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0화. 고계를 떠나
아름다운 달빛이 강물처럼 지상으로 흘러내려와 한적한 숲속을 환하게 비추었다.
조용한 숙소 안에서 이준은 뒷짐을 진 채 멍하니 하늘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또 다시 이은과 떨어져야 하다니, 참으로 하늘이 야속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내일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
그 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부드러운 손이 뒷짐을 지고 있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은아,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이준이 몸을 돌려 웃으며 말했다.
“채린 언니의 일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이준의 몸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너……. 알고 있었어?”
“고족 사람들이 수시로 오라버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저에게 전해줬으니까요.”
이은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일은…….”
이준이 난처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자, 이은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면서요.”
“그게……. 설명하자면 복잡해. 내가 데리고 다니던 이무기가 그녀와 융합됐다가……. 사실 나도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긴 건지 모르겠어. 어찌됐든, 절대로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이은은 한참동안 허둥대며 변명을 늘어놓는 이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고족의 밀정들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더라고요. 일단 믿어줄게요.”
말을 마친 이은은 피식 웃으며 이준의 품에 안겼고, 이준 역시 말없이 이은을 부둥켜안은 채 가볍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흠, 흠…….”
두 사람이 서로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고족의 가주이자 이은의 아버지인 고원이 민망하다는 듯 연신 헛기침을 해대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이은은 고원을 보자마자 이준의 허리를 한 번 세게 꼬집고는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은이 방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당황한 이준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원을 바라보았다.
대나무가 우거진 숲속 하늘 위에 나타난 고원은 이준을 바라보다 이은이 들어간 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없이 이은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은이 다른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이현을 만났느냐?”
고원의 질문에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만났습니다.”
“네 체내에서 피의 힘이 느껴지는 구나. 분명 그게 이족에게 남은 마지막 투제의 피겠지.”
고원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현이 이족에게 마지막 불꽃을 남겨주기 위해 그런 모습으로까지 변해가면서 모든 걸 너에게 바친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다.”
이준도 천상무덤이 사실 감옥과 다름없는 곳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에너지체로 살아난 이현을 비롯한 여러 강자들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죄수들인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끝이 보이지 않는 외로움과 싸워나가야 했다.
“고원 선배님. 혹시 그곳을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겁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일단 나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네. 천상무덤은 아주 오래 전에 투제 강자가 만든 곳이라 들었는데, 그 곳의 규칙을 깨고 이현을 빼내려면 그 정도 실력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고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투제’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 같았다.
“투제라니…….”
이준이 씁쓸하게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투제가 정말 존재하고 있나요?”
이준의 질문에 고원은 한참동안 조용히 생각하다 이내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신처럼 이 넓은 대륙을 내려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인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의 눈에는 투성이라 해도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처럼 보일터인데…….”
말을 마친 고원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내일 바로 이 곳을 떠나야 할테니 충분히 쉬게. 자네 실력이라면 장로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 하겠지. 다만 최근 영족의 일도 있고 하니 은이는 당분간 고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네.”
“고원 선배님은 영계의 일이 사람으로 인해 벌어진 것 같습니까? 아니면 그저 천재지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어지는 이준의 질문에 고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건 우리도 잘 모르겠네. 다만 지금 영족에게 큰 문제가 생긴 것만은 확실한 것 같군. 투기 대륙 최고의 세력으로 꼽히는 영족을 이렇게 만들 정도라면 우리 고족도 어찌할 방도가 없을 것 같네.”
“상대가 혼족이라면 어떻습니까?”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천상무덤에 있을 때 이현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혼족이 영족을 이렇게까지 몰아넣으려면 온 사람을 전부 동원해야할 텐데, 그렇다면 고족이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 했을 리 없네. 게다가 혼족이 무슨 이유로 영족 같은 강적을 건드리겠나? 아무리 예전만 못 하다 해도 8대 세력은 8대 세력, 함부로 공격할 수 있는 세력은 아니네.”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구심이 더욱 깊어졌다. 만일 혼족이 아니라면, 어떤 세력이 영족을 이렇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 걸까?
“됐네. 신경 쓰지 말게. 이번 일은 자네와 크게 관련이 없어. 앞으로 조사를 하다보면 하나씩 밝혀지겠지.”
고원은 손을 내저으며 말없이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게.”
* * *
다음 날.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광활한 대지를 환하게 비출 무렵, 고요하던 산속이 다시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이준과 이은은 숙소를 빠져나와 빠르게 산 쪽으로 날아갔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거대한 비행정 몇 대가 우뚝 서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영천, 임혁 등 꽤 익숙한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준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놀란 얼굴로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이준이 5성 투존 이었을 때 8성 투존인 고요한을 쓰러뜨렸는데, 8성 최고급 강자가 된 지금은 얼마나 더 무시무시해 졌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이준은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산봉우리로 고개를 돌렸다. 산봉우리 위에서는 고요한이 바람을 맞으며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고요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고요한의 예의바른 태도에 이준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 날의 패배가 그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 모양이었다.
