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화. 1년 반
“그럼 어쩌죠?”
이은이 사색이 된 얼굴로 질문을 던지자, 이현이 조금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와 저 아이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지 말씀하세요.”
이은의 대답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고족의 피가 필요할 것 같구나. 너는 신급 혈통을 가진 아이이니, 네 피가 이족의 피와 용황의 피를 억눌러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순간 이은의 시선이 연못에 앉아있는 이준을 향했다. 그의 죽음을 막을 수만 있다면 고족의 신급 혈통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것이 이은의 마음이었다.
“성공 가능성은 얼마나 되죠?”
“7할에서 8할 정도.”
그의 대답에 이은은 또 다시 고민조차 해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선배님만 믿겠습니다.”
“이준과 이족을 대신해 먼저 감사 인사를 올리겠네.”
이현이 진지한 얼굴로 이은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바로 시작해 주세요.”
말을 마친 이은은 빠르게 손으로 기이한 인결을 맺은 뒤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흘러나온 피를 피 연못 속으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피 연못이 잠시 잔잔해졌다가 그녀의 피가 떨어진 곳 주위에 널따란 공간이 생겨났다.
곧이어 이은의 피가 한 곳으로 모여 주먹보다 작은 혈구(血球)가 되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현 선배님. 이것이 제가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입니다. 더 빼내게 된다면 제 혈통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고족의 장로들이 오라버니를 죽일지도 몰라요.”
이은이 황급히 손목을 지혈하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충분하다. 고맙구나.”
이현은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이은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번개처럼 손을 휘저어 인을 맺기 시작했다.
“이제 앞으로의 일은 나에게 맡기고 넌 먼저 쉬고 있거라. 저 아이를 이곳에 올 때보다 훨씬 강하게 만들어 돌려줄 테니 걱정 말고.”
이현이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음을 지은 후 후 인결을 그리며 외쳤다.
“합!”
그 순간 피 연못이 빠르게 회전하며 ‘쏴아’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붉은 물은 단 한 방울도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이준을 중심으로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솟구쳤다.
핏빛 물의 회전이 격렬해질수록 이준의 몸에서 퍼져 나오던 자금색 빛이 강한 압력을 받은 것처럼 점점 더 어두워졌다.
휙!
곧이어 이은의 혈구가 갑자기 피 연못 안으로 뛰어들더니 자금색 섬광을 뚫고 엄청난 속도로 이준의 몸속으로 흡수됐다.
고족의 피를 흡수한 이준의 몸이 격하게 뒤흔들리며 모공 사이로 피가 새어나와 온몸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현이 긴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인결을 바꾸자 빠르게 소용돌이치던 붉은 핏물이 끊임없이 이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피가 이준의 몸속을 헤집으며 그를 완전히 소멸시키려는 것처럼 갉아먹기 시작했다.
크릉!
그 때, 이준 몸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용황의 피에서 소름 돋는 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황의 피가 서로를 갉아먹고 있는 두 개의 투제의 피에게 그대로 달려들며 세 개의 피가 한 곳에 모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현의 힘에 의해 서로 죽을힘을 다해 싸우던 세 개의 피가 차츰 균형을 찾으며 융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정확히 31일 째 되는 날, 서로 어지럽게 뒤엉켜 있던 세 개의 피가 회전을 멈추더니 자홍빛의 신비한 혈액이 이준의 몸속을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몸에 흐르는 것은 두 투제의 피와 용황의 피가 융합되어 생긴 새로운 피의 힘이었다.
자홍색 액체가 원 안에서 서서히 흘러나와 뭉쳐지더니 엄지손가락만 한 마름모꼴 결정체로 변해 이준의 심장으로 향했다.
그 순간, 이준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거의 멈춰있던 심장이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펑!
자홍색 결정체가 완전히 심장 안으로 흡수되자, 피 연못이 폭발을 일으키며 사방에 자욱하게 피안개가 끼었다.
하지만 이은과 가까워지자 피 안개는 저절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이은은 그 쪽으로는 눈조차 돌리지 않고 이준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후…….”
환한 얼굴로 긴 숨을 내쉰 이현이 손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성공했어!”
“이현 선배님!”
이은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몸을 일으켜 이현에게로 다가갔다.
“성공이다. 세 개의 피가 모두 무사히 융합되었어.”
이현에게 확답을 듣는 순간 한 달 내내 굳어있던 이은의 얼굴에도 마침내 미소가 피어 올랐다.
이현 역시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식은 땀을 닦아냈다. 이족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자신의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면 또 한 번 이족을 몰락으로 이끈 장본인이 되는 것이었으니 그 역시 이준을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족의 피와 용황의 피가 많지 않아 피의 힘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이 피를 모두 심장 깊은 곳에 모아두었다. 이제 이 새로운 피의 힘이 혈관을 타고 흐르기를 기다려야 해. 이후 투성이 되어 천 년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투제가 될 수 있는지는……. 모두 이 아이에게 달려있다.”
이어지는 이현의 말에 이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씨앗은 심어졌으니 앞으로 이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큰 나무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씨앗이 나무가 되는 순간, 정말로 전설속의 투제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를 일 이었다.
