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화. 수정벽을 뚫고
“고청양,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우릴 무덤으로 데리고 들어왔군.”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던 혼려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들을 데리고 들어왔으니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았으면 이미 저 에너지 폭풍에 휩쓸려 죽었겠지.”
혼려의 조롱 섞인 말투에 고청양의 눈에는 대번에 살기가 어렸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싸움을 벌였다가는 모두 식인벌레의 먹이가 되고 말 터이니 또다시 화를 눌러 참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양쪽 수정벽이 천천히 붙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이 통로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어지는 고청양의 말에 모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왔던 길을 돌아가 봐야 에너지 폭풍에 의해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죽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이 거대한 에너지 벽을 뚫고 나가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지금부터 모두 힘을 아끼지 말고 전력을 다해주십시오.”
고청양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 뒤 손을 휘둘렀다.
“움직입시다.”
“예.”
모든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끄덕인 후 빠르게 앞으로 나와 체내의 염력을 남김없이 터뜨렸다. 그러자 쾅, 하는 굉음이 통로 안을 뒤덮기 시작했다.
하지만 속도를 높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쪽 수정벽이 충격을 받은 듯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양쪽 수정벽이 서서히 붙고 있다는 것이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고대 식인벌레들이 점점 더 많이 모여들고 있어.”
벽 안을 바라보고 있던 고진의 얼굴은 완전히 흑색이 되어 있었다. 고대 식인벌레들이 에너지 액체를 분비해 벽을 복구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그들이 이 통로를 완전히 빠져나가기도 전에 길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이대론 안 되겠어요.”
상황을 지켜보던 이준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방법 말고는 방법이 없어.”
고청양은 질끈 눈을 감으며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하니 3층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준 역시 미간을 구긴 채 수정벽 사이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새하얀 벌레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수정벽이 복구되는 속도를 늦춰야 해요.”
그의 말에 고청양은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 어설프게 자극하면 저놈들은 더 빠른 속도로 분비물을 뱉어낼 거야.”
말을 마친 그가 가볍게 소맷자락을 휘두르자, 강력한 염력이 수정벽을 내리쳤다.
그러나 이내 그의 염력이 눈 녹듯이 사라지며 더욱 많은 양의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너도 봤겠지? 잘못 건드리면 벽이 복구되는 시간이 더욱 빨라질 뿐이야.”
이 광경을 바라보던 이준은 온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잠시 후, 말없이 서있던 고청양이 어두운 표정으로 수정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자그마한 벌레들이 빠르게 모여들고 있었다.
쾅!
또다시 그의 염력이 수정벽을 강타했지만, 이번에는 주먹이 박힌 자리에서 곧바로 액체가 흘러나와 단단한 결정체로 변화했다.
“고대 식인벌레들이 바로 앞까지 나왔어!”
고청양의 외침에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쾅쾅!
몇몇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벽을 내리쳤지만, 이제는 그들이 벽에 구멍을 뚫는 속도보다 벽이 복원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허, 고청양. 참 훌륭한 선택이었어.”
본래 낯빛이 창백했던 혼야가 더욱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때, 이준이 굳은 표정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소용없어.”
고청양이 낮은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은 그의 말에 대꾸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곧바로 하얀색 불씨가 섞인 자갈색 화염을 불러냈다.
“가라.”
이준이 손가락을 튕기자, 엄청난 열기를 머금은 불씨가 빠르게 날아가 단단한 수정벽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치이익!
곧이어 귀를 찌르는 소리와 함께 화염이 닿은 곳에 깊은 동굴이 생겨났고, 남아있는 뜨거운 열기가 고대 식인벌레들을 삽시간에 불태워 버렸다.
“천지의 불꽃을 삼키지 못하는 걸 보니 아직 희망이 있어 보이네요.”
그 순간, 가만히 이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다시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준, 빨리 통로를 뚫어!”
혼야 역시 기뻐하며 이준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준은 그를 무시하고 염족의 여자와 약족의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통로는 제가 만들 테니 두 분이 수정벽이 빠르게 붙지 않도록 양쪽을 맡아주십시오.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저 여자는 화유진이에요. 천지의 불꽃 중 여덟 번째 불꽃인 홍연의 불꽃을 갖고 있죠. 약족의 남자는 약성지라고 하는데, 약족에서도 뛰어난 연금술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난 자예요”
이은이 이준의 곁으로 다가와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홍연의 불꽃?’
그녀의 말에 이준은 잠시 멈칫거리며 화유진을 바라봤다.
이준의 말을 들은 화유진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약성지는 그의 제안이 불만인 듯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 역시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준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수정벽을 뚫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천지의 불꽃을 사용하는데 체력 소모가 얼마나 큰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 제가 혼자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다른 분들이 에너지 핵을 지원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준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 이준에게 에너지 핵을 건넸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모두를 위한 선택이지. 이건 우리가 그동안 모은 에너지 핵이오.”
가장 먼저 이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뇌족의 젊은 강자였다. 그가 이준에게 건넨 보자기에는 얼핏 봐도 백 개 이상의 에너지 핵이 들어 있었다.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순서대로 에너지 핵이 가득 들어있는 보자기를 꺼내 이준에게 던졌다.
이준은 미소를 지은 채 모든 사람들의 보자기를 받은 후 혼야와 혼려를 보며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너지 핵은?”
“이준, 그렇게 많이 얻었는데 아직 모자란 건가?”
혼야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충분하든 충분하지 않든 보수는 받아야지.”
하지만 이준은 저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고 이 통로를 통과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물론 원하지 않는다면 말리진 않겠어. 대신 당장 몸을 돌려서 이 통로 밖으로 나가줘.”
이준이 뒤쪽을 향해 손짓을 하자, 혼야와 혼려의 두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준을 공격한다면 이 통로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 뻔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이준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보자기를 집어던졌다.
사람들에게 에너지 핵을 건네받은 이준은 웃음기를 지우고 수정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수정벽 뒤에는 이미 육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밖으로 튀어나온 벌레들이 쉴 새 없이 끈적한 액체를 내뱉고 있었다.
“양쪽은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이준이 고개를 돌려 화유진과 약성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화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약성지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인 뒤 검은색 화염을 피워 올렸다.
그의 손에 피어오른 검은 화염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을 자아내는 기이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자리에 있던 젊은 강자들은 약성지의 손에서 불타는 검은 화염을 보자마자 놀란 듯 찬 숨을 들이쉬었다.
“죽음의 불꽃, 천지의 불꽃 중 열 번째 불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약성지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말했다.
“죽음의 불꽃이라니…….”
이준의 시선 역시 못 박힌 듯 검은색 화염에 고정되어 있었다. 죽음의 불꽃은 별의 불꽃보다 순위는 낮지만 별의 불꽃 못지않게 기이하고 구하기 어려운 화염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준은 이 이화를 얻기 위해 약족이 내놓은 대가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치익!
사람들이 약성지 손에 나타난 죽음의 불꽃을 지켜보고 있을 때, 갑자기 미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통로 안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붉은빛이 피어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신비한 붉은빛의 근원지는 바로 화유진의 손바닥 위였다.
붉은 화염이 나타나자, 약성지 손에 있던 죽음의 불꽃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더욱 강한 불꽃이 나타나니 기가 죽은 모양이었다.
“하하, 이게 바로 염족의 홍연의 불꽃이군요.”
고청양이 화유진의 손에 있는 불꽃을 바라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네.”
화유진은 웃으며 겸손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이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화유진의 도발적인 눈빛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얌전한 척하고는 있지만, 화유진의 얼굴에는 ‘네 불꽃과 내 불꽃 중 어느 것이 더 강하다고 생각해? 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이에 이준은 그녀의 눈빛을 애써 못 본 척 무시하며 자신의 자갈색 화염을 불러냈다.
크르릉!
이준의 불꽃이 나타나자, 이번에는 홍연의 불꽃이 가볍게 흔들리며 붉은빛이 옅어졌다. 홍연의 불꽃보다도 더욱 순위가 낮은 죽음의 불꽃은 아예 꺼질 것처럼 위태롭게 일렁이며 특유의 바람 소리마저 멈춰버렸다.
“흠……. 불꽃 하나하나의 힘은 내 것만 못하지만 그것들을 합쳐 내 불꽃보다 더 강해졌군요. 천지의 불꽃을 융합시키다니. 이런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화유진이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준은 이런 위험한 곳에서 화유진과 천지의 불꽃 중에 무엇이 더 강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융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토론하고 싶지 않았다.
“자, 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시작합시다.”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인을 맺어 삼천 불꽃을 용의 형상으로 바꾸어 눈앞을 막고 있는 거대한 벽을 향해 날려 보냈다.
주인의 손을 떠난 화룡은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며 빠른 속도로 단단한 벽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따라 와요!”
이준은 화룡의 꼬리를 잡은 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고, 고청양을 비롯한 8대 세력의 강자들이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화염 통제력이 상당한걸.”
화룡을 앞세워 길을 뚫고 나아가는 이준의 모습에 화유진은 놀란 듯 감탄사를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며 붉은 화염을 뿜어내자, 좌측에 있던 수정벽이 녹아내리며 액체가 응고되어 벽으로 변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반대편에 있던 약성지 역시 작업을 시작했다. 비록 이준의 지휘를 따른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갈색의 화룡은 끊임없이 뜨거운 불꽃을 내뿜으며 벽 안에 숨어있던 고대 식인벌레들을 태워 죽였지만, 벌레들은 마치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마냥 계속해서 튀어나와 이준 일행의 앞길을 막았다.
“에너지 소모가 장난이 아닌걸.”
무시무시한 속도로 염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이준은 빠르게 보자기 하나를 집어든 뒤 그 안에 있는 에너지 핵을 꺼내 빠른 속도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길을 뚫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염력이 떨어져가는 듯한 이준의 모습에 뒤쪽에 서있던 뇌족의 젊은 강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대로라면 30분 안에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은색 의복을 입은 남자가 이준을 대신해 조용히 답했다.
그 후로도 이준은 몇 번이나 에너지 핵을 꺼내 염력을 보충하며 길을 뚫었고, 그의 뒤를 따르던 8대 세력의 강자들은 그때마다 불안한 듯 마른 침을 삼켰다.