을 대려 한단 말인가.
“알겠습니다. 그럼 전 사람들을 소집하러 가겠습니다.”
고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이준을 향해 인사를 올리고는 함께 온 장로들과 자리를 떴다. 이 소식이 알려진다면 연금술 본당에서 적지 않은 파장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멀어지는 고하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래도 괜찮은 거야? 너무 막대해도 늘 오만하게 굴던 연금술사들의 반발이 클 텐데.”
채린이 조금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연금술 본당에 있는 사람들과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연금비약을 가져오는 사람들에게 당한 적이 있어 본당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 대충은 예상이 되었다.
“반발? 그래봤자. 삼류 연금술사일 뿐이야. 중주에선 명함도 못 내밀 녀석들인데, 떠나면 새로 구하면 돼.”
이준의 태도는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성운각과 불의 연맹 사이에 공간 통로가 만들어 졌으니, 연금술 본당의 물이 흐리다면 중주에 있는 연금술사를 불러 대체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그 거만한 놈들의 콧대를 꺾어주어야겠구나.”
이준은 품속에 있는 이솔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준의 표정을 본 채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연금술 본당은 연맹주의 직위를 대행하고 있는 그녀의 체면을 몇 번이나 짓밟아 왔었다. 하지만 이제 이준이 돌아왔으니 그들의 오만한 행동을 더 이상 두고 볼 필요가 없었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장로들이 있어. 그 중 두 사람은 나중에 연맹에 가입한 7레벨 연금술사야. 내가 알기로는 연금술 본당에 있는 연금비약을 몰래 팔아넘기고 있는데 증거가 없어서 나도 손 쓸 방법이 없어.”
“알았어.”
채린의 말에 답하는 이준의 눈빛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 * *
현황요새는 불의 연맹에서 가한제국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따라서 연금술 본당에서도 이 곳에 수많은 인원을 동원한 상태였으며, 연금술 본당 소속 연금술사의 1할 가까이가 모두 요새 안에 있는 분당에 머무르고 있었다.
고하가 연금술 본당으로 돌아가 이준이 한 말을 전하자, 예상대로 적지 않은 파장이 일어났다.
연금술 분당은 현황요새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불의 연맹에 소속된 당 중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 시각, 분당 안에 있는 대청에선 큰 소란이 일어났다.
“허, 연맹주라는 자가 이제 돌아와서는 연금술 본당의 내정에 관여하다니, 우리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불의 연맹도 없었을 거라고!”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의 가슴팍에는 금색 물결무늬 일곱 개가 새겨진 7레벨 연금술사 휘장이 달려있었다.
“류창호 대사의 말이 맞소.”
회색 옷의 노인은 본당 내에서 꽤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는 듯, 일부 연금술사들이 그의 말에 찬성했다.
수위(首位)에 앉아있는 고하는 말없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연금술에는 뛰어나지만 사람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재주가 없었다.
고하 옆에는 백발의 늙은 노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바로 연금술사 공회 회장, 해길이었다. 그 역시 논쟁에 끼어들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말없이 앉아있었다.
“고 당주님. 이번 일에 대해서 연맹주에게 제대로 말씀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간 불의 연맹의 기둥으로 불의 연맹을 발전시킨 일등 공신입니다. 연맹주가 연금술 본당의 일까지 관여를 한다면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중단발의 한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고하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옆에 앉은 해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해길이 눈을 뜨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연맹주 역시 연금술사요. 게다가 연금술도 나를 뛰어 넘었소. 이런 데에 문외한도 아니고…….”
“고 당주님. 그리 말하시면 안 됩니다. 연금술 본당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단 말입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연맹주가 설마 우리보다 정세를 더 잘 알겠습니까?”
류창호라는 노인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게다가 8레벨 연금 비약은 말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연맹주가 실력이 강하다고 8레벨 연금비약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도 7레벨 고급 연금술사이니 8레벨 연금종사가 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 겁니다. 지금 이렇게 젊은 연맹주가 연금종사라니요, 믿을 수 있는 정보입니까?”
“연맹주가 8레벨 연금비약을 제련해낼 수 있는지는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오. 어쨌든 내일 시간에 맞춰 오시오. 그리고 부디 연맹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를 바라오. 그럼 해산합시다.”
참다 못한 고하가 이렇게 말하자 류창호와 한 노인은 눈썹을 찌푸렸지만 차마 더 이상 말꼬리를 잡지는 못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인사를 올리고 대청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떠나자 대청 안은 순간 휑해졌다. 고하는 다른 사람들 역시 물러나도록 한 뒤 고개를 돌려 해길을 바라보았다.
“해길 형님.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네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니 류창호와 오진우 두 사람이 본당에서 점점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 같군.”
해길은 그제야 눈을 뜨며 찻잔을 들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네. 곧 연맹주가 알아서 정리하겠지. 연맹주가 칼을 뽑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자네도 알지 않는가. 연금술 본당은 매우 중요하지만 연맹주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니 정말 해산시켜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네. 게다가, 연맹주가 8레벨 연금술사가 되었다는 것은 결코 헛소문이 아닐걸세.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 말일세. 그러니 그가 지금의 연금술 본당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라 장담할 수도 없지.”
해길의 대답에 고하는 더욱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걱정말게. 연맹주의 성격과 실력이라면 깔끔하게 일이 처리될 테니까.”
* * *
다음 날, 현황 요새에 태양이 떠올랐다.
아침부터 연금술 본당 안이 떠들썩했다. 명령을 받은 많은 연금술사들은 아침부터 일어나 연금술 본당에 있는 연금비약 제련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광장 안에는 고하, 해길 등 연금술 본당의 최고위층 위원들도 일찍부터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광장 안에 모인 수백 명의 연금술사들을 바라보던 고하가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좁혔다. 아직까지 류창호와 오진우 두 사람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두 영감은 정말 사리분별도 할 줄 모르는군.”
두 사람은 자신들이 7레벨 연금술사라는 것을 믿고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제 멋대로 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욕을 읊조리던 고하는 무언가를 느끼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준 일행이 광장에 나타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연맹주님!”
이준이 등장하자 고하 일행은 황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나머지 연금술사 들 역시 급히 그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금술사들을 이렇게 많이 모아두다니……. 연금술 본당의 규모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모양이었다. 이 정도 숫자의 연금술사가 모여 있다면 입김이 세지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허공 위에 있던 이준이 순식간에 광장에 위치한 높은 제련 석탑 위에 나타났다.
“오늘 8레벨 연금비약을 제련할 테니 잘 보시오. 앞으로 여러분의 연금술을 발전시키는데도 큰 도움이 될 테니.”
그의 말에 모든 사람들은 미친 듯이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설마 저렇게 젊은 사람이 정말로 8레벨 연금종사가 되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