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조력자
이준은 며칠 전 약로가 유정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준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자 유정은 조금 들뜬 듯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소각주님, 잠시 지도를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유정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번 해봐.”
“네.”
이준이 웃으며 따뜻하게 대답해주자, 유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최근에 익힌 2격 무투기를 시전했다.
이준은 뒷짐을 진 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무투기를 시전하는 유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정의 실력을 확인한 이준은 작은 문제점 몇 가지를 지적해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는 이준이 지적해준 것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완벽하게 고쳐냈다.
실로 천재라는 말에 걸맞는 재능이었다.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장차 중주 전체에 이름을 떨칠 강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투기 시전을 마친 유정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소각주님, 어때요?”
“음, 잘 하네.”
이준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정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
“음…….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관심 있으려나?”
“무슨 일이요?”
이준이 턱을 문지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제자가 되는 게 어때?”
“에?”
이준의 말에 유정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소각주님……. 기명제자로는 안 될까요?”
“크흠.”
유정의 말에 이준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이준의 허락이 떨어지자, 유정의 입가에 또다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우웅!
그때, 공간이 갑자기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희미한 파동이 성운계 전체에 전해졌다.
공간 파동을 느낀 이준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뒷산을 바라봤다.
‘공간 통로가 완성된 건가…….’
“유정아. 우선 난 뒷산에 다녀올게. 나는 며칠 뒤에 이곳을 떠나 당분간 자리를 비우니 내 스승님을 찾아가면 널 가르쳐주실 거야.”
이준이 고개를 돌려 유정을 바라보고 말했다.
“네, 소각주님…….”
“이젠 그렇게 안 불러도 돼.”
“……네, 스승님.”
스승이라고 부르라는 말에 유정은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 내. 다음에 내가 돌아왔을 때는 투황이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유성처럼 빠르게 공간이 요동치는 곳으로 날아갔다.
* * *
이준이 뒷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십 미터 정도 되는 공간 통로가 석대 위에서 진한 공간의 힘을 내뿜고 있었다.
“스승님, 성공한 겁니까?”
“그렇다.”
이준의 질문에 약로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여자 아이는 만나보았느냐?”
“예. 자질이 아주 뛰어난 아이더군요. 잘 키우면 분명 훌륭한 투사가 될 것 같습니다.”
“제자로 거둔 모양이로구나.”
약로가 말했다.
이준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약로는 유정이 그저 기명제자로 남았다는 말에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어쨌든 이 일에 대해서는 네가 크게 마음 쓸 필요가 없는 것 같구나.”
“예. 저희는 언제 출발하면 될까요?”
“통로가 이제 막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아직 안정적이지 않아 며칠 뒤에 출발해야 할 게다. 사명종 쪽에 영혼의 궁전 놈들이 많을 테니, 너는 그동안 다른 조력자들을 찾아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이 좋겠구나.”
“다른 조력자들이요?”
이준이 눈썹을 들썩거리며 물었다. 투존 강자 정도는 되어야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텐데, 어디 가서 투존을 끌어들인단 말인가?
“허허, 연금술사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잊었느냐? 이미 다른 곳에 사람을 보내 투존 강자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보수는 8레벨 연금비약 세 개 정도로, 몇 색 비뢰의 8레벨 연금비약일지는 각자의 실력과 활약으로 결정할 예정이다.”
약로가 웃으며 말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거라 믿는다. 넌 그들과 서북 대륙으로 가 사명종을 처리하거라.”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이 좀 큰 거 아닙니까? 한 사람당 8레벨 연금비약 세 개라면…….”
“걱정 마라. 9레벨 이하의 연금비약이라면 아무 문제없다.”
약로의 담담한 말에 이준 역시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혼자 서북 대륙으로 가 영혼의 궁전의 강자들과 맞서려면 강력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럼 며칠 더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 * *
3일 후, 성운계 뒷산에 열 명이 넘는 투존 강자들이 집결했다.
열 명이나 되는 투존이 모여 있으니 온 천지가 떨릴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산 전체를 뒤덮었다.
“여러분. 이번 여정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 서북 대륙에 도착하면 모두 저의 지시를 따라주십시오.”
이준의 말에 초대를 받아 찾아온 강자 열두 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이준은 붉은 얼굴의 노인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그 노인은 이번 초대를 받고 찾아온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로, 그와 함께 온 나머지 8성 투존강자 두 명은 바로 이 노인의 친동생들이었다.
말을 마친 이준이 약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저들을 완전히 믿을 필요는 없지만 초대 장로들은 믿어도 될 게다. 게다가 서북 대륙에 대한 정보는 그들이 너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일을 처리하도록 하거라.”
약로는 고개를 끄덕이다 성운각의 의복을 입은 노인들을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준비를 마친 듯 하자, 약로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와 팔을 흔들었다.
