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화. 환혈(換血)
눈앞을 가득 채운 빛이 서서히 사라지자, 이준과 이은은 조심스럽게 눈을 떠 앞을 살폈다.
그들의 앞에는 어느새 거대한 전각 하나가 나타나 있었다.
그 소박해보이던 석비 속에 이런 곳이 숨겨져 있다니, 역시 투성 강자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전각의 문 앞에는 이현이 뒷짐을 진 채 서있었다. 그의 앞에는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아름다운 연꽃이 은은한 향기를 내뿜으며 떠다니고 있었다.
“요즘 이족의 상황이 어떤지 말해줄 수 있느냐?”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이현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현재 이씨 가문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족은 이미 사라지고 남은 건 몰락한 이씨 가문뿐입니다.”
말을 마친 이준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이씨 가문이 그 동안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이준의 말을 모두 들은 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 희망의 불씨가 남아있는 것 같구나. 내 생각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아.”
이현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안도시키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로 모든게 괜찮아 질 것만 같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느냐?”
이현이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상님은 아직 살아계신 겁니까?”
이준이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만약 이현을 부활시킬 수만 있다면, 이족이 다시 8대 세력의 자리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준의 질문에 이현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나의 남아있는 영혼일 뿐이다. 내가 죽을 때 나를 천상무덤에 데려가 달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하고 네가 오기까지 기다릴 수 있던 것이지. 하지만 천상무덤을 벗어나는 순간 나의 존재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그의 말에 이준의 눈에 실망스러운 빛이 스쳤다.
“지금 이씨 가문은 처참하게 몰락했습니다. 피의 힘도 잃어 다른 세력에 맞설 힘조차 없습니다. 저를 제외하면 투존은커녕 투종조차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도 이족은 이미 투제의 피 속에 담긴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현이 다시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투제의 피를 보충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투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건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그 때 나는 너무 자만해 투제가 되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수많은 장로들과 상의한 뒤 결사의 각오로 출진했지.”
말을 이어가는 이현의 목소리에서는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패배하고 말았고, 이족은 몰락의 길을 걸었지.”
이현의 한숨 소리를 듣던 이준이 조용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게 마지막 방법이었죠. 피의 힘이 고갈이 되었어도 이족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을 거예요. 그런 일로 선배님을 탓하지는 않습니다.”
잠시 후, 이준이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며 이상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피의 힘이 고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저에게서 족문이 나타나는 거죠?”
“이족의 족문은 누군가 부여해주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 연마해 새기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이현이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서 천계의 불꽃의 힘을 느꼈다. 사실 그 비술은 바로 내가 만든 것이거든. 하지만 네가 그 무투기를 얻었을 줄은 몰랐다. 불의 협곡에 넘겨준 비술을 내 후손이 배우게 되다니……. 역시 인연이라는 것은 모르는 게다.”
이준의 머릿속에 순간 불의 협곡에서 천계의 불꽃을 전수받을 때 봤던 그 이름이 떠올랐다.
‘이현……? 그 곳에 쓰여 있던 이현이 이씨 가문의 선조였다니!’
“물론 네가 수련한 천계의 불꽃은 마지막 단계가 빠져있다. 그 마지막 단계가 빠졌기 때문에 줄곧 족문을 연마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현이 빙긋 웃으며 설명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하. 걱정 말거라. 혼자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남겨둔 것을 모두 너에게 넘겨주마. 이 천계의 불꽃 마지막 단계는 당연히 너에게 줘야하지 않겠느냐.”
반짝 반짝 눈을 빛내는 이준의 모습을 보며 이현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져 나갔다.
“하지만 족문을 수련해도 피의 힘이 없다면 실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지 않나요……”
“당연히 피의 힘이 있어야 족문이라 부를 수 있지 않겠느냐.”
이현은 급격히 어두워진 이준의 눈빛을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연못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연못이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새빨간 빛이 이현의 몸에서 퍼져 나와 연못 전체로 퍼져 나갔다.
곧이어 맑고 깨끗하던 물이 점점 피의 못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현의 머리카락이 새하얘지더니 빠른 속도로 얼굴에 주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치 그 동안 멈춰있던 그의 시계가 한 번이 움직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당황한 이준이 무언가 말하려 하자, 물속에 있던 이현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때 내가 온힘을 다해 투제의 피를 몸속에 봉인해두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한낱 영혼일 뿐이야. 이 천상무덤 안에서만 살 수 있기 때문에 이족을 다시 부흥시킬 방법이 없다. 그러나 너라면 이족을 다시 부흥시킬 수 있겠지.”
빠른 속도로 늙어가는 이현의 모습에 이준은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피의 힘 안에는 내가 생전에 봉인해두었던 에너지가 들어있다. 나의 후손아, 내가 지키지 못한 이족과의 약속을 네가 이뤄줬으면 좋겠구나!”
붉게 물든 연못에서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무시무시한 힘이 퍼져 나왔다.