구우웅!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오자, 하늘에 떠있던 비행정에서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울려 퍼졌다.
“이준.”
이준이 이은과 작별 인사를 하려던 그 때, 누군가가 갑자기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난 것은 바로 약족의 강자인 약성지였다.
“무슨 일 입니까?”
이준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약성지는 못 마땅한 듯 입술을 삐죽였지만, 차마 화를 내지는 못 하고 손가락을 튕겨 비취색 옥조각 하나를 꺼내 이준에게 건넸다.
“용건도 듣지 않고 너무 날카롭게 구는군. 이것은 약족의 족전(族典) 초대장이오. 당신의 스승님은 약족의 족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터이니 그에게 전해주시오.”
이준은 약성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비취색 옥편을 저장반지에 넣은 후 인사를 올렸다.
“고맙습니다.”
“이번 기회에 당신의 연금술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 다음에는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소.”
가볍게 인사를 건넨 약성지는 빠르게 비행정 안으로 들어갔다.
이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옥조각을 저장반지 안에 집어 넣었다. 이 물건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로에게 가져다주면 그가 알아서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이은. 시간이 다 됐어. 이제 가 봐야해.”
이준이 고개를 돌려 이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몸조심해요…….”
이은의 어여쁜 웃음에 이준의 입가에도 아쉬운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으니,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비행선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지는 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져갔다.
구웅!
비행정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올라타자, 커다란 나팔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비행정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먹구름이 되어 고계 출구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 * *
고성 중심에 위치한 호수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쉭!
고요하던 수면이 크게 일렁이더니 거대한 공간 균열이 서서히 생겨났다.
잠시 후, 그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튀어 나와 호숫가에 안착하면서 조용한 도시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준 역시 공간 균열을 빠져 나와 한 건축물 위에 나타났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안면식이 있던 고족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곧바로 고성의 성문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고성을 지키고 있던 고족의 강자들은 이준의 그런 행동을 가만히 지켜볼 뿐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방해 없이 무사히 고성을 빠져나온 이준은 상공에 멈춰선 채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대지를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고계는 끝도 없이 넓었고, 외부세계보다 훨씬 짙은 천지의 에너지가 가득했다. 하지만 중주에 있는 것이 훨씬 더 자유롭고 즐겁다는 것이 이준의 생각이었다.
“이제 바로 성운각으로 돌아가자.”
이준은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방향을 잡은 뒤 무지개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그렇게 쉬지 않고 날아간 덕에 그는 단 5일 만에 성운각 세력 범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성운각의 땅에 진입하기 무섭게 이준은 주변에서 느껴지는 강자의 기운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주요 도시를 거쳐 갈 때는 투존 강자 3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두 번이나 보기도 했다. 이 정도라면 중주 전체에서 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역시 반투성이 된 약로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중주 곳곳의 강자들이 속속 성운각으로 모여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안심이 되었던 건, 경계 태세는 훨씬 더 강화되었지만 대전이 일어날 만큼 긴박한 상황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준은 성운각에 소속된 도시들에도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성운각으로 향했다.
* * *
평화로운 분위기의 성운계는 고계와 비교할 순 없지만, 도시 하나와 비슷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수십만 명을 수용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대한 광장 위에서는 성운각의 제자들이 우렁찬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성운계의 험준한 산맥들 사이에는 새로운 건축물들이 가득 생겨나 있었고, 그 건물들 사이로 개미처럼 수많은 인파가 끊임없이 왕래하고 있었다.
성운계 중심에 있는 거대한 산봉우리에서는 강한 기운이 성운계 전체로 쉴 새 없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휙!
평화로운 성운각의 영역 안에 갑자기 유성 하나가 나타나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운계의 중심에 위치한 주봉(主峰)을 향해 돌진했다.
“누가 감히 함부로 성운계 안을 헤집는 것이냐!”
그 순간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며 십여 명의 노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들이 일제히 염력을 내뿜으며 인을 맺자, 주위의 공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강자는 멈추기는커녕 더욱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노인들의 등 뒤에 나타났다.
“하하, 반년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 경계가 이렇게나 삼엄해지다니. 대단하군요.”
“당신은……?”
눈 깜짝할 새에 자신들의 등 뒤에 나타난 강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에 노인들의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이 정도 수준의 강자는 성운각 내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