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7화. 족문 활성화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준이 폭삭 늙어버린 이현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이족의 마지막 피를 보존하기 위한 일념 하나로 무수한 세월을 이곳에서 홀로 살아왔다니, 절로 머리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는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이현은 환하게 웃으며 이준을 부축했다.
“이족에게 희망이 생겼구나.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어……. 하지만 네가 정말로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네 여자친구다. 저 아이가 없었다면 피의 힘을 융합하지 못했을 게다.”
이준이 환히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이은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네 심장에는 새로운 피의 힘이 심어졌으니, 그 힘을 잘 지키고 키워나가거라. 언젠가 그 피가 너를 투제로 만들어 줄 것이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가슴팍을 문질렀다. 가만히 정신을 집중해보니 심장이 뛸 때마다 체내의 염력이 크게 일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혼족을 조심하거라. 이족의 힘이 가장 왕성할 시기에는 고족마저 이족의 힘을 따라오지 못했다. 하지만 혼족은 언제나 기이한 방식으로 힘을 키워왔으니, 지금은 고족보다 더 강해졌을지도 모른다.”
이현의 말에 이준과 이은의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혼족의 실력이 어떤지는 이은도 잘 모르지만, 아직까지 고족이 혼족에게 패배한 적이 없었기에 이현이 한 말을 받아들이기가 조금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고족은 8대 세력 중 가장 안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다. 반대로 혼족은 가장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세력이니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말을 마친 이현의 얼굴에 아쉬움과 기쁨이 뒤섞인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쨌든 투성이 되기 전에는 최대한 조심하거라. 혼족 놈들은 반드시 네 손에 있는 태령황제의 옥을 노릴 것이다.”
이현의 말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상무덤에 들어온지도 벌써 2년이 지났구나. 아직 1년 정도 남아있으니 이곳에서 수련을 하며 폭등한 힘에 적응하거라.”
이현은 이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화염 문양이 그려진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것이 진정한 천계의 불꽃의 수련법이다. 이곳에 들어있는 마지막 단계를 성공적으로 수련한다면 족문의 힘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준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현이 꺼내든 두루마리를 바라보았다.
“선배님도 이 천계의 불꽃을 만들었던 그 때 천지의 불꽃을 갖고 계셨나요?”
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 나도 세 개의 천지의 불꽃을 갖고 있었지만, 그 힘을 모두 사용했음에도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이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세 개의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는 투성 최고급 강자가 패배하다니……. 혼족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다만 의문인 것은 ‘불개’와 같은 수련법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그가 어떻게 세 개나 되는 천지의 불꽃을 다룰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허허, 네가 익힌 염력 수련법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더구나. 천지의 불꽃을 통해 힘을 얻다니……. 아주 흥미로워.”
이현은 이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나는 오직 내 실력만으로 천지의 불꽃을 조종했다.”
이어지는 이현의 말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염력 수련법의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3개나 되는 천지의 불꽃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니, 실로 공포스러운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네 염력 수련법은 천계의 불꽃과 궁합이 아주 잘 맞는 것 같더구나. 어쩌면 그 수련법과 천계의 불꽃이 만나면 내 전성기보다 더 강한 비술이 탄생할지도 모르겠어.”
이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찌됐든, 완전한 천계의 불꽃도 손에 얻었으니 잘 연구해 보거라. 천상무덤을 떠나기 전에 족문을 완벽히 다룰 수 있도록 하면 더욱 좋고.”
이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이은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는 자리에 앉아 두루마리 안으로 영혼의 힘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대량의 정보가 빠르게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한참이 지난 후, 이준이 어두워진 얼굴로 천천히 눈을 떴다.
“천계의 불꽃, 제 1장! 제 2장! 제 3장!”
그 순간, 이준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더니 단 몇 초 만에 천계의 불꽃이 발동되면서 기운이 급속도로 치솟았다.
뜨거운 염력이 빠르게 회전하자 혈관 속을 흐르던 피에서 기이한 힘들이 솟구치더니 빠르게 미간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이준의 미간에서 밝은 빛이 반짝이더니 잠시 신비한 문양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준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떴다. 왜 실패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족의 족문은 총 9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는 아직 3획까지 밖에 그리지 못하는구나.”
옆에 있던 이현이 설명했다.
“천계의 불꽃의 마지막 단계는 족문을 그리는 것이다. 족문은 늘 네 몸속에 잠들어 있지만, 그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염력과 바늘에 실을 꿰는 듯한 정교한 염력 통제가 필요하다.”
“3획을 그리는 데만 이렇게 염력 소모가 큰데 전투 중에 정말로 족문을 발동시킬 수 있을까요?”
이준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한 번만 제대로 활성화시키고 나면 그렇게 염력을 소모할 일은 없어진다. 그냥 생각하나로 족문을 시전할 수 있게 되지. 족문을 활성화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첫걸음이다.”
이현이 격려하듯 이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됐다. 계속 하거라. 첫 시도에 3획을 그었다는 것은 꽤 괜찮은 성과다. 정신을 집중해 염력을 완벽하게 제어하다보면 9획까지 모두 그려낼 수 있을 게다.”
“후…….”
깊은숨을 들이마신 이준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족문 수련에 집중했다.
“천계의 불꽃!”
