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8화. 안녕, 천상무덤
“잘됐구나. 내가 직접 식인충의 갑옷을 만들어주마. 너는 우선 다른 일을 처리하거라.”
“다른 일이라니요?”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이현이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혼족의 그 애송이들을 그대로 놔둘 생각인 것이냐?”
“혼야와 혼려 말이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이준의 눈이 살기로 빛났다.
“어떻게 그 녀석들을 잊겠습니까. 그저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죠.”
지금 이준의 실력이라면 천지요괴를 소환하지 않아도 두 사람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천상무덤에서는 누가 어디서 누구에게 죽었는지 알 수 없었으니, 그들을 처리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천상무덤 안에 있는 이상 내 손바닥 안이다.”
이현이 가볍게 손을 젓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새카만 공간 통로 하나가 생겨났다.
“자, 놈들과 백 미터 정도 거리에 공간 통로를 뚫어 놓았다. 나머지 일은 너에게 맡겨도 되겠지?”
대선배의 질문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이은과 함께 공간 통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끝이 보이지 않는 대지 위에는 여전히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광활한 대지 위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생명이 없는 에너지체들 뿐이었다.
바위가 여기저기 박혀있는 산 속에는 은색 갑옷을 입은 그림자가 앉아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적어도 9성 등급 정도 되는 에너지체로 보였다.
9성 에너지체는 잔뜩 긴장한 채 주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주위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수백 년에 걸쳐 다져진 그의 직감이 무언가 위험한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에너지 체가 막 긴장을 푸는 순간, 검은 쇠사슬 두 개가 번개처럼 허공에서 튀어나와 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에너지체를 그대로 휘감았다.
“흥, 한심한 것 같으니.”
갑자기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에너지핵을 저장반지 안에 넣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유달리 창백한 낯빛을 한 사내의 정체는 바로 혼족의 강자, 혼야였다.
“천상무덤 깊은 곳에는 에너지체가 많긴 하지만 너무 위험하니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좋겠어.”
그의 뒤에 서있던 혼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쳇, 곧 천상무덤이 닫히니까 공간의 돌을 준비해둬. 이곳에서 나가는대로 이준 그 자식을 죽여 버려야겠어. 어디 그곳에서도 이족의 선조가 도와줄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다음을 기약할 필요도 없겠는데? 지금 해결하면 되지 않겠나?”
바로 그때, 텅 빈 하늘 위에 공간 통로가 생겨나더니 그 안에서 한쌍의 남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준?”
허공에서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발견한 혼야와 혼려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 앉았다.
“2년 만이네. 상태가 그렇게 좋아보이진 않는데?”
이준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혼야는 잔뜩 겁에 질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의 기운 외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내려 앉았다.
“이준, 죽으려고 제 발로 찾아왔나? 설마 또 이족의 선조가 널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냐?”
“글쎄……. 친히 너희를 에너지체로 만들어주기 위해 왔는데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지.”
“흥, 저 여자와 그 이족의 에너지체만 아니었다면 진작 내 손에 죽었을 놈이…….”
혼려가 살기등등한 눈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마. 저들이 우리 앞에 나타난 걸 보면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야. 우선 물러나는 게 좋겠어.”
하지만 혼야는 혼려와 달리 이준의 당당한 태도에서 까닭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두 사람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렇게 자신들을 찾아왔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혼려는 잠시 머뭇거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 조만간 성운각을 피바다로 만들어주마.”
말을 마친 혼려는 혼야와 함께 두 사람을 노려보며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너희들이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게 아닌데…….”
그 순간, 이준의 몸이 귀신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 죽고 싶구나!”
무언가를 느낀 혼려가 있는 힘껏 주먹을 움켜쥐자, 그의 주먹에서 흉흉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새까만 안개가 퍼져 나왔다.
혼려의 주먹이 허공에 닿기 무섭게 이준이 모습을 드러내 혼려의 주먹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그러자 이준의 손에서 화염이 터져 나와 새까만 안개를 모조리 증발시켰다.
“2년 동안 이것 밖에 성장하지 못했다니, 참으로 실망스럽구나.”
혼려의 손을 붙잡은 이준의 주먹은 단단한 바위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이준의 팔이 번개처럼 혼려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쿵!
“컥!”
이준의 공격을 받은 혼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더니 그의 입에서 새빨간 선혈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은 실이 끊어진 연처럼 멀리 날아가 바닥에 백 미터 정도 되는 깊은 계곡을 만들고 나서야 멈춰 섰다.
“8성 투존?!”
계곡에서 힘겹게 기어 올라온 혼려를 본 혼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외쳤다.
“어떻게 이럴 수가……!”
혼야는 마음 속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2년 동안 그들은 1성도 올리지 못했는데, 상대는 6성 투존에서 자그마치 2성이나 오른 8성 투존이 되어있다니, 어떻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네 차례야.”
눈 깜짝할 새에 기세로 혼려를 처리한 이준이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혼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준과 눈이 마주치자, 혼야는 망설임 없이 족문을 사용했다.
“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날 죽이기엔 아직 부족해!”
족문이 나타나는 순간, 혼야의 기운이 빠르게 치솟으며 영혼들이 내지르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혼려, 걱정 하지 마라! 내가 저 녀석을 죽여 버리겠다!”
혼야가 이를 꽉 문 채 외쳤다. 족문을 개방한 그의 실력은 8성 투존 최고급 강자라 해도 정면으로 맞서기 힘든 수준이었으니, 지금 이준의 실력으로는 자신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게 혼야의 생각이었다.
