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화. 3층
그렇게 20분 가까이 벽을 뚫고 나아갔을 때, 이준이 돌연 걸음을 멈춰서며 어두운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에너지 핵을 다 썼어요.”
그의 말에 뒤에 있던 사람들의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바로 그때, 고청양이 이를 악물고 에너지 핵 하나를 꺼내 이준에게 건네며 말했다.
“9성 에너지 핵이다. 이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에너지 핵이야.”
“모자라요.”
이준이 한 손으로 고청양이 건넨 마지막 에너지 핵을 흡수하며 말했다.
9성 에너지 핵에 담긴 에너지는 그 양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두터운 벽을 뚫고 지나가는데 필요한 염력을 채울 수는 없었다.
“저도 하나 있습니다.”
화현 역시 잠시 머뭇거리다 9성 에너지 핵을 꺼냈다.
“3개만 더 주십시오!”
이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말에 좁은 통로 안에 잠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 귀중한 9성 에너지 핵을 다섯 개나 필요로 하다니. 혹시 이준이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준의 염력이 줄어드는 속도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절대 더 많은 에너지 핵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휴, 에너지 핵을 많이 가지고 있어봤자 여기서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
뇌족(雷族)의 남자가 마지막 남은 에너지 핵을 꺼내 이준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그럼 부탁 좀 하겠습니다.”
석족의 두 사내도 서로를 바라보다 아쉬운 표정으로 에너지 핵을 꺼내 이준에게 넘겨주었다.
고족과 뇌족, 석족의 강자들이 모두 9성 에너지 핵을 이준에게 넘겨주자, 사람들의 시선이 이내 혼야와 혼려에게로 향했다.
모든 사람들이 보물을 내놓았는데 왜 너희들만 내놓지 않느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결국 혼야와 혼려는 그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품 안에 몰래 숨겨두었던 9성 에너지 핵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준에게 그 귀한 보물을 넘겨주려니 속이 쓰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9성 에너지 핵 다섯 개를 모두 손에 넣은 이준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자갈색 화룡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화염을 토해내며 겹겹이 쌓인 수정벽을 순식간에 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10분 정도 벽을 뚫고 나아갔을 무렵, 화룡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던 화염이 점점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곧 빠져나갈 거예요!”
점점 어두워지는 불의 용을 본 이준이 비취색 수정벽을 바라보며 힘차게 외쳤다. 눈앞에 놓인 벽에는 아직도 고대 식인벌레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지만, 이제 몇 미터만 더 뚫고 지나간다면 천상무덤의 3층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이건?”
하지만 불의 용이 마지막 힘을 다해 비취색 수정벽을 들이받으려던 그때, 이준의 시선이 수정벽의 중심 지점에 멈춰 섰다.
그의 눈이 멈춘 곳에는 담홍빛의 고치 같은 것이 신비한 빛을 내뿜으며 떠있었다.
고치처럼 생긴 담홍색 물체를 바라보던 이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눈앞의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 핵마저 모두 사용한 마당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수정벽은 엄청 단단해 보이는데. 색깔도 지금까지 봤던 것보다 훨씬 짙어졌어.’
이준이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힘차게 발을 내딛자, 자갈색 화룡이 그의 팔을 뒤덮으며 귀를 찌르는 듯한 포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다음 순간, 이준의 주먹이 단단한 수정벽과 맞부딪히며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모든 사람들이 마른 침을 삼키며 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강철처럼 단단한 수정벽에 작은 균열들이 퍼져나가더니 결국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굳어있던 결정들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순간, 이준의 손끝에 미지근한 물체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이준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그대로 주먹에 쥐어 저장 반지 안에 집어넣고는 힘차게 발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가요!”
마침내 마지막 벽이 무너지자, 불안한 눈빛으로 이준의 뒤를 따르던 다른 강자들 역시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 * *
식인 벌레가 우글대던 끔찍한 장벽을 넘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회색 대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천상 무덤의 3층에는 2층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짙은 에너지 안개가 가득했으며, 발을 내딛자마자 순수한 에너지가 홍수처럼 몸 안으로 밀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애써 에너지 핵을 흡수하지 않아도 1, 2층에서 흡수한 것 이상의 염력을 흡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였다.
“이곳이 바로 천상무덤 3층인가…….”
사람들은 한껏 들뜬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덕인지 짜릿한 느낌이 온몸을 관통했다.
우웅!
하지만 그들이 생환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거대한 빛기둥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웅!
잠시 후, 한 번 더 정체를 알 수 없는 낮은 소리가 터져 나오며 그들이 빠져나온 통로 속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고대 식인벌레들이 쫓아오고 있다!”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자, 십여 명의 투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벽을 벗어나는 순간, ‘치익’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수 만 마리의 벌레가 하얀 가루로 변해 허공에 흩어졌다.
8대 세력의 젊은 강자들은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광경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달아나는 것조차 잊고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뇌족의 사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중얼거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수 만 마리의 동족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음에도 더욱 많은 벌레들이 스스로 허공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의혹에 빠진 사이, 이준은 손가락에 끼워진 저장반지를 남몰래 문질렀다.
‘설마 조금 전에 내가 가지고 나온 물건 때문인가?’
고대 식인벌레들의 이해할 수 없는 자살 행위는 10분 가까이 지속되었고, 수정벽 앞에는 놈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작은 언덕이 생겨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대 식인벌레들이 자살을 멈추고 거대한 벽 안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갑시다.”
고대 식인벌레들이 벽 안으로 돌아가자, 고청양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고청양의 말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려던 이준은 그제야 자리에 있던 사람이 열이 아니라 여덟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모두가 식인 벌레에게 한 눈이 팔려있을 때, 혼려와 혼야가 달아나버리고 만 것이다.
“진짜 비겁한 놈들이네.”
이은 역시 그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허허, 이준씨.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3층에 왔으니 이제 우리 두 사람도 수련할 곳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화현이 이준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이준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3년 후에 봅시다.”
화현과 화유진이 떠나자 석족과 뇌족(雷族)의 사람들도 작별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곧이어 약족의 두 강자도 이준을 힐끔 쳐다본 뒤 말없이 제 갈길을 갔다.
이제 자리에 남은 것은 고족의 네 강자와 이준, 이은 뿐이었다.
“은아,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고청양이 이은을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죠?”
이은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고청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이준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현의 무덤으로 향하나 보군. 그곳은 천상무덤 깊은 곳에 있어 8성, 9성 투존급 에너지체조차 흔히 볼 수 있지. 한둘은 괜찮지만 너무 많아지면 아주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해. 최악의 경우 투성급 에너지체를 마주칠지도 모르니 항상 주위를 살피며 이동하고. 투성급 에너지체를 만나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어.”
고청양의 충고에 이준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고청양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돌려 고족의 나머지 세 강자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이냐? 3년 동안 수련할 곳을 찾을 계획이냐?”
“가능할 것 같아? 천상무덤에 들어오자마자 이은을 보호하란 통현 장로님의 지시를 받았는데, 이건 나한테만 내려진 분부가 아니지 않나?”
고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은색 의복을 입은 남자 역시 가볍게 어깨를 들어 올리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태 내 소개를 안 했군. 흑연군 둘째 수장, 고화라고 하네. 예전에 이은이 왜 자넬 고집하나 했는데, 지금 보니 이유를 알 것 같군.”
“나도 지시를 받았다고.”
마지막으로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허허, 하고 웃으며 말했다.
“흑연군 셋째 수장, 고형이오. 신세 많이 졌소.”
네 사람의 호의적인 태도에 이준은 다시 한 번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고계에서 만났던 고족의 다른 투사들과 달리 이들은 자신에게 그다지 나쁜 감정이 없어보였다. 특히 3층으로 통하는 거대한 장벽을 돌파한 뒤부터 그들은 자신에게 눈에 띄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청양이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 함께 움직이는 게 좋겠군. 함께 한다면 투성 에너지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현의 무덤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자네의 실력에 달려있네. 우리 고족의 강자들도 그 곳에 간 적이 있었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들어갈 수가 없었지.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는 것이 좋을 거야.”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분명 수확이 있을 겁니다.”
“그러길 바라지.”
이준의 말에 고청양은 고개를 들어 회갈색 대지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들이쉬었다.
“그럼 이제 움직이지. 3층은 얼마나 위험한지 한 번 직접 보자고!”
“예. 갑시다.”
말을 마친 여섯 명의 강자는 일제히 하늘 위로 날아올라 빠르게 3층의 안쪽으로 향했다.
* * *
한편, 이준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청양 일행이 이준과 함께 움직이다니 골치 아프게 됐군.”
혼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짜증나는 것들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으니 잘됐어.”
혼야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회갈색 대지가 넓게 펼쳐진 이공간 속에는 신비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짙은 안개가 바람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광활한 대지 한구석에는 여섯 개의 그림자가 모닥불을 피우고 동그랗게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 예상대로라면 이제 우리는 3층 깊은 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돼. 이곳이야말로 천상무덤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니까.”
고청양이 고개를 들어 안개가 자욱하게 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3개월 동안 다른 사람들을 한 번도 못 만난 걸 보니 다들 조용한 곳에서 수련하기로 마음먹었나 봐요.”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3층에 들어온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나 있었다. 그 동안 그들은 쉴 새 없이 천상무덤의 안쪽으로 들어왔지만, 강력한 에너지체들의 방해로 생각보다 멀리 오지는 못한 상태였다.
“천상무덤은 역시 생각처럼 편한 곳이 아니네. 지난번에는 목숨까지 잃을 뻔 했잖아.”
고화가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모닥불 속에 넣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있었다. 지난 번 8성 투존급 에너지체 무리를 만났을 때 생긴 상처였다. 그 날 전투는 생각 이상으로 참혹했지만, 다행히도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