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9화. 혼림
하늘 위에 떠있는 시체를 바라보던 모든 고족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짐짓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천상무덤을 빠져 나온 염족의 강자들 역시 경악한 표정으로 혼야와 혼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천상무덤이 아주 위험한 곳이지만 어느 곳은 가도 되고, 어느 곳은 가면 안 되는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야와 혼려가 왜 죽어서 돌아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뭐라 했어?”
화현이 조용히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화유진이 눈썹을 살짝 움찔거리며 말했다.
“저 두 사람은 천상무덤에 들어갈 때부터 이준을 노렸었잖아. 우리가 함께 모이기 전에도 이준, 이은과 붙은 적이 있었고.”
“이준이 저 둘을 죽였다는 거야? 하지만 저 두 사람 실력을 합치면 9성 투존도 못 이겨내는데 이준의 실력으로…….”
“누가 알겠어. 이준과 이은은 보통 녀석들이 아니니까.”
그 때, 또 다시 공간이 갈라지며 고족의 네 젊은 강자가 걸어 나왔다.
“에? 저건 혼야와 혼려잖아?”
공간 균열에서 빠져 나온 네 사람은 혼야와 혼려를 발견하고는 크게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죽은 거야?”
“누가 이 독종들을 죽인 거야?”
잠시 후,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준!”
“이현 선배님 성격에 혼야 같은 녀석들에게 손을 댈 리가 없어……. 이 교활한 놈들이 에너지체에게 당했을 리도 없고…….”
“그럼 이준과 이은뿐이야.”
“하지만 혼야와 혼려는 9성 강자와도 겨룰 수 있는 실력인데…….”
네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공간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이준과 이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이준? 기운이 너무 강한데! 설마…….”
이준과 이은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고청양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꽂혔다.
“이은…….”
통현 장로를 비롯한 고족의 장로들은 이은이 무사한 것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현 시점에서 고족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건 이준이잖아. 이 기운은…….”
곧이어 통현 장로의 시선이 이은의 곁에선 흑발의 청년에게로 향했다.
“3성이나 올리다니……엄청난 속도구나.”
일부 장로들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현의 무덤 때문인가?”
저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생각하던 통현 장로의 머리에 불현 듯 이현이 남겨둔 무덤이 떠올랐다.
“혼야와 혼려의 시체도 모두 빠져나올 줄은 몰랐네.”
이준이 하늘 위를 떠다니고 있던 시체 두 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허허, 이준 군. 2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강해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소.”
그 때, 화현이 화유진과 함께 웃으며 다가와 이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화현씨도 만만치 않은 걸요.”
이준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화현 역시 8성 투존 최고급 강자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준씨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화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2년 전, 이준이 6성 투존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8성 투존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준이 자신보다 더 강해져 있었으니 허탈한 기분을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었다.
“축하한다.”
이준과 화현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고청양을 비롯한 고족의 네 강자들이 다가와 이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 두 녀석은 재수도 없지.”
고청양이 죽은 혼야와 혼려를 흘겨보며 말했다.
“인과응보지요.”
이준의 담담한 태도에 고청양은 혼야와 혼려를 죽인 것이 누구인지를 직감했다.
“하지만 조금 귀찮게 됐어. 혼족 놈들이 여기서 혼야와 혼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니.”
고청양이 나지막한 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순간, 혼야와 혼려의 시체 곁에 두 개의 검은 안개 덩어리가 솟아나더니 검은 옷을 입은 노인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혼야, 혼려!”
혼족의 두 젊은 강자가 죽은 것을 확인한 두 노인은 파랗게 질린 채 버럭 소리를 지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강자들은 두 사람의 눈이 살기로 물드는 것을 발견하고는 괜한 불똥이라도 튈까 슬며시 뒷걸음질을 쳤다.
“후…….”
잠시 후, 두 노인이 서로 눈을 맞추더니 갑자기 이준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혼야와 혼려가 천상무덤에 들어가기 전, 천상무덤 안에서 이준을 죽이려 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은 멀쩡하고 두 사람은 시체로 돌아왔으니, 가장 먼저 이준을 의심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준! 사람을 죽였으니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거라!”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의 소맷자락이 흔들리더니 한기가 가득한 검은색 쇠사슬이 튀어 나와 이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갈색 화염으로 뒤덮인 손으로 검은 쇠사슬을 붙잡았다.
용암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이준의 손이 쇠사슬에 닿는 순간, 자갈색 화염이 쇠사슬을 타고 노인을 향해 빠르게 뻗어나갔다.
“하!”
이준의 반격에 새까만 안개가 독을 품은 용처럼 쇠사슬을 타고 달려들어 자갈색 화염과 강하게 부딪혔다.
쾅!
화염선과 검은 안개가 부딪히기 무섭게 묵직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검은 쇠사슬이 그대로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준은 가볍게 몸을 놀려 쇠사슬이 끊어지며 발생한 충격파에서 벗어났지만, 흑색 옷의 노인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을 쳐댔다.
“영감, 사람이 이렇게 뻔뻔하면 안 되지요.”