“이제 내가 남겨둔 에너지가 이준에게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기다려야겠구나. 오래 걸릴테니 그 동안 마음 편히 수련을 하고 있거라.”
피 연못 안에서는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짙은 에너지가 이준의 몸속으로 계속해서 스며들고 있었다. 이현의 에너지가 이준의 몸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네.”
이은이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눈을 감고 수련 상태에 들어가자, 이현은 흡족한 듯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자신의 힘을 이어받을 후예를 바라봤다.
앞으로 모든 것은 이준 스스로에게 달려 있었다.
* * *
그렇게 또 다시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이은은 대부분의 시간을 가만히 앉아 수련을 하며 보냈다.
이곳은 천상무덤에서도 에너지가 가장 짙은 곳이기 때문에 1년 전 이준에게 줬던 피의 힘을 모두 회복한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기운 역시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지난 1년간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가만히 앉아 수련을 하다가 가끔씩 눈을 떠 피 연못에 담긴 이현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는 이준을 바라보는 일 뿐이었다.
한편, 이현은 일 년 동안 피 연못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점점 투명하게 변하고 있는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못이 맑아질수록 그의 표정도 함께 밝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6개월 정도가 지나자, 붉게 물들었던 피 연못이 다시 이준과 이은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봤던 맑은 모습을 되찾았다.
마지막 핏물이 이준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이현과 이은은 무언가 느낀 것처럼 동시에 눈을 뜨고 연못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이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준은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몸 속에는 곧 터질 화산처럼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가득 흘러나오고 있었다.
쾅!
그렇게 30분이 지나자, 물소리도 나지 않던 연못에서 돌연 굉음이 터져 나오며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기운이 폭등하기 시작했어.”
쾅!
이현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준의 기운이 미친 듯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6성 최고급, 7성, 7성 최고급, 8성…….”
이현과 이은은 파죽지세로 폭등하는 이준의 기운을 느끼곤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집어삼켰다.
“9성…….”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준은 6성에서 9성까지 뛰어올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힘이 아직도 끝을 모르고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곧 9성 최고급이 되겠어요.”
하지만 이은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운이 가득했다.
여기서 성장을 멈춘다면 투성이 되는데까지 몇 년이나 되는 시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현과 이은이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이준의 기운이 점점 투존 최고급 단계에 가까워졌다.
“이대로 가다간 투존에서 완전히 멈춰버리고 말 거예요.”
이은이 근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현의 표정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이준, 넌 이족의 마지막 희망이다. 제발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
이현과 이은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한시도 이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준. 절대 이성을 잃지 말거라.”
이현이 주먹을 세게 쥐며 초조한 듯 중얼거렸다.
쿵!
바로 그 때, 이준의 몸속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의 얼굴이 점점 자홍빛으로 물들며 폭등하던 기운이 빠르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휴…….”
이현과 이은은 그제야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이준의 기운이 빠르게 약해지더니 단 몇 분 만에 9성 최고급 단계에서 6성까지 내려왔다.
‘아주 독하게 참아냈구나. 하지만 다시 반등할 수도 있겠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던 이현은 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자신의 후예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를 조심스레 지켜봤다.
그와 동시에 6성까지 억누른 기운이 다시 반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느린 속도로 염력이 상승하고 있었다.
6성 최고급……7성……7성 최고급……8성……9성…….
기운은 서서히 급등하다가 9성에서 다시 멈춰 섰다.
이번에도 이준의 얼굴색이 바뀌더니 또 다시 강제로 기운을 억눌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7성 최고급에서 더 이상 누를 수 없었다.
“에너지가 너무 짙어서 다시 반등할 텐데…….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일 게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이준의 기운을 느낀 이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지 않을 수 없었다. 욕심을 부려 한 번에 실력을 올리려 했다가는 기초가 부실해져 다시는 투성에 오르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준은 놀라울 정도의 인내력으로 폭발하는 기운을 억누르고 있었다. 덕분에 이제는 단번에 투성의 벽을 넘지 못한다 하더라도 평생 투성이 되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만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글보글-.
깨끗한 연못에서 기포가 끊임없이 끓어오르고, 이준의 기운이 잠시 멈춰 있다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5분 만에 7성을 넘어 8성 최고급 단계에 도달해서야 완전히 멈춰 섰다.
“8성 최고급…….”
이현과 이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단계 높아진 정도라면 부작용 없이 안정적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운이 완전히 안정을 되찾자, 1년 반 동안 굳게 감겨있던 이준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리며 다시 떠졌다.
쉭!
탁한 공기가 이준의 목구멍을 타고 천천히 밖으로 퍼져 나왔다.
몸속 구석구석 충만하게 차오르는 염력에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한 느낌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크르릉!
대전 안에는 번개 같은 포효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하하하!”
이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연못을 빠져 나오자, 그의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전각 전체를 휘감았다.
연못을 나온 이준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자신의 힘을 확인해 보았다.
가볍게 주먹을 쥐었을 뿐인데, 공간이 일그러지며 새까만 균열이 허공 위에 번져나갔다.
이 정도 힘이라면 고요한을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무투기 하나 없이 20합 이내에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