“이준, 죽음을 받아들여라!”
하지만 이준은 혼야가 족문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할 생각조차 없다는 듯 가만히 팔짱을 낀 채 그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쉭!
“흥, 실력이 조금 늘었다고 건방을 떤 대가다!”
혼야가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리며 죽음을 내지르는 찰나, 이준의 미간에서 자홍색 빛이 반짝이며 기이한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럴 수가!”
그 족문을 발견하는 순간, 혼야은 동공이 빠르게 커지며 섬뜩한 느낌이 그의 온몸을 감싸고돌았다.
“끝났어.”
짤막한 한마디와 함께 이준의 오른손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기운이 터져 나왔다.
쾅-!
곧이어 하늘을 집어삼킬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검은색 그림자가 이준의 반대편으로 화살처럼 튕겨져 나갔다.
이준의 주먹과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순간 혼야의 입에서는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튀어나왔고, 그의 몸이 바닥에 처박히며 바닥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푸흡!”
커다란 구덩이 속에 묻힌 혼야는 끊임없이 피를 토해내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그러나 일어나기는커녕 몸을 바로 세우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제야 혼야는 자신이 상대의 실력을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 깨달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은 뒤였다.
“걱정 마. 앞으로 더 많은 혼족의 강자들이 네 뒤를 따라갈 테니까.”
곧이어 검은 어둠이 혼야의 눈앞을 천천히 뒤덮으며 서늘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 * *
조용한 대전 안, 공기가 살짝 요동치더니 혼야와 혼려를 처리한 이준, 이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혼야와 혼려를 죽인 후 무덤 밖에서 며칠 동안 돌아다니다 이제 막 대전 안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돌아왔느냐.”
잠시 후, 이현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결과도 물어보지 않고 빙긋 웃으며 손 위에 검은 광단 하나를 소환해 이준에게 던져주었다.
“가져가거라. 그것이 바로 식인충의 갑옷이다. 그걸 흡수하면 평범한 옷처럼 변하게 될 것이다. 단, 지속적으로 염력을 주입해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있으니 잊지 말거라.”
이준은 신기한 눈빛으로 손을 뻗어 검은 광단을 받아들었다.
“그 안에 피를 넣으면 바로 흡수될 것이다.”
이현의 말에 따라 검은 광단에 피를 떨어뜨리자, 검은 광단이 부르르 떨리며 액체처럼 이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곧이어 기이한 에너지가 피부를 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을 집중하자, 검은 빛이 피부 밑으로 흡수되며 검은색 옷으로 변화했다.
“이게 바로 식인충의 갑옷인가? 신기하군.”
손으로 검은 옷을 천천히 만져보니 비단같은 부드러움과 강철 같은 단단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허허, 이 식인충의 갑옷은 상고 시대의 강자들에게는 필수품이나 다름이 없었지. 특히 여왕벌레로 만든 갑옷은 1격 무투기보다도 귀한 보물 취급을 받았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식인충의 갑옷은 지속적으로 염력을 주입해줘야 하지만, 이미 준1격 수련법을 가진 이준에게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제 천상무덤을 떠날 때가 왔구나.”
계속해서 식인충의 갑옷을 관찰하고 있는 이준을 바라보던 이현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이족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정말 다시 천상무덤에 돌아올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
“걱정 마세요! 반드시 투성이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굳은 결의가 느껴지는 이준의 표정에 이현은 만족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이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시간이 다 됐어요.”
그녀의 말에 이준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현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가거라. 이족의 미래는 너에게 달렸다.”
그 때, 갑자기 텅 빈 허공에서 무시무시한 흡입력이 터져 나오며 이준의 몸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조상님, 몸조심 하십시오! 반드시 구하러 오겠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힘은 순식간에 두 사람을 이현의 앞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홀로 남겨진 이현은 말없이 두 사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선조들이여. 저 아이를 지켜주소서.”
* * *
우거진 산속 허공에 여러 사람이 나타나 일그러지고 있는 공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통현 장로님. 오늘이 바로 3년이 되는 날이지요?”
하늘 어딘가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회갈색 의복을 입은 통현 장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지.”
통현 장로는 일그러진 공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위험한 천상무덤 안에서 고족의 젊은 강자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정말 손실이 크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이번엔 누가 가장 큰 성장을 했을지 궁금하군요.”
옆에 있던 고족 장로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각자의 운을 봐야지.”
“…….”
쉭!
고족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때, 허공 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나더니 몇 몇 사람들이 빠르게 그 안을 빠져나왔다.
“뇌족 사람들이군. 제법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야.”
먼저 모습을 드러낸 뇌족을 본 사람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기운은 반년 전보다 훨씬 강해져있었다.
“약족 사람들도 나왔고, 염족도…….”
뒤이어 여러 사람들이 속속 그 안을 빠져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상무덤에 들어갈 때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특히 석족의 한 강자는 7성 투존에서 8성이 되어 돌아와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쉭!
또 다시 공간에 균열이 생기더니 두 사람이 그 안에서 튕겨져 나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고족 장로들이 황급히 그 두 사람을 부축했지만, 그들은 이미 완전히 생기를 잃은 상태였다.
“혼족의 혼야와 혼려군. 두 사람 모두 천상무덤 안에서 목숨을 잃었어.”
통현 장로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