그 순간, 연못 옆에 서있던 이준의 피가 빠르게 들끓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이족의 피의 힘인가…….”
온몸에서 솟아오르는 신비한 힘을 느낀 이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피의 못에 들어가 이족의 마지막 피의 힘을 물려받거라.”
그 사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버린 이현이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준은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연못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이족의 위대한 선조가 맡긴 모든 것을 자신이 계승받게 되는 것이다.
“오라버니, 조심해요…….”
이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새빨갛게 변한연못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핏물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붉은 에너지가 바늘처럼 이준의 몸을 찌르기 시작했다.
“쓰읍…….”
극심한 고통에 이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먼저 네 몸속에 있는 평범한 피를 모두 씻어내야만 피의 힘이 들어있는 액체를 주입시킬 수 있기 때문에 처음엔 꽤 아플 게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단계, 환혈(換血)이다.”
“예.”
이준은 이를 꽉 물고 살갗이 모두 찢기는 듯한 통증을 견뎌냈다. 그와 동시에 몸 속에 있던 피가 빠르게 사라지면서 온몸에 힘이 빠지더니 눈꺼풀마저 축 처지기 시작했다.
“잠들면 안 된다. 원래 있던 피가 깨끗하게 제거되어야만 피의 힘을 최고조로 발휘할 수 있다.”
이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 온몸에 이준은 이를 악물고 눈을 치켜뜨며 고통을 견뎌냈다.
“에휴. 특별한 시기인 만큼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잠시 후, 이현이 한숨을 내쉬며 연못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환혈을 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 * *
숨이 막힐 듯한 적막 속에서 시간은 물 흐르듯 빠르게 흘러 눈 깜짝할 새에 열흘이 지났다.
그 열흘간 모든 피를 쏟아낸 이준의 몸은 바짝 말라버린 고목마냥 앙상하게 변해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열흘 내내 지켜보던 이은은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기분이었다.
이현은 이은에 비해 비교적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환혈을 하게 되면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져 갑자기 광인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쿵-.
두 사람이 이준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다시 열흘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조용하던 연못에서 기포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환혈에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투제의 피가 몸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이현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큰 숨을 내쉬며 인결을 맺자, 섬뜩한 핏빛 광선이 피로 물든 연못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 연못이 더욱 거세게 끓어오르며 핏빛 액체가 이준의 몸을 타고 올라가 모공 사이로 빠르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몸 안에 다시 혈액이 돌아오자 이준의 창백했던 피부가 빠른 속도로 혈색을 되찾고, 버석하게 말라버린 피부에도 다시 생기가 돌았다.
“이현 선배님. 이 피연못 안에 선배님이 봉인해둔 에너지도 있는 건가요? 만약 그 에너지가 모두 오라버니 몸속에 흡수되면 실력도 크게 늘겠죠?”
호전되는 이준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은이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렇지. 하하,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 하지만 외부의 힘으로 실력을 올리게 된다면 통제하기가 어려워 투성으로 진급하는데 아주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이 아이도 아주 잘 알고 있을 테니 가장 현명한 방법을 택할 게다. 저 녀석을 믿어보자꾸나.”
이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이 남긴 에너지는 너무나도 방대해 그것을 한 번에 흡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억지로 흡수한다면 단번에 투존 최고급 강자가 될 수 있었지만, 대신 투성이 될 확률은 극히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환혈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게야.”
말을 마친 이현이 웃으며 천천히 눈을 감자, 옆에 있던 이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수련 상태에 들어갔다.
* * *
오래된 대전 안에는 기포가 부글부글 끓어오는 소리만이 하염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또 다시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이준은 이미 예전처럼 활력이 넘치는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고, 그의 피부에선 무수한 실핏줄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기포 소리가 멈추더니 낮은 폭발음이 울려 퍼지면서 핏빛 안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곧이어 자금색의 섬광이 이준의 몸에서 퍼져 나오며 붉은 빛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이은과 이현은 수련을 멈추고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게 뭐예요?”
이은이 자금색 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광경에 이현 역시 한참동안이나 답을 하지 못하다가 불현 듯 무언가를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용황의 피? 어떻게 이 아이의 몸에 용황의 힘이 깃들어 있는 거지?”
“용황의 피요? 그게 뭐죠?”
이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용황은 투기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의 숫자 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고족의 일원인 이은조차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용황은 전설의 용과 고대 하늘 봉황의 피가 섞인 신비한 생물로, 모든 마수들의 정점에 선 존재다. 하지만 나도 직접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 아이의 몸에 용황의 힘이 깃들어 있는거지…….”
“전설의 용과 고대하늘봉황의 피가 섞인 생물이라고요?”
이현의 말에 이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그래…….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용황의 피가 몸 속에서 깨끗하게 제거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상태로 이족의 피가 몸 속으로 들어가면 두 힘이 충돌을 일으켜 폭발할지도 몰라.”
이준을 바라보는 이현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용황의 피는 투제의 피와 맞먹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 힘이 충돌을 일으킨다면 이대로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