이준이 자신의 손에 들린 끊어진 쇠사슬을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혼족 노인은 태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준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듯 끊임없이 식은땀을 흘려댔다. 8성 투존인 자신이 이미 몰락한 이족의 후예에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혼림, 여긴 고계다. 너희 혼계가 아니란 말이다.”
참다못한 통현 장로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허, 통현. 우리 혼족의 젊은 강자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으니 너희들도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혼림이라 불린 노인이 소리쳤다.
“이준. 넌 우리와 함께 혼계로 가야겠다. 네가 혼야와 혼려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우리도 널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혼림과 함께 온 또 다른 노인이 말했다.
“큭큭큭,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이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천상무덤은 원래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혼족의 두 젊은이가 죽은 것은 유감입니다만, 이렇게 증거도 없이 오라버니를 모함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입니까?”
이은이 날카로운 눈으로 두 노인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혼야와 혼려가 오라버니와 우리 고족의 사람들을 해치려 한 것을 따지려 했는데, 감히 우리를 살인범으로 몰다니요?”
이은의 말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노인에게 쏠렸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고족의 강자들이었으니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절대 고울 리가 없었다.
“혼림, 이은이 한 말이 사실인가?”
통현 장로의 표정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이번에 고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장차 고족의 기둥이 될 젊은이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죽이려 했다는 것은 고족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허, 의심을 벗기 위해 당치도 않은 억지를 쓰는군. 오늘 이 고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소. 하지만 이준, 혼야와 혼려의 한을 반드시 갚아줄 것이니 똑똑히 기억하거라!”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하자, 혼림이 은근슬쩍 몸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에게 그런 같잖은 협박이 먹힐 리가 없었다.
“잘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이준의 담담한 한마디에 두 사람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변했지만, 이준 하나도 당해내지 못하는 그들의 실력으로 고계에서 더 이상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기에 그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두 노인이 혼야와 혼려의 시체를 수습해 고계의 출구를 향해 날아가자, 이준은 곧바로 그들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이준은 아라와 천화존자 등이 모두 고계를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그들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떠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성운각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통현 장로가 황급히 이은에게 다가와 물었다.
“은아, 괜찮느냐?”
이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곁에 있던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통현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통현 장로님, 아라가 혹시 어디로 간지 아십니까?”
“자네가 천상무덤에 들어간 지 3개월 정도 됐을 때 이곳을 떠났네. 분명 성운각으로 돌아갔을 게야. 하지만 무슨 일인지는 말하지 않고 자네가 밖으로 나오면 성운각으로 돌아오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네.”
통현 장로의 말에 이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더 이상 고계에 머물 수 없겠어. 같이 갈래?”
이준이 이은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통현 장로가 급히 나서 이은을 말렸다.
“이은. 최근 고족 내에서 큰 일이 있어 널 절대 고계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로 장로회에서 결정을 내렸다.”
“무슨 일이요?”
이은이 미간을 좁히며 되묻자, 통현 장로가 머뭇거리며 이준의 눈치를 살폈다.
“통현 장로님, 무슨 일인지 말씀하세요. 이곳에 외부 사람들은 없으니까요.”
거듭되는 이은의 질문에 통현 장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영계(靈界)가 갑자기 닫혀버렸다.”
“영계가 닫혔다고요? 설마 영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은이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되물었다. 영계는 8대 세력 중 영족(靈族)의 거처였다.
“설마 이번에 천상무덤에 영족 사람들이 안 온 것도…….”
“그건 모르는 일이다. 우리 쪽에서 사람을 보내 알아봤지만 아무런 소식도 접할 수 없었다. 심지어 원래 영계가 있던 이공간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뭔가 엄청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영족이 공간을 봉쇄할 리가 없어요.”
“그건 확실하지 않다. 최근 영족의 힘이 크게 꺾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영족을 그렇게까지 몰아넣을 세력이 어디 있겠느냐. 우리 고족이라 해도 그리 쉽게 영족을 몰락시킬 수는 없다.”
통현 장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 말거라. 장로들이 전력을 다해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만일 영족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우리도 최대한 주의해야한다. 그러니 이은 너도 고계를 떠나선 안 된다.”
그의 말에 이은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8대 세력 중 하나인 영족이 공간을 봉쇄하고 자취를 감추다니, 이는 결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 고계에 있는 게 좋겠다.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
이준 역시 잠시 고민에 빠져 있다가 통현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영족의 힘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8대 세력 중 한축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리 호락호락한 세력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이 공간을 봉쇄하고 몸을 숨길 정도라면, 뭔가 일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이준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자, 통현 장로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준이 끝까지 이은과 함께 가기를 고집한다면 그녀의 성격상 장로회의 결정마저 무시하고 이준을 따라 나설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혼족에서 언제 강자들이 오라버니를 죽이기 위해 손을 쓸지 모르니 항상 조심해야 해요.”
“걱정 마.”
걱정이 가득한 이은의 표정에 이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빙긋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허허, 오늘은 고계에서 하룻밤 묵게. 내일 우리 고족에서 사람들을 보내 자네를 고계 밖으로 내보내 주겠네.”
고계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고족의 강자들이 공간대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때문에 이준 역시 다급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통현 장로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