* * *
족문의 수련은 이준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고된 과정이었다.
선조들이 족문을 그대로 물려주는 고족 같은 세력과는 달리 이족의 힘이 왜 그렇게 전수되기 어려웠는지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천상무덤 안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있었고, 이준은 그 안에 반드시 족문을 완성할 자신이 있었다.
그 후로 이준은 하루도 쉬지 않고 수련에 매진했고, 수련이 막힐 때마다 투성 최고급 강자인 이현이 직접 나서서 그를 지도했다.
그렇게 반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 * *
옛 기운이 물씬 풍기는 대전 안에서는 이준이 눈을 감은 채 족문의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의 미간에는 자홍색으로 된 기이한 무늬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 그의 족문은 모두 8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준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년 안에 여덟 번째 획이 나왔다는 건 이족 내에서도 상당히 훌륭한 성과였다. 게다가 이준은 실력이 폭등하자마자 수련에 들어갔으니, 실로 뛰어난 재능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안심하고 이족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이준의 미간에서 자홍색 무늬 하나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9번째 획을 그리려는 건가?”
놀란 이현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는 순간, 이준의 미간에 생겨난 마지막 한획이 뚜렷한 궤적을 남기며 부드럽게 이어졌다.
우웅-
그 순간, 이준의 몸속을 흐르던 피가 더욱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하면서 기이한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성공했어!”
이현이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후…….”
족문이 완성되자, 이준의 눈에서 신비한 자홍색 빛이 쏟아져 나왔다.
곧이어 완성됐던 족문이 흐려지며 이준의 미간 속으로 흡수되었다. 드디어 족문이 완성된 것이다. 이제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더라도 완벽한 천계의 불꽃을 사용할 수 있었다.
“3년도 이제 다 찼겠네.”
족문을 완성한 이준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5일 후면 딱 3년째예요. 천상무덤에서의 생활도 이제 끝이네요.”
생각에 잠겨있는 이준을 바라보던 이은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눈 깜빡할 새에 지나가버릴 거라곤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외부세계에선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3년 동안 8성 최고급 투존이 된 데다가 이족의 족문까지 얻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다.
“허허, 벌써 돌아갈 시간이 왔구나.”
이현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선 숨길 수 없는 외로움이 묻어났다.
“조상님……앞으로 이렇게 계속 살아가시는 겁니까?”
이준의 조심스런 물음에 이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로워도 이곳에서 쭉 살아가야지 별 수 있겠느냐.”
3년만으로도 지겨운데 수백, 수천 년을 이곳에서 홀로 견뎌왔다니……. 이족을 위한 그의 마음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가슴 속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상님이 다시 부활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허허, 네가 연금술사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고급 연금비약은 죽은 사람의 생기를 회복시킬 수 있지만 난 이미 죽은 지 오래됐고 영혼마저 불완전한 상태라 다시 살아나기는 어려울 듯하구나.”
이준이 자신을 걱정하는 듯하자, 이현은 오히려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 마음이 쓰인다면 하루라도 빨리 투제가 되거라. 그럼 날 풀어줄 방법이 생각날지도 모르지. 게다가 내가 외로움을 견디며 이곳에서 살아갔던 이유는 부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족의 피를 물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대로 사라져도 아쉬움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떠나거라.”
이준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집어삼켰다.
“걱정 마세요. 저는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반드시 투성이 되어 이곳에 돌아오겠습니다.”
이준이 낮은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이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강한 결의에 이현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이준의 저장반지가 흔들리더니, 손바닥만 한 광단이 두 사람 앞에 둥실둥실 떠올랐다.
“이건……?”
그 광단 안에는 기이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주먹만 한 번데기가 들어 있었다.
“이건 고대식인벌레의 여왕벌레군. 여왕벌레는 반투성과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수면기 상태다. 그렇지 않았다면 에너지 벽에서 그렇게 쉽게 빼낼 수 없었을 게다.”
이현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반투성 계급의 여왕벌레라고요?”
그의 말에 이준은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이 벌레의 정체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것인지 알았다면 절대로 저장반지에 넣어두지 않았을 것이다.
“저희가 수정벽을 빠져나올 때 고대 식인벌레들이 난리를 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요.”
이은이 신기한 듯 번데기를 바라보며 웃었다.
“만약 이 여왕벌레가 깨어났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네 몸에 붙어 염력을 모두 빨아먹었을 것이다. 일단 몸에 숨은 여왕벌레는 투성 강자가 아닌 이상 찾아낼 수 조차 없지.”
이현의 설명에 이준과 이은의 등에서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선배님의 눈이 예리해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여왕벌레에게 죽고 말았겠어요.”
“하하, 하지만 이 녀석은 식인충의 갑옷을 만드는데 최고의 재료지.”
이현이 껄껄 웃으며 설명했다.
“식인충의 갑옷은 아주 특수한 방어 무투기다. 제련을 통해 갑옷과 같은 모양으로 바꾸어 몸을 지킬 수 있지. 그리고 그 방어력은 반투성 강자의 공격도 거뜬히 막아낼 정도다.”
“예?”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물건이 반투성 강자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니,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용황 갑옷이 있는 이준에게 식인충의 갑옷이 더해진다면 투성 강자와의 싸움에서도 목숨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