약로의 손짓에 산꼭대기에 위치한 공간 통로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천둥같이 웅장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두루마리를 가져가거라. 통로에 아직 확실한 좌표가 없으니 목적지에 도착한 후, 안전한 곳을 찾아 이것을 찢으면 될 것이다. 그럼 네가 두루마리를 찢은 곳과 이곳이 영구적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야.”
약로가 검은색 두루마리를 꺼내 이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 두루마리에선 무시무시한 공간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준은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받아 저장반지에 넣은 뒤, 회전하고 있는 공간 통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갑시다!”
* * *
넓게 펼쳐진 평원에는 모래바람이 휘날리고 있었고, 붉은 석양이 서서히 지평선과 가까워지면서 하늘이 담홍빛으로 물들었다.
휙!
텅 빈 공간에서 격렬한 공간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새카만 공간 통로가 솟아났다.
잠시 후, 그 안에서 20, 3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와 땅 위에 착지했다.
“이곳이 서북 대륙이오?”
붉은 얼굴의 노인이 사방을 둘러보다 검은 옷을 입은 청년에게 물었다.
그들은 바로 성운각에서 서북 대륙으로 날아온 이준 일행이었다.
호 씨 성을 가진 노인의 질문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서북 대륙은 매우 광활했고, 그가 알고 있는 지역은 가한 제국과 가까운 몇몇 제국뿐이라 이곳이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소각주님. 이곳은 서북 대륙의 북쪽입니다. 각주님이 설치하신 공간 통로와 연결할 공간 인결이 없어 일단 이곳에 도착한 것입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노인이 주변을 둘러보다 지도를 꺼내 펼치며 말했다.
서북대륙의 상세 지도에는 반 이상이 사자머리 문양이 박혀있었고, 그 외에 일부분에는 ‘불’이라는 글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각각 사명종과 불의 연맹의 세력범위를 표시해 둔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얻은 소식에 따르면 서쪽은 이미 사명종의 영토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 역시 사명종의 세력범위 안이지만, 북쪽에는 사명종의 강자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명종의 주요 전력들은 모두 불의 연맹과 접경지인 곳에 몰려있을 겁니다.”
하얀색 옷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서북쪽으로 가서 관문 하나만 넘으면 곧바로 불의 연맹 구역에 도착할 수 있겠군요.”
지도를 바라보던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아하니 가는 길에 사명종과 영혼의 궁전의 정예 부대만 마주치지 않으면 불의 연맹까지 수월하게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움직입시다. 가면서 현재 서북 대륙의 정보들도 수집해야 합니다. 모두 최대한 기운을 숨기고 제 명령을 따라 주십시오.”
말을 마친 이준이 서북쪽을 향해 날아오르자, 그의 뒤를 따라 다른 투존 강자들도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 * *
이준 일행은 서북쪽에 있는 불의 연맹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갔다.
주위는 이미 사명종의 강자들에 의해 완벽하게 장악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명종의 강자들은 대부분 투종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준 일행을 막기는커녕 보이는 족족 붙들리고 말았고, 포로로 잡은 투종 강자들의 입을 통해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이준의 표정은 어둡게 내려앉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의 연맹은 이미 사명종에 의해 3분의 2에 가까운 땅을 잃었고, 불의 연맹에 소속된 대부분의 강자들은 ‘현황 요새’라는 곳에서 결사의 항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였다.
현황 요새는 가한제국 대본영 외에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이 요새가 무너지면 가한제국에 있는 대본영까지 적들이 밀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 때문에 불의 연맹 강자들과 불의 연맹과 동맹을 맺은 모든 종파들은 현재 현황 요새에 모여들어 있었다.
사명종은 영혼의 궁전과 손을 잡고 서북 대륙 땅의 대부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게다가 권력을 이용해 다른 강자들을 끌어들이면서 이미 서북 대륙에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현황 요새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사명종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준 일행이 붙잡은 사명종 강자의 말에 따르면 현재 사명종은 자신들의 최정예 강자들을 모두 현황 계곡으로 보냈다고 했다.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은 이준은 더욱 속력을 높여 현황 요새로 향했다.
* * *
현황 계곡은 두 산맥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천연의 요새로, 일 년 내내 투황 강자들도 다가갈 수 없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는 곳 이었다.
뿐만 아니라 요새 양쪽의 벽이 날카로운 도끼에 베인 것처럼 매끄럽게 나뉘어 있어 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현황 요새는 현황 계곡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위치해 있는 요새로, 이곳을 지나지 않고 산맥을 넘으려면 4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빙 돌아가야만 했다.
게다가 현황 요새는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현황 요새에서 보이는 초원은 현재 새까만 안개로 뒤덮여 있었으며, 사방에서 비명 소리와 폭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요새 중심에는 전우(殿宇)하나가 우뚝 서 있었는데, 전우의 중심부에는 커다란 대전이 위치해 있었다.
대전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대전의 가장 상석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자 하나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차가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의 연맹에서 이토록 오만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메두사 여왕뿐이었다.
“사명종의 대군이 국경까지 접근했다. 지금은 우리를 시험하고 있지만 3일 안에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채린이 조용한 대전 안을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