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화. 사 천존 (2)
“나오너라!”
사 천존이 붉은 칼을 내리치자, 공간이 갈라지며 사라졌던 이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준은 피할 생각조차 없다는 듯 사 천존의 공격을 가슴으로 받아내는 동시에 뜨거운 자갈색의 화염을 내뿜어 상대를 공격했다.
쾅!
두 사람의 공격이 서로의 몸에 닿는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준은 어깨만 살짝 흔들렸을 뿐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와 반대로 사 천존은 윽, 하는 소리와 함께 강하게 뒤로 밀려났다.
“이렇게 주고받다간 견디지 못할 것 같은데?”
당황한 사 천존은 이준의 옷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조금 전 공격에서 자신의 공격을 저 옷이 대부분 흡수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처 흡수하지 못한 힘이 있을텐데, 어떻게 이토록 말짱할 수 있단 말인가?
이준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식인충의 갑옷 아래 숨겨진 용황 갑옷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 천존은 이준의 피부에 그런 것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이런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혈성공법, 대서혈술(大噬血术)!”
다음 순간 사 천존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지며 천 미터 반경 안에 있던 투존 이하 강자들이 잇달아 펑, 하고 터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계곡에서 올라온 피바다에서 거대한 피 기둥이 솟아나와 사 천존의 몸으로 모조리 빨려들었다.
그러자 조용하던 사 천존의 기운이 또 다시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준. 날 너무 우습게보지 말거라. 이씨 가문의 모든 피와 네가 활성화시킨 피 모두, 내가 가져가겠다!”
이준 역시 표정이 굳어버렸다.
지금 그의 기운은 이미 투존 최고급 강자를 넘어선 상태였다. 역시 중주에서 악명이 높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기운이 폭등하면서 사 천존의 두 눈에는 빨간 실핏줄이 가득해졌다. 혈성공법은 신선한 피 속에 흐르는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지만, 부작용이 너무 큰 것이 문제였다.
이처럼 거대한 에너지를 흡수한다면 대략 한달 정도는 투왕 수준까지 염력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토록 부작용이 큰 비술을 사용한다는 것은 사 천존 역시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였다.
“자, 이제 정말로 목숨을 걸고 붙어보자!”
사 천존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핏빛 안개가 빠르게 퍼져나가며 새빨간 피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온 천지에 퍼져나가는 역겨운 피 냄새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며 곧장 네 개의 천지의 불꽃을 소환했다.
네 개의 천지의 불꽃을 소환한 이준이 다시 긴 숨을 들이마시며 인결을 맺자, 회색의 화염이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오륜이화법(五輪離火法)!”
다음 순간, 다섯 개의 화염이 한꺼번에 하늘 위로 솟아올라 다섯 개의 마수로 변화했다.
“합(合)!”
이준의 외침에 불의 정령들이 빠르게 회전을 하기 시작하더니 무시무시한 열기에 의해 붉은 피구름이 빠르게 흩어졌다.
“허!”
“악령의 손아귀!”
그 때, 사 천존의 입에서 섬뜩한 기운을 가득 머금은 핏줄기가 터져나와 피구름을 향해 날아갔다.
핏줄기와 맞닿는 순간, 피구름이 격렬하게 뒤흔들리며 수 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핏빛 주먹이 솟아나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준, 흔적도 없이 없애주마!”
이에 맞서 이준 역시 번개같인 인결을 맺기 시작했다.
“오륜이화반(五輪離火盘)!”
우우웅!
이준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오색 화염으로 만들어진 원반이 갑자기 형성되어 거대한 주먹과 강하게 맞부딪혔다.
콰앙!
핏빛 주먹과 뜨거운 화염이 맞부딪히며 폭발을 일으키자, 무서운 에너지가 하늘 전체로 퍼져나가며 거대한 파문을 만들어냈다.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자, 사 천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가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도 전에 이준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이내 그의 등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아났다.
“이준?!”
갑자기 나타난 이준을 보고 사 천존의 눈동자가 빠르게 수축되었다. 그는 이준이 뒤에 나타나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죽음의 광단!”
이준이 번개 같은 동작으로 오른손을 휘두르자, 새까만 광단이 빠르게 사 천존의 몸을 덮쳤다.
사 천존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는 구 천존처럼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다.
“마수의 옷!”
사 천존이 인을 맺자, 그의 모공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와 핏빛 갑옷이 되어 그의 몸을 감쌌다.
쿵!
하지만 검은 광단이 핏빛 갑옷에 닿자, 혈액으로 만들어 진 붉은 갑옷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푸흡!”
죽음의 광단을 미처 다 막아내지 못한 사 천존은 결국 피를 토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어딜 달아나려고!”
하지만 이준이 그대로 사 천존을 놔줄 리가 없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대로 끝낼 순 없었다.
다음 순간, 이준의 등 뒤에서 청홍빛 날개가 펼쳐지며 번개처럼 허공을 가르고 날아들어 사 천존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손에는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자갈색의 화련이 들려있었다.
“죽어라!”
이준의 살기등등한 표정에 사 천존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럴수가, 어떻게 1격 무투기를 세 개나 연달아 시전할 수 있단 말인가!’
사 천존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자갈색의 연꽃이 그의 몸에 맞부딪히며 무시무시한 화염폭풍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화염폭풍이 등장하는 순간,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이 전부 날아가 버리며 실력이 약한 사람들의 피가 격렬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곧이어 화염폭풍 속에서 연달아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화염에 휩싸인 형체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피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쿵!
사 천존이 피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뜨거운 열기에 핏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하더니 불과 10초 만에 완전히 증발해버렸다.
한편, 하늘 위에서는 이준이 가만히 숨을 고르며 피바다에 떨어진 사 천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예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해.”
다음 순간, 이준의 손에서 하얀 불씨가 섞인 자갈색 불기둥이 튀어 나와 피바다를 강타했다.
쿵!
“푸흡!”
피부까지 녹아내려 살만 남은 사 천존은 힘없이 눈을 뜬 채 자그마한 옥조각 하나를 꺼내 그것을 깨뜨렸다.
쉭!
옥조각이 깨지자마자 새카만 공간 통로가 사 천존의 옆에 나타나 그를 빨아들였다.
휙!
잠시 후, 사 천존이 사라진 자리에 이준이 유성처럼 나타나 아직 일그러져있는 공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망가는 건 빠르네.”
그렇게 매서운 공격을 당하고도 달아나다니, 상당히 예상 밖의 일 이었다.
하지만 이준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이 정도 부상이면 후유증이 남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
이준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천존 둘을 상대하기 위해 연거푸 1격 무투기를 시전한 탓인지 적잖이 호흡이 가빠왔다.
하지만 아직 상황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니 이대로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염력을 회복한 이준은 곧바로 인을 맺어 아직 남아있는 영혼의 궁전과 사명종의 강자들의 발밑에 불기둥을 소환했다.
쿵쿵!
이준이 무투기를 시전하는 순간, 사방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장면을 본 영혼의 궁전의 강자들과 사명종의 강자들은 이미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연맹주, 진정하시오. 나도 강압에 의해 온 것이오!”
영혼의 궁전에 의해 끌려온 강자들이 혼비백산해 달아나며 소리쳤다.
이곳에서 가장 강한 구 천존과 사 천존이 모두 이준에게 당했으니 그들은 감히 이준에게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 했다.
“이곳에서 살아나가고 싶다면 사명종 강자들의 시체를 하나씩 가지고 와야 할 것이오.”
이준의 말에 사명종 강자들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반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명종과 손을 잡고 불의 연맹을 공격하던 강자들은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사명종의 강자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정말 비열한 녀석들이군.”
이정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서로 원수가 된다면 더 이상 사명종과 손을 잡을 세력은 남아있지 않다고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사명종은 이번 전투에서 종주와 수많은 강자들을 잃었고, 이미 서북 대륙의 수많은 세력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몰락 뿐이었다.
몇 분이 지난 뒤, 사명종 강자들 사이에서 사상자가 잇따라 나오면서 아무런 지휘도 받지 못한 대군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후우.”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었다고 판단한 이준은 몸을 돌려 요새의 성벽 위로 내려갔다.
그가 돌아오자, 요새 전체에 엄청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불의 연맹은 영원하다! 연맹주 만세!”
“또 일당백의 영웅이 되었네.”
채린이 이준을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하지만 차가운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하. 소각주님 역시 상상을 초월하십니다! 혈하존자를 처리하다니, 과거 스승님의 활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군요.”
호 씨 셋째 장로가 이준에게 다가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성운각으로 돌아간 후 보수를 지급해드리겠습니다.”
이준의 말에 호 장로의 뒤쪽에 서있던 투존 강자 하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약선님께서 설마 저희를 속이기야 하겠습니까. 답례는 천천히 받도록 하고, 어서 이곳의 상황부터 수습하시지요.”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여러분은 일단 휴식을 취하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준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이찬과 이정은 이미 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빠, 대단해요.”
이준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뒤에서 마음을 울리는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이준은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며 뒤로 돌아 채린의 품에 안긴 채 손을 흔드는 작은 계집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채린의 품에 안겨있는 이솔의 이마를 매만졌다.
그때, 이솔의 미간에 새겨진 뱀 문양이 빛나더니 그 안에서 신비한 색의 작은 뱀 하나가 튀어나와 이솔의 어깨 위에 똬리를 틀었다.
“이건 칠색 이무기인가?”
“응. 칠색 이무기의 영혼의 일부는 솔이가 되었지만, 그 힘의 일부는 칠색 이무기로 남은 것 같아. 어린 아이의 몸으로는 그 힘을 완벽히 담을 수 없기 때문이었겠지. 본래는 하나의 영혼이지만, 이제는 완전히 별개의 두 개의 영혼으로 나뉜 것 같아.”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야?”
채린의 설명에 이준이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솔이의 탄생조차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잖아.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 어찌됐든, 칠색 이무기는 솔이의 수호신 같은 존재야. 어쩌면 그 힘을 조금씩 흡수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이어지는 채린의 설명에 이준은 더욱 놀란 듯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일단 솔이를 강하게 만들어주자. 칠색 이무기의 힘을 흡수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릇이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다정하게 이솔을 바라보는 이준의 모습에 채린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네가 보낸 연금비약 덕분에 태어나기 전부터 아주 좋은 체질을 가지게 되었어.”
이준이 약속했던 연금비약에 대한 일을 잊어버렸다면 채린은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준은 그 약속을 줄곧 마음에 두고 있다가 흑각성을 떠나면서 이찬을 통해 연금비약을 보냈고, 덕분에 그녀의 딸은 차기 여왕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질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었다.
“아직 부족해.”
그러나 이준은 만족하지 못 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에게 보낸 이무기의 정수는 7레벨 하급밖에 되지 않아.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지.”
“하하, 그럼 7레벨 최고급 연금비약인 승천의 비약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만 제 실력으로는 실패할 확률이 너무 높으니 연맹주님이 직접 나서 주셔야겠군요.”
그때,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준은 곧바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고하 대가님. 